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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5화 (125/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5화

세드릭 발노어는 한때 화염마탑의 마법사였다.

배려심이 깊진 않았으나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았고, 타인보다는 자신의 연구에만 심취하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

그랬던 그가 변하기 시작한 건,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스스로의 심상을 엿본 이후부터였다.

스스로의 심상을 직면하고, 그 이후로 세드릭의 학구열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을 가지고 싶다.

그런 욕구를 가지게 된 그에게, 화염마탑은 갑갑한 족쇄와도 같았다. 왜냐면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불꽃은 모두 화염마탑의 비전으로 내려오는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화염마탑을 배신하고 세상을 돌기 시작했고, 이내 칠흑마탑의 존재를 알고 그곳에 투신했다.

지옥의 불꽃은 과연 어떠할지 궁금했기에.

―화륵!

알렌이 일으킨 청염의 화살이 세드릭에게 쇄도한다. 그는 그걸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세드릭의 가슴에 박혀 타오르는 푸른 불꽃.

그러나 세드릭은, 고통스럽긴커녕 황홀하단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저게 그 자식이 얘기했던 고대 정령의 불이란 말이지.”

칠흑마탑에서 의식을 치르고 불의 악마와 계약했다.

그 악마가 한 얘기 중에 알티마에 대한 것이 있었다. 정화의 힘을 가진 푸른 불꽃의 정령이 존재한다고.

그 길로 고대 정령을 찾아 헤맸다.

알렌의 일족이 사는 마을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5년 후. 동시에 그날이, 마을을 전멸시킨 날이다.

―으득.

알렌이 이를 갈았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잡아서 목을 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데, 그의 불꽃은 닿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단련해왔던가?

길러주신 아버님의 뜻에 따라 천도맹에 들어간 것도, 결국은 원수를 잡아 복수하기 위한 것.

그런데 정작 그놈을 눈앞에 두고 자신은 무력하기만 했다.

“흑마법사라고 들었는데, 악마의 힘이 아니군.”

그 옆에서, 시안이 놈에게 검을 겨눴다.

반의 얘기도 그렇고, 알렌의 반응을 보면 칠흑마탑의 출신인 건 명백하다. 하지만 놈에겐 다른 흑마법사들과 같은 지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드릭이 그런 시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악마 녀석은 불만 뽑아먹은 뒤 소멸시켰다.”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의 악마. 그것만으론 얼마나 강한 악마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상에 강림을 꾀할 정도라면 결코 약한 놈은 아닐 것이다. 최소 헥토르와 동수는 이루지 않을까.

그런 악마를 일방적으로 처치했다면.

‘다른 흑마법사들과는 전혀 다르겠어.’

안드라스와 싸울 때, 녀석은 스스로 힘을 갈고닦기보단 받은 힘만을 과시하는 녀석이었다.

뇌력천주가 아닌 본래의 헥토르와 싸울 때, 녀석은 천둥마탑에서 20년 세월 동안 힘을 갈고 닦긴 하였으나, 그래도 결국은 뇌력천주의 힘에 기대는 녀석이었다.

둘 모두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다르다. 스스로의 힘으로 악마를 처치했고, 그 힘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지옥의 힘에 기대는 녀석이 아니라, 마스터가 지옥의 힘까지 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더 이상 입 아프게 말로 하지 않으마. 다 죽이고 가져가는 게 빠르겠군.”

그리 얘기하며 세드릭이 손을 들었다.

허공에서 거대한 불꽃이 터져나가며 도시로 수많은 유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나름 단단하게 세워놨던 목책이 나뭇가지처럼 부서지고, 모든 건물들이 불타 스러졌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은 불덩어리가 알렌을 향해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알렌이 이를 악물고 푸른 불의 장막을 펼치는 것을 보며 세드릭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고대 정령의 불꽃. 저게 온 힘을 다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약하다.

저 정도로 자신의 유성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 검령(劍靈) – 창해(蒼海) ]

물을 품은 검 한 줄기가 허공을 그었고, 쇄도하던 불덩어리들이 모두 잘려 터져 나갔다.

콰과과과광!

자욱이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세드릭과 시안의 눈이 마주쳤다.

“애송이가.”

시안의 눈을 본 세드릭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 * *

떨어지는 유성. 터져나가는 불꽃에 인간이고 개미고 공평하게 쓸려나가며, 지옥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거슬리니까 꺼져.”

시안을 째려보며 세드릭이 발치에 있던 여왕개미를 차서 떨어뜨렸다.

맥없이 추락한 여왕개미가, 고개를 붕붕 젓고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뛰었다.

이윽고 그녀가 막 개미를 베어가던 기사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그 머리통으로 송곳을 찌르려 할 때.

캉!

옆에서 튀어나온 단검 한 자루가 그녀의 송곳을 쳐냈다.

―키륵?

불쾌하다는 듯이 돌아보는 여왕개미의 목을, 에르제의 단검이 찔러 들어갔다.

그런 한편, 헥토르는 개미들과 떨어지는 불덩어리를 요격하며 주민들을 지키고 있었다.

‘쳇. 내가 왜 이런 일을.’

그로선 굳이 사람들을 지켜주러 다닐 이유가 없었다. 동포도 아니고 아는 이들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시안의 지시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

세드릭과 맞서는 시안을 보며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시가 없다면 지켜줄 이유가 없는 것은 시안 역시 마찬가지다.

시안은 그에게 많은 제약을 걸었지만 개중에 시안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 걸고 조력하러 올 것, 같은 제약은 없었다.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세드릭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헥토르 본인이 보더라도 상당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물론이고, 지옥에 있는 본신의 몸이라 하더라도 필승을 자신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시안은 오늘 여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흥, 좀 힘들어지면 도와 달라 하겠지.’

그는 절대 자진해서 도와주러 갈 생각이 없었다. 묵묵히 벼락을 가다듬어 개미들을 처리해 나갈 뿐.

그럼에도, 헥토르의 눈길은 주기적으로 시안 쪽을 살피고 있었다.

―콰앙!

세드릭의 불꽃과 알렌의 불꽃이 부딪친다.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알렌의 불꽃은 속절없이 밀렸다.

그러나 그 틈에 시안이 무너진 집의 잔해를 밟고 세드릭이 있는 허공으로 뛰었다.

촤르륵!

그의 손에서 풀려나간 창해가 세드릭을 일도양단하기 위해 떨어져 내렸다.

막 알렌을 끝장내려던 세드릭은 혀를 차며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 대염위(大炎威) - 폭쇄(爆碎) ]

콰과과과광!

그사이 알렌의 폭격이 자세가 흔들린 세드릭에게 쏟아졌다.

동시에 시안이 검을 뇌명으로 바꿔 천뢰를 찍어 내렸다.

“이 버러지들이!”

세드릭이 몸을 돌리며 펄럭 양손을 펼쳤다. 그 손에서 알렌의 것과 비슷한 푸른색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색만 비슷하지 알렌의 청염과는 정반대의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한 불꽃.

오른손의 불꽃이 알렌의 폭쇄를 상쇄해 갔고 왼손의 불꽃이 시안의 천뢰를 막으려다.

파지직!

“…….”

불꽃 따윈 갈라내며 떨어져 내리는 검을 보며 그가 황급히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불꽃이 회전하며 시안의 검이 옆으로 빗겨나갔다.

검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시안과 세드릭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쪽이 훨씬 위험하다!’

일순간에 그것을 파악한 세드릭이 손을 모아 원형의 불꽃을 만들었다. 압축하고 압축해, 밀도마저 띠게 된 주홍빛 불꽃.

‘라비.’

‘웅?’

‘잘 버텨줘.’

‘우, 우웅?’

의아해하는 라비를 비검으로 바꿔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 시안이 그 검을 밟고 뛰었다.

“……!”

세드릭이 기겁했다.

떨어져 내리는 검사를 보고 안도하며 큰 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설마 허공에서 2단 점프를 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갑자기 밟히게 되어 분개하는 라비를 뒤로하곤 시안이 각인 속에서 검륜을 뽑아 다시 한번 세드릭을 향해 휘둘렀다.

‘마법사가 가장 취약한 순간은.’

주문을 시작한 순간도 아니고 완성된 순간도 아닌 그 한중간. 한창 주문을 자아올리고 있을 때.

완성까지는 아직 남았고, 그렇다고 쌓아 올린 마나를 곧바로 흩어내는 것은 나름의 위험을 동반한다.

그 사이를 시안의 검이 찔렀다.

“크아악!”

세드릭이 어떻게든 몸을 빼긴 했다. 하지만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한쪽 팔이 주욱 찢겨 내리며 피가 튀어 나왔다.

“알티마!”

「응!」

알렌이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다. 그가 만든 푸른 불꽃의 화살이 허공을 수놓으며 상처 입은 세드릭에게 떨어져 내렸다.

땅에 착지한 시안 역시,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흑검.

가장 기본적인, 그리고 시안 자신의 검술에 가장 최적화된 형태로 만든 그 검을 손에 쥐고.

시안이 오러를 그러모아, 천뢰를 내리쳤다.

―콰과과과과광!

알렌의 푸른 불꽃과 시안의 검은 오러가 추락한 세드릭을 향해 쏟아진다.

세드릭에겐 그것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죽어! 죽어!!”

한 번의 공격에 그치지 않고 알렌이 불꽃을 계속 쏟아내었다. 청류옥의 남은 힘을 모조리 탕진해도 괜찮다는 듯, 그의 손속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 속에 담긴 분노와 증오, 울분. 그 모든 감정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세드릭을 꿰뚫었다.

“크아아!”

그러나 그 정도로 당할 그가 아니었다. 분노한 세드릭의 몸에서 마나가 넘실거리더니, 하얀 불꽃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하얀 불꽃은, 알렌이 쏟아내는 불꽃을 모조리 빨아들이며 더더욱 몸집을 불려 나갔다.

“빌어먹을 꼬맹이들이!”

과거 그에게 깃들어있던, 백염의 악마에게서 뽑아낸 불꽃.

알렌의 불꽃을 흡수하며 더더욱 커진 백염을 두르곤 세드릭의 눈이 뒤집혔다.

이윽고 그의 백염은 도시 전체를 휘몰아칠 파도와 같이 그 크기를 불려갔다.

알렌의 불꽃도, 다른 인간들의 오러도, 개미들조차도 백염의 파도에 압도되며 밀려 나가기만 했다.

그때.

“……!”

유일하게, 하얀 파도를 뚫고 거슬러 오르는 이가 있었으니.

‘악마 본인이 아니라 족쇄는 안 되지만.’

흑검을 쥔 시안이었다.

그의 검이 백염을 가르고, 그곳에 담긴 지옥의 기운을 역으로 빨아들이며 세드릭에게 쇄도했다.

“이 새끼가아아아아!”

서걱.

기함을 지르는 세드릭의 목을 시안의 검이 긋고 지나갔다.

* * *

거인들의 무덤.

개미들의 갑작스러운 준동으로 난리가 난 그곳에 새로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노인이, 의문을 띤 표정으로 나아갔다.

아무리 이곳이 마물의 땅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이진 않았는데.

마치 굴 깊숙이 활동하던 개미들이 모조리 올라온 것마냥 지상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전쟁의 영향이 여기까지 미칠 리도 없고…….’

뭔가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노인이 굳은 표정으로 개미들을 뚫고 나아갔다.

목적지는 켈드윈. 정황상 그곳에 그가 찾아 헤매던 이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초입이 이 정도면 거기도 난리도 아니겠는데. 설마 전멸한 건 아니겠지…….’

노인이, 눈앞에 바글바글한 개미 무리에 불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핏빛처럼 붉은 불꽃이 마주치는 개미들을 모조리 태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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