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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4화 (12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4화

시안이 여왕개미와 조우하기 한참 전.

여왕을 보내놓고 세드릭은 잠시 도시가 공격당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흠.”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개미 떼들이 켈드윈을 덮친다. 이미 수없이 많은 개미들의 사체가 쌓여 있었지만, 그보다 몇 배는 많은 개미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그가 거인들을 수색하는 개미의 ‘일부’를 돌려 켈드윈의 습격을 명령한 건 다름이 아니다.

훗날 거인을 찾아 일으켰을 때, 혹시 모를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서.

고작 그 하나 때문에 그는 켈드윈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문제 될 것도 없으니.’

켈드윈의 모든 주민은 각기 나라에서 행방불명되거나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싹 쓸려도 그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보다 잘 버티는 것 같다만.”

잠시 구경하던 그가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켈드윈은 지금 의외로 괜찮게 버티고 있다. 하지만 시간문제였다.

고립된 도시가 끝없이 밀려드는 병력에 버틸 수 있을 리 없으니.

나름 탈출로를 찾으려 하는 것 같긴 하다만 소용없다. 그 정찰들도 여왕개미에 의해 시체가 될 테니까.

“돌아갈까.”

처절하게 싸우는 켈드윈의 주민들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목격자만 없앨 수 있다면 전혀 상관없었다.

그렇게 뒤를 돌아 떠나려고 할 때.

그의 눈에 푸른 불꽃에 불타는 개미들이 들어왔다.

“……!”

세드릭의 발이 우뚝 멎었다. 그가 돌아가는 것을 관두고 오히려 몸을 기울여 켈드윈 쪽을 더욱 주의 깊게 주시했다.

넘실거리는 청염. 그에 불타는 개미들.

“설마…….”

일순간 조금 특이한 화염마법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아니었다.

저 푸른 불꽃에 당한 개미들은 아무런 외상 없이 픽픽 쓰러져 가고 있었다.

이런 특징을 가진 불꽃을 그는 하나밖에 알지 못한다.

그가 미소 지었다.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과거 10년 이상 지난 오랜 옛날. 한때 그가 찾아 헤맸던 고대 정령.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것이 제 발로 찾아왔다.

* * *

“좋아! 잘 버티고 있어!”

시장이 큰 목소리로 개미들과 싸우는 주민들을 격려했다. 그 목소리는 창칼이 부딪치고 개미와 인간의 비명이 넘쳐나는 전장에서도 또렷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사이에서, 알렌이 개미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알티마!”

「응!」

한 손으론 불꽃을 쏘아대고, 반대편 손으론 불을 두른 검을 그으며 그가 주민들과 함께 개미를 막았다.

에르제와 헥토르는 각기 다른 곳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알티마도, 새의 모습이나마 바깥에 나와 알렌을 조력하고 있었다.

“위험합니다!”

“허억!”

그때,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를 찧은 주민이 보였다. 알렌이 빠르게 다가가 주민을 뜯어 먹으려는 개미의 머리를 찍었다.

“고, 고맙네!”

감사 인사를 채 들을 새도 없이 알렌이 다른 개미에게 뛰어 들었다.

이곳의 주민들 대부분이 오러 정도는 발출할 수 있는 실력.

그러나 그중에서도 알렌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그의 불꽃에 죽어 나간 개미들이 벌써 산더미로 쌓여 자연스레 방벽이 되어줄 정도였다.

“할 만하다! 다들 잘 막고 있는 중이야!”

시장의 희망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모든 전황을 살피며 그때그때 지시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상황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 중심에 알렌을 포함한 시안의 일행들이 있었다.

‘시안만 돌아오면.’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알렌이 생각했다.

그는 도시의 한쪽 방비만 맡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개미들은, 숫자는 많긴 했지만 하나하나가 절대적으로 강하진 않다.

이 정도면 무사히 탈출하는 것도 꿈은 아니리라.

그렇게 모두가 조금씩 희망을 갖고 있을 때.

“허어억!”

“위! 위에!”

다급한 주변의 목소리에 알렌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눈을 부릅떴다.

하늘을 가득 덮은 태양과 같은 불덩이. 그것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이 도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그 불덩어리를 보고 떨고 있을 때.

알렌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

불덩어리를 등지고 있는 사내.

10년 이상 지났지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저 얼굴. 한쪽 볼에 나있는 화상 흉터.

그리고 새빨간 눈동자.

「알렌!」

알티마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알렌의 눈동자에 피가 오르며 점차 충혈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아버지를,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무참히 살해한.

그의 원수였다.

“11년? 아니, 12년인가? 그때 도망쳐서는 이곳에 정착한 모양이군.”

그가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알렌을 보았다. 정확히는 알렌의 품에 쏙 들어 있는 작은 새를.

“하도 옛날이라 까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타나 줄 줄이야. 난 정말 행운아야.”

남자의 말을 들으며, 알렌이 으득 이를 갈았다.

잊고 있었단다. 그 날의 일을. 수십 명의 일족을 태워놓고 까먹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데.

“알티마.”

알렌이 알티마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꺼낸 것은 청량한 푸른빛을 흩뿌리는 하나의 구슬.

알티마도 말리지 않았다. 어떤 얘기를 해도 지금의 그에겐 들리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 구슬을 보곤 세드릭이 눈을 반짝였다.

“꼬마야. 그 구슬과 네 정령을 넘기 거라. 대신 살려는 주마.”

대답할 가치도 없다.

청류옥에서 풀려나온 밀도 높은 불길이 알렌의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 * *

검은 벼락이 떨어지고, 그 앞의 공간이 완전히 소멸했다. 시안의 검의 궤적에 따라 자이언트 앤트를 쌓아 올린 벽이 죄다 가루가 되었다.

미리 펼쳐 놓은 오러를 한데 모아, 뇌명으로 펼친 천뢰.

시안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검을 회수했다.

“피했군.”

벽 속에 숨어있던 여왕개미는,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땅을 박찼는지 검의 궤적에서 반쯤 빗겨나 있었다.

그러나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녀석의 상반신 절반이 완전히 날아가 있었다.

―키, 키익…….

여왕이 떨리는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눈에 마물다운 독기가 다시 차올랐다.

뿌득, 뿌드득.

불쾌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남은 상반신에서 살덩이가 돋아났다. 새로 올라온 살이 날아간 부분을 새로 재생시켰다.

“쯧.”

시안이 혀를 찼다. 녀석의 능력을 아니 이 정도 재생력쯤은 예상했다.

다만 그가 혀를 찬 것은 녀석의 모습이 꽤나 기괴했기 때문이다.

본래의 몸은 악마의 사체를 썼기 때문인지 검은 피부다. 그러나 새로 돋아난 살은 새하얬다.

‘자크의 말대로, 사람을 먹었군.’

지금 재생한 절반의 상반신은 인간의 것일 것이다. 심지어 검은 피부와 하얀 피부의 접합면이 억지로 이어붙인 것마냥 징그럽기도 했다.

―캬악!

녀석이 아까처럼 양손을 송곳으로 변화시키곤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캉! 시안이 검으로 녀석의 팔을 쳐냈다. 팔이 모두 막히니 녀석이 발을 올려 찼다. 그 발끝 역시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었다.

빠르고 단단하다. 파워도 있다. 그러나 그래 봤자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녀석이다.

그 어떤 무의 묘리도 없는 즉흥적이고 직선적인 공격.

시안이 녀석의 공격을 모두 가볍게 흘려 내었다.

그리고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니.

―키익……!

여왕개미가 흠칫 몸을 떠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양손과 양발을 모두 짚곤 자세를 낮춘 채 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후 별일이 없는 것 같으니 다시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

시안이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러자 다시금 흠칫하더니 거리를 벌리는 여왕개미.

시안이 그대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이겼군.’

아무래도 방금의 일격으로 공포가 각인된 것 같다. 더 이상의 전투는 필요 없었다.

―키, 키이…….

시안이 다가갈 때마다 녀석이 뒷걸음질을 쳤다. 얼핏 안쓰러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시안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었다.

녀석의 반쪽 상반신은 인간의 것. 놈은 그냥 마물도 아니고 인간의 맛을 본 마물이었다.

그때, 옆에서 개미 한 마리가 몸을 던졌다.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옆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개미가 잘려나간다. 그 짧은 사이. 촌각도 되지 않는 그 틈을 여왕개미는 놓치지 않았다.

―키익!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땅을 박차 도주했다.

뛰자마자 바로 날아오르는 여왕개미. 녀석이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귀찮게 하는군.’

시안이 비검을 던져 녀석을 쫓게 하곤, 검륜 한 자루를 뽑아 들고 여왕의 뒤를 쫓았다.

날아가는 방향을 보니 도시 방향이었다.

‘거기에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아까 전 자크와 함께 목격했던 불타오르던 도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반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온 흑마법사는 불을 사용하는 놈.

어쩌면 도시에 흑마법사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

‘잘됐군.’

굳이 여기서 하늘을 나는 여왕개미를 처치한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날아다니는 저 녀석은 도시로 가서 헥토르에게 맡기고, 자신은 흑마법사를 상대하자.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마 알렌이 흑마법사를 상대하고 있을 터였다.

‘설마 원수가 맞았던 건가.’

이곳에 있다는 그 흑마법사가 알렌의 원수가 맞았을까. 그럴 가능성도 적지만은 않았다.

뭐가 됐든 도착하면 알게 될 일.

이윽고 여왕개미와 그 여왕을 쫓는 시안이 불타는 도시에 들어가게 되었고.

“음?”

“하아…… 하아…….”

그들과 조우했다. 양손에 짙은 불꽃을 띄운 채 공중에 떠 있는 세드릭과 청류옥을 들고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알렌.

여왕개미가 단숨에 세드릭 쪽으로 날아가 놈의 뒤쪽에 숨었다. 그런 여왕의 모습, 그리고 악마의 몸이 절반은 날아가 있는 모습.

그걸 보곤 세드릭이 눈을 꿈틀거렸다.

“쓸모없는 놈.”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정찰자들을 없애라고 보냈는데, 패배한 채 돌아온 것이다.

악마의 몸도 절반이나 날려먹고, 심지어 쫓아온 정찰자는 상처 하나 없어 보인다.

세드릭이 시안을 보았다.

“알렌.”

“시안…….”

한편 시안은 알렌을 살피고 있었다.

데릭 교수의 일 이후로 꺼낸 적이 없던 청류옥을 꺼내 든 모습. 붉게 충혈 된 눈과 필요 이상으로 가빠진 호흡.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원수가 맞았군.’

시안이 알렌에게서 눈을 떼고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 역시 시안을 보고 있었기에, 서로 눈이 마주쳤다.

녀석을 보고는,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렌.”

“왜.”

“저 녀석, 흑마법사가 아니다.”

“무슨 개소리야? 반도 녀석이 흑마법사라고 그랬잖아?”

평소답지 않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알렌. 그래도 할 말은 하는 시안이었다.

“칠흑마탑 소속은 맞아.”

그게 아니면 여왕개미에게 먹인 악마의 사체를 어떻게 조달했겠는가.

단지.

“녀석은 악마의 힘을 쓰고 있는 게 아냐.”

“그게 뭔…….”

시안이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그에게선, 헥토르나 여왕개미에게서 느껴지던 악마의 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악마와의 계약의 흔적도 전혀.

“놈은 평범한 인간이야.”

악마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섭리를 비틀어 이적을 불러일으키는 마도사.

그의 말에 알렌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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