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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7화 (12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7화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시안과 헥토르는 켈드윈을 거점으로 삼아 거인들의 무덤을 탐색하고 다녔다.

물론 거점으로 삼았다고 해도 아주 가끔 보급이 절실한 때에나 가끔 들렀을 뿐이다.

그 가끔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간을 거인들의 무덤에서 보냈다.

숲이었기에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고 자는 것도 문제없었다.

시안은 언제 어디서도 잘 잘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었으며, 헥토르는 애초에 산과 들에서 밤하늘을 천장 삼아 잠들던 녀석이다.

―캬아악!

반년 전, 여왕을 잃고 한동안 혼란스러웠던 자이언트 앤트의 세력은 이제는 거의 수습되었다.

다만 이전과 같이 공고한 세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자기들끼리 파벌이 나뉜 건지 뭔지는 몰라도, 동족끼리 싸우는 광경이 수도 없이 목격된 것이다.

아마 강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던 여왕개미가 죽음으로써, 고만고만한 놈들을 위주로 무리가 나눠진 모양이다.

덕분에 개미들은 이전처럼 끊임없이 몰려오거나 하진 않았다. 더욱이 반이 만들어준 향수도 있었기에 더욱 안전했다.

다만.

“향수 쓰자, 귀찮은데.”

“웬만하면 아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어.”

“에휴, 알았다.”

여왕개미의 체액으로 만든 페로몬은 반년 동안 거의 동났다.

이럴 거라 예상해서 꼭 필요할 때만 아껴서 써왔지만, 그것도 이젠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시안과 헥토르는 매일같이 적지 않게 개미들을 잡아 오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헥토르가 반대쪽 개미들을 처리하러 가는 것을 보곤, 시안도 검을 들었다.

[ 검령(劍靈) – 백화(白花) ]

이윽고 그의 손에 나타난 검은, 검이라고 하기엔 다소 이질적인 모양이었다.

창과 같이 기다란 손잡이 끝에 휘어진 검신이 달려있다.

흔히 글레이브, 혹은 일부에선 언월도 등으로 불리는 무기.

백화의 중심을 잡고 한 바퀴 돌리니 검신과 손잡이 끝, 두 부분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얀 불꽃 속에, 검은 오러가 넘실거리며 비쳐 보이는 신비로운 불꽃.

시안이 불꽃에 싸여 있는 백화를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파아아아아!

백화의 불꽃이 달려드는 개미 무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이 압도적인 위력. 백화의 불꽃이 휩쓴 자리에는 개미들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후우…… 역시 소모가 큰데.”

세드릭의, 백염의 악마의 힘을 흡수해 획득한 검.

파괴력만큼은 발군이다. 지금껏 시안이 가졌던 어떤 검보다도 광범위하고 강한 위력을 가졌으며, 다루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다.

심지어 세드릭 본인이 쓰던 하얀 불꽃보다도 더 위력적이었다.

다만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 불꽃이 시안의 오러를 적지 않게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상성은 나쁘지 않아.’

시안의 밤의 오러와 백화의 불꽃. 상성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밤의 오러를 연료 삼아 한 번 불꽃을 땡기면, 시안조차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오러를 빨아들이는 것이 문제다.

반년 동안 꾸준히 연습을 해서 지금은 호흡이 거칠어지는 정도지, 처음 이 검을 뽑아 휘둘렀을 땐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을 정도다.

‘그만큼 위력은 있으니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소모하는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력한 위력이긴 했다.

지금까지 시안이 얻어왔던 검 중에 위력으로 승부를 보는 검은 창해와 뇌명 두 자루다.

그러나 그 둘은 악마의 힘을 일부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해령궁주는 강림하지도 않고 꼬리 자르듯 도망갔고, 뇌력천주는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약간만 흡수하고 말았다.

데릭 교수에게 강림했던 다크 이터나, 하이 오크 아기에게 강림했던 쓰레기산의 죄수의 힘은 온전히 빼앗긴 했지만.

그들에게서 얻은 검륜과 비검은 위력이란 단어와는 맞지 않는 검들이다.

애초에 다크 이터나 쓰레기산의 죄수는 악마로서의 격이 떨어지는 놈들이기도 했고.

‘반면에.’

이 백염의 악마의 힘은 절반 이상을 온전히 흡수했다.

거기다 격도 낮지 않다.

알렌은 알티마의 청염으로 다크 이터를 완전히 압살했다. 그러나 그 푸른 불꽃은 세드릭의 백염에게 패배했다.

그것만 봐도 백염의 악마가 가진 격은 다크 이터 따위보다 훨씬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힘으로 획득한 검이, 밤의 오러와 상당한 상성을 보이기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무기였다.

‘훈련은 아직 많이 필요하겠지만.’

단지 아직도 힘의 조절이 잘되지 않을 뿐…….

“다 끝났냐?”

그때, 헥토르도 반대쪽의 개미들을 다 정리했는지 휘적휘적 다가왔다.

둘 모두 요 반년 동안 개미를 상대하는 데는 이력이 났다. 시안이 백화를 다루는 것에 다소 오러를 소모한 것을 빼고는, 컨디션이 전혀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 대충 정리됐으니까 가자.”

시안이 그를 대동하곤 다시 숲을 걷기 시작했다.

방향은 동쪽. 그들은 동쪽으로 향하며 거인왕이 마지막을 맞이했을 법한 장소를 계속해서 찾아다녔다.

“유적 같은 거 발견하면 얘기하고.”

“알았어.”

가능성 중 하나로는,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벤델 영지에서 아틀란타를 조우한 곳도 유적 안이 아니었던가. 당시 사슬에 묶여 있던 바다의 거인 아틀란타.

만약 그 유적이 봉인의 사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거인왕을 잡아두는 데도 쓰이고 있으리라.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기에, 수상한 장소나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모두 확인해 보고 있었다.

‘이제 거의 동쪽 끝에 도착한 거 같은데.’

시안이 대륙의 전도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켈드윈의 위치와 마지막으로 켈드윈에 들렀던 날도.

벌써 몇 달 동안 꾸준히 동쪽으로 향했다. 조금 있으면 대륙 동쪽의 끝에 도달할 무렵이다.

그렇게 적당히 주변에서 식량을 구해 먹고, 잠자리를 청하기를 열흘.

“저건…….”

“확실히 수상해 보이는군.”

드디어 뭔가를 발견했다.

인공적으로 쌓아 올렸던 유적의 터.

자연적으로 풍화가 된 것인지 마물들의 발에 짓밟힌 것인지, 남은 것은 터와 얼마 안 되는 잔해뿐이었지만, 확실히 사람의 손길이 탄 장소였다.

그리고 근처를 샅샅이 뒤져보니, 지하 쪽으로 향하는 통로가 발견됐다.

“들어가자.”

“응.”

시안과 헥토르가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 * *

“콜록, 콜록!”

들어오자마자 헥토르가 기침을 해댔다. 시안도 옷소매로 입가를 가리었다. 내부는 돌가루와 흙먼지가 가득해 자욱할 정도였다.

“야, 주인아 물이라도 좀 뿌려봐.”

“기다려봐.”

시안이 창해를 꺼내 얇고 넓게 물을 뿌렸다. 검의 기능을 이런 데 쓴다는 게 좀 찝찝하긴 했지만, 있는 걸 쓰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유적 내부로 들어갔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곳이었지만 그건 전혀 상관없었다.

전격이 튀는 뿔을 내놓은 헥토르가 인간 횃불이 되어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들어가다 보니.

―크락!

저 앞쪽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 평범한 이라면 손쓸 틈도 없이 목을 내어줬겠지만, 이곳의 두 사람 중 그런 약한 이는 없었다.

파직!

―크라락!

헥토르가 손짓 한 번으로 놈을 완전히 제압했다. 한 줄기 전격을 받은 녀석이 바닥에 엎어져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뭐야?”

“마물인가? 처음 보는 모습인데.”

엎어진 녀석은 참으로 기이한 생김새였다.

얼핏 인간과 닮은 이족보행. 하지만 전신이 칙칙한 검은빛이었고 얼굴엔 눈도 코도 입도 달려 있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손톱 발톱이 날카로운 것도 아니고, 유달리 긴 손가락 말고는 특징적인 것이 없었다.

엎어져 부르르 떠는 녀석에게 시안이 검을 박았다.

손맛이 생각과는 달랐다. 살과 근육을 뚫었다는 느낌보다는, 연기나 슬라임 같은 유체(流體)에 칼을 박은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 사라졌다.

“거인들의 기운이 뭉쳐서 탄생한 마물인가?”

“그거 슬라임이란 말 아냐?”

“베는 느낌도 비슷해.”

인간 형태의 슬라임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지만, 평범한 마나가 아닌 거인들의 기운으로 탄생했다면 거인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도 이상하진 않겠지.

―크락!

―크라락!

그리고 머지않아, 둘은 계속해서 인간 슬라임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시안의 지시로 앞서서 놈들을 처리하는 헥토르 뒤에서,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군.

“잘됐군.”

“뭐가?”

“이런 놈들이 있다는 건 안쪽에 뭔가가 있단 얘기니까.”

지금까진 찾아볼 수 없었던 마물이다. 이 유적에 무엇인가는 반드시 있다는 얘기.

그게 찾고 있는 거인왕일지 아닐지는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방향을 잡기에도 좋겠어. 녀석들이 많이 나오는 쪽으로 들어가자.”

“……그리고 나오는 놈들은 내가 다 처리하고?”

“어렵지도 않잖아. 개미보다도 약한데.”

“쳇.”

뚱하게 입술을 삐죽이는 헥토르를 대동하곤 시안이 미로 같은 유적 내의 방향을 잡았다.

기준은 이 인간 형태의 슬라임들이 더 많이 나타나는 쪽으로.

놈들이 거인의 기운으로 인해 탄생한 놈들이라면, 거인이 존재하는 곳에 더 몰려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더 안쪽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윽고 그들이 유적의 최심부에 도달하게 되었고.

“누구인가?”

그곳에서, 그를 발견하였다.

* * *

커다란 대전이었다.

가운데의 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기둥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 뒤에는 고개를 숙인 거인들의 모습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

모두 시체였다. 죽은 채 바위처럼 굳어버린.

“누구인가?”

대전의 끝에는 거대한 바위가 보였으며, 그 앞에 돌로 된 옥좌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꼬마?”

하얀 머리칼의 작은 꼬마 아이.

잘 쳐줘도 10살은 되었을까 싶은.

“손님은 오랜만이구나. 아니, 처음인가? 하도 오래돼서 잘 기억나질 않는군.”

녀석이 가만히 앉은 채 작게 웃으며 얘기했다.

촤륵.

꼬마의 양손에는 사슬이 매여져 있었고, 그 때문에 꼼짝없이 옥좌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모양새였다.

시안이 슬쩍 헥토르를 보았으나,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겠다는 뜻의 몸짓이었다.

“내 이름은 시안이다. 너는 누구지?”

“시안이라. 보아하니 인간인 모양인데.”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다.

뭐 애초에 이런 곳에 저렇게 묶여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냐마는.

시안과 헥토르를 보며, 정말로 오랜만의 손님을 맞이하는 듯이 녀석이 웃으며 얘기했다.

“승자인 너희들이 이 패배한 왕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거지?”

거인왕.

그 호칭과 다르게 작은 꼬마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정체였다.

그렇게 실실거리며 웃던 그가, 문득 시안을 보고는 웃는 것을 멈추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오며 눈의 안광이 짙어진다.

그가 시안의 오른쪽 손목을 한번 보고는, 다시 시간을 쳐다보았다.

“그렇군…… 너, 그년의 후인(後人)이로구나?”

달그락 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두두두―

작은 아이가 일어선 것임에도, 거인이 몸을 일으킨 것만 같이 유적이 진동했다.

“어떻게 편하게 가는 일이 하나 없냐, 주인아.”

“그러게 말이다.”

역시 말보다 주먹이 먼저라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안이 전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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