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6화 (126/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6화

세드릭의 목이 떨어졌다. 사람은 목이 떨어지면 죽는다. 이걸로 전투는 끝이었다.

그랬을 테지만.

“…….”

“…….”

시안도 알렌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놈에게선 피가 그다지 흘러내리지 않았다.

목이 떨어졌는데도 한줄기 마지못해 흘러내리는 게 전부. 그 기괴한 광경에 시안도 알렌도 태평하게 싸움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새끼들이…….”

떨어진 목이 입을 열었다. 이내 머리통 전체가 하얗게 불타오르더니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재는 세드릭의 목 위에 모여, 새로운 머리를 만들었다.

그가 백염의 악마를 처리하고 얻은 가장 큰 능력.

그는 이미 평범한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다 태워주마!”

그의 등에서 하얀 불꽃이 날개처럼 넘실거렸다. 6장의 날개를 만든 그가 날아올랐다. 그 몸을 따라 백염이 기류처럼 흐르며 돌아다녔다.

그런 녀석을 향해 검 한 자루가 쏜살같이 쇄도했다. 비검으로 시전한 상천검, 섬.

세드릭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니 하얀 불길치 치솟아 비검을 날려 버렸다.

‘저놈이 제일 거슬려.’

그가 시안을 쏘아보더니 더 높이 날아오르려 하였다. 고대 정령의 힘은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다. 보다 거슬리는 건 검을 든 시안 쪽.

일단 날아서 놈의 영역에서 벗어날 생각이었으나.

[ 정화구역, 쇄(鎖) ]

그사이 알렌이 있는 힘을 다해 쇄(鎖)를 시전했다. 가능한 아끼고 있던 힘을, 정말로 모두 끌어모은 것이었다.

그들의 사방으로 육면체의 불이 생겨나 그들을 가두었다.

화륵!

막 날아오르던 세드릭이 쇄의 천장에 부딪쳐 그대로 가로막혔다.

“이딴 걸로……!”

그가 이를 갈며 힘을 모았다. 쇄를 뚫고 가기 위한 에너지가 그의 손바닥에 둥글게 뭉쳤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쇄에 박을 수 없었다.

바로 다가오는 시안을 막기 위해 써야 했기에.

―콰앙!

“컥!”

쏘아진 검은 검기를 세드릭이 모아놨던 백염의 구체로 방어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검기가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생각 이상의 충격에 밤의 오러와 백염이 뒤섞여 폭발하며 세드릭의 몸체가 흐트러졌다.

그를 놓치지 않고 시안이 뛰어올라, 그 머리에 천뢰를 떨어뜨렸다.

“크악!”

쿠웅! 천뢰는 어떻게 막아내었으나 그 반동으로 세드릭이 땅에 떨어졌다.

다급히 녀석이 날개로 만들었던 백염의 불꽃을 전방으로 돌려 시안의 접근을 막았다.

콰과과과광!

‘쇄’의 안쪽 공간이 빼곡히 터져나가며 그 충격과 열파가 고스란히 시안에게 쏟아졌다.

그에 맞서 시안이 택한 것은.

[ 검령(劍靈) – 창해(蒼海) ]

해령궁주의 힘으로 자아낸 바다의 기운이 담긴 검.

치이이이익! 창해를 휘둘러 백염의 열파를 막아내어 길을 만든다. 갈라진 불꽃 너머에서 이를 가는 세드릭의 모습이 보였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그 사이를 밟고, 시안이 뛰었다. 세드릭이 다급히 주문을 만들어 쏘아보지만 소용없었다.

급히 만든 주문 따위로 시안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커헉!”

놈의 심장에 시안의 검이 박혔다.

그러나 아직 아니다. 악마의 힘으로 이루어진 녀석은 이것으론 죽지 않는다.

‘웅!’

이윽고 라비가 놈의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시안!”

그 사실을 모르는 알렌은 불을 조정하며 ‘쇄’를 좁혔다. 이윽고 쇄의 벽이 세드릭을 감싸며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내부에서 힘을 빨아가는 라비, 그리고 외부에서 정화시키는 알티마의 불꽃을 놈은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이윽고.

마지막 촛불인양 크게 백염이 타오르는 것을 끝으로, 놈은 그대로 재가 되었다.

사람으로서의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 사라졌다.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은 녀석의 모습에, 알렌이 멍한 표정으로 놈이 죽은 마지막 자리를 바라보았다.

‘끝난…… 건가? 이걸로?’

알렌은 스스로 실감을 갖지 못하였다. 이걸로 끝나? 정말로?

힘을 길러, 천도맹에 들어 흑마법사를 쫓았다. 언젠가는 원수를 찾아내어 복수를 이루기 위해.

그런데 그날이 이렇게 빠르게 찾아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하였다.

「알렌…….」

알티마가 그런 알렌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었지만 알티마는 작은 새가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현현했다.

이전보다 힘을 더 잃은 지금, 더 작아지진 않았지만 그녀를 이루는 불꽃 자체가 훨씬 더 흐려져 있었다.

알렌이 그런 알티마를 안았다.

「이제 끝났네.」

“미안…….”

「고맙다고 해야지.」

알티마가 흐릿하게 웃었다. 청류옥의 힘을 거의 소진한 지금, 그녀는 이렇게 현현한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래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렌의 인생에서 한 가지가 끝나고, 그리고 또 다시 시작하는 날이었기에.

「고마워, 시안. 네 덕분이야.」

안겨 있는 알렌의 어깨 너머로, 알티마가 시안에게 얘기했다.

시안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두 사람을 두곤, 시안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개미들은 빠르게 정리됐다.

거기엔 여왕개미를 처리한 에르제의 역할이 컸다. 시안과 알렌이 세드릭을 맡고 있는 동안 그녀는 여왕을 죽였다.

이미 시안에게 악마의 육체를 절반이 파괴당한 후라 훨씬 약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에르제의 활약은 적지 않았다.

그렇게 여왕을 처리하자, 그 즉시 개미들의 동태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꾸준하게 나름의 질서를 갖추며 밀고 들어오던 녀석들이, 여왕의 죽음과 동시에 미친 것처럼 꼬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 열의 녀석들이 들어오지 않고 서성거리며 발광을 하니, 뒤에 있던 녀석들도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신이 나간 개미들을 처리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대강의 상황이 정리되고, 남은 것은 부서진 도시의 잔해와 수많은 개미들의 시체들.

“알렌은?”

“잠시 혼자 있게 해달래.”

주민들이 도시의 정리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시안과 에르제는 한쪽에서 쉬고 있었다.

이번 일의 일등 공로자들을 잡일에 투입할 순 없다며, 시장이 강제로 앉힌 결과였다.

한편 꽤나 지친 두 사람에 비해, 헥토르는 쌩쌩한 모습으로 나뭇등걸에 기대어 있었다.

“생각이 많을 만도 하니.”

“……무슨 일 있었어?”

“본인한테 물어봐. 내 입으로 얘기할 건 아냐.”

분위기상 뭔가 일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는 알렌의 사정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자신이 얘기할 순 없다.

수통의 물로 목을 축이며 그렇게 잠시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야, 주인.”

헥토르의 부름과 동시에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개미들의 사체를 정리하던 주민들도 한쪽을 보며 움찔 몸을 떨었다.

“부, 불꽃이다!”

“뭐야! 또 뭐가 남았어!?”

한쪽에서 크게 터지며 피어오르는 불꽃.

피처럼 붉은 그 불꽃을 보며 시안이 얼굴을 굳혔다.

설마…….

“저거 그 노인네 아냐?”

헥토르가 얘기했다. 시안은 그걸 부정하지 못했다.

저 불의 색깔도, 그리고 이쪽까지 풍겨오는 기운의 느낌도, 그의 것과 꼭 닮아 있었기에.

잠시 후.

“도련님. 역시 여기에 계셨군요.”

염노가, 손에 피어올린 불꽃을 꺼뜨리며 부서진 켈드윈에 나타났다.

“염노.”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도망치면 혹시 가주가 추적자를 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염노가 찾아올 줄이야.

“도련님…….”

염노가 무척이나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시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과연 무슨 얘기를 가져왔을까.

돌아오라는 얘기? 아니면 가주가 대노하여 변절자의 척살을 명했다는 얘기?

온갖 상상이 머리를 헤집고 다닐 때, 염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얘기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항상, 그에게 들어왔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였다.

* * *

“아, 안녕하세요. 에르제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염노라고 불러주십시오.”

어쩌다 보니 모닥불을 두고 간단히 식사를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홀로 어딜 갔는지 사라져 있는 알렌을 빼놓고는, 시안과 에르제, 그리고 헥토르와 염노가 앉아있는 자리였다.

직접 끓인 수프를 나무 그릇에 떠주며 염노와 에르제가 인사를 나눴다.

“도련님이 혼자가 아니라 무척 다행입니다.”

“…….”

그 말에 시안은 문득 입학 당시 염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사람을 만들라고 했던.

당시의 시안은 대충 넘기긴 하였으나, 염노의 말에 담긴 본래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 후에 이안과 레이나, 드론드와 함께한 것을 보였을 때도, 방학 때 란과 샨을 데려갔을 때도.

염노는 항상 시안이 혼자 있지 않기를 바랐다.

“……가주의 명령을 듣고 왔나?”

“예.”

시안의 말에 염노가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바로 수긍했다.

“도련님이 대장군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쳤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가주님은 도련님을 끌고 오라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제가 온 것은 자원한 것이구요.”

그 말은 가주는 대장군의 행보에 찬성을 하고 있단 뜻인가?

아니면 그와 별개로 단순히 아그리드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판단하여 쫓은 것인가?

“그래서 말입니다만, 저와 함께 돌아가실 생각은…….”

“미안하지만 없어.”

시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상대가 염노라 할지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선이었다.

“그러시군요.”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염노는 웃었다. 고뇌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은 일절 없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

“도련님의 뜻만 알면 됐습니다. 가주님껜 찾지 못했다고 전하겠습니다.”

수프를 꿀떡 모두 넘기곤, 염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빠르게 포기할 줄은 몰랐기에 시안은 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힘으로라도 데려가겠다고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염노는 그걸로 괜찮겠어? 가주의 명령으로 온 거잖아?”

“그럼요.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고용된 집사에 불과하죠.”

“……?”

“가족의 뜻보다도 주군의 명령을 우선시한다거나, 그런 일은 제겐 무립니다.”

시안의 뜻을 확인했고, 그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만으로 염노의 목적은 모두 이루어진 것이었다.

가주에겐 조금 잘 둘러대야 되겠지만, 그쪽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떠날 준비를 하는 염노.

시안이, 눈을 감았다 뜨고는 그에게 얘기했다.

“후일 다시 만나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그가 웃고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 * *

모든 사건이 정리됐다. 결국 거인왕의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세드릭은 생포하여 뭘 물어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왕개미의 사체. 놈의 체액으로 반 아슬라가 약을 만들었다.

뿌리기만 해도 개미들을 공포에 질리게 해 쫓아내는 페로몬 약이었다.

“시안…… 나는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탐색의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불쑥 찾아온 알렌이 그리 얘기했다.

돌아가야 한다고. 크루거 백작에게 복수를 이뤘다는 것을 보고하러 가야 한다고.

“여기까지 와서 빠지는 게 미안하지만…….”

“됐어. 가봐라.”

시안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자신이 후작가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했던 것과 같이, 알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리라.

“에르제. 너도 그만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오히려 시안은 에르제에게 그렇게 권했다. 그녀는 자신이 위험해질까 걱정되어 따라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큰 위험은 없었다. 현재 거인들의 무덤은 자이언트 앤트가 거의 장악한 상태다. 반의 약이 있는 지금, 마물들의 위협을 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나…… 방해돼?”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에르제에게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방해될 리가.

하지만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부터 거인왕을 찾는 것은 그녀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일이었으니까.

떠나려면 알렌이 돌아가는 지금이 적기다.

“알렌이랑 같이 돌아가. 갈데가 없으면 크루거 백작가에서 식객으로 있겠다고 하면 받아줄 거야. 저 녀석 나한테 빚이 있거든.”

알렌이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는 시안에게 빚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빚이.

시안이 전혀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자, 에르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얘기했다.

“응…….”

후일 제국에 돌아가게 된다면 꼭 찾아오라는 당부와 함께, 두 사람이 떠났다.

염노도 떠나고 알렌과 에르제도 떠나고.

남아 있는 것은 헥토르뿐이었다.

“나도 가도 되냐?”

“되겠냐?”

“쳇.”

앞으로 할 일은 하나다. 거인왕의 수색,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

“가자.”

“그래, 알았다. 에휴.”

한숨을 쉬면서도 헥토르가 피식 웃었다.

이 꼬마 놈에게 족쇄가 채워진 것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적어도 지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여행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켈드윈을 거점으로 하여 거인들의 무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반년이 훌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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