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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2화 (122/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2화

저 멀리 보이는 산을 개미 떼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날개가 달린 개미가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일행은 지금까지 지상에서만 개미를 상대해 왔지만, 사실 개미의 주 활동 영역은 지하다. 지하 땅굴.

그런데 지금, 마치 지하 깊숙이 활동하던 모든 개미가 지상으로 올라온 것만 같았다.

“시안! 일단 튀자!”

알렌의 말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곤 재빨리 뒤쪽으로 뛰었다.

지상과 하늘을 가득 메운 새까만 개미 행렬. 흡사 폭풍우 속의 해일과도 같은,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단신으로 맞서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시안! 알렌!”

“야, 주인! 저거 뭐야!”

“나도 몰라!”

조금 뒤쪽에서 쉬고 있던 에르제와 헥토르와 합류한 후, 네 사람이 반의 거처까지 뛰었다.

반 역시 진작 이상 현상을 눈치채고는 귀중한 연구 재료나 일지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있던 참이었다.

“얀마, 뭘 건드린 거야!”

반이 그렇게 외쳤지만, 시안은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건드리다니, 자신들은 평범하게 사냥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설마 개미 몇 놈을 잡아 죽였다고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 다섯은 우선 켈드윈으로 향했다.

이 근처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곳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확인이 필요했다. 그쪽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으니.

간간이 뒤쪽을 보며 개미들이 어디까지 왔나 확인하며, 그들이 빠르게 도망쳤다.

“정말 아무것도 안 건드린 거 맞아?”

“그래. 일반 개미 수십이랑 강철 개미 몇 놈 잡은 게 전부야. 애초에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

“끄응…….”

반이 눈을 찌푸렸다.

시안 일행이 무언가를 건드린 것이 아니라면, 원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 놈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반이 쫓던, 그리고 알렌이 노리고 있는 그놈이 움직였다는 것. 그것 외엔 없다.

“놈이 뭘 건드렸다는 말인가? 여왕개미나 뭐 그런?”

“그럴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개미들을 통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통제?”

“개미들이 영역을 빠르게 넓히기 시작한 시기랑 놈들이 이곳에서 발견된 시기가 대충 엇비슷하거든.”

반의 말은 다시 말해, 자이언트 앤트가 무자비하게 영역을 넓힌 것이 흑마법사가 꾸민 짓이라는 얘기였다.

확인이 아닌 추측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사실이라면.’

놈들이 개미의 영역을 넓혀놓고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을까.

생각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개미들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대륙으로 침공해 들어간다?

그래 봤자 얻을 건 많지 않다.

거인들의 무덤에서 올라오는 사기를 먹고 강력해진 마물들이다. 이곳을 벗어나면 지금보다 훨씬 약화된다.

아무리 지금처럼 숫자가 많더라도 약해진 개미들로는 성 하나 떨어뜨리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전력으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이유.

‘……지하에 봉인된 거인들을 찾기 위해서라던가.’

제국이 일으킨 전쟁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을 거인들.

그 거인을 더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시안 일행이 화염거인을 처치하고 온 것처럼, 거인은 무적이 아니다.

빙하백령과 자카르타의 저력을 생각하면 거인들도 적지 않게 죽어 나가고 있을 터.

제국과, 그리고 칠흑마탑의 입장에선 거인이 더 필요할 것이다.

‘놈이 거인왕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커졌어.’

이쯤 되면 반드시 놈을 잡아 족쳐야 한다.

개미들을 탐색에 활용하고 있다면 적지 않은 정보를 수집했을 터. 그중엔 거인왕에게 다다르기 위한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젠장, 온다!”

그때 헥토르가 크게 소리쳤다.

어느새 개미들이 바로 등 뒤에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막아!”

“큭!”

알렌과 헥토르가 달리는 걸 멈추지 않고 뒤쪽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푸른 불꽃과 자줏빛 전격이 날뛰며 수십의 개미들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나 개미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의 사체를 짓밟으며 계속해서 쇄도했다.

‘라비! 창해!’

시안은 공중에서 날아오는 개미들을 맡았다.

흑검이 그의 손에서 투명한 물색의 검으로 변했다.

이윽고 검편들이 촤르륵 분리되며 날아다니는 개미들을 격추했다.

―키에에엑!

―케엑!

개미들이 수없이 떨어지고 있지만, 결국 바다에서 물 한 동이 뜨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파도처럼 덮쳐드는 개미들의 숫자는 일절 줄지 않았다.

“젠장! 이대로 도시로 들어가면 얘네만 끌고 들어가는 셈 아냐!?”

반이 정체 모를 약이 든 병을 개미들 사이로 계속 던지며 거칠게 소리쳤다.

그 말엔 시안도 동감이었다. 개미를 완전히 따돌리지 않고 켈드윈으로 돌아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그러나 곧, 쓸데없는 걱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시안!”

개미들에게 따라잡힌 시점에서 앞서 정찰을 보냈던 에르제가 돌아왔다.

그녀의 능력은 수십 정도면 모를까 이 정도로 많은 숫자의 마물을 상대할 땐 의미가 없다.

그래서 먼저 길을 살펴보고 오도록 얘기했다.

다급한 표정의 에르제.

그녀의 뒤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간 일행에게, 저 아래쪽에 위치한 켈드윈의 모습이 보였다.

“저쪽도 말이 아니군.”

켈드윈은 이미, 분지를 둘러싼 개미들에게 습격을 받고 있었다.

* * *

“막아! 무조건 막으라고!”

켈드윈에선 주민들이 끝없이 내려오는 개미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한 수가 있는 이들이다. 제국의 기사나 마탑의 마법사, 수인과 반요정 등등 출신지도 다양한 이들.

그들의 화살과 마법이 하늘을 수놓으며 개미들을 막고 있었다.

당장의 수비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제길!’

끝이 보이지 않는 개미들의 바다.

전황을 살피는 시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등성이가, 본래의 푸른빛을 잃고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대론 안 돼.’

이대론 안 된다. 당장은 괜찮아도 머지않아 한계가 올 것이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것은 단단한 석재를 쌓아 올린 성벽 따위가 아니었고, 도시의 주민들도 한데 뭉쳐 훈련을 받은 군대가 아니다. 식량과 물자도 한정되어 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다간 언젠가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목책이 뚫리든, 내부 분열이 일어나든, 식량이 떨어지든 어느 쪽이든.

‘그 전에 탈출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어디 한 곳을 뚫고 도주를 해야 한다. 이곳의 기반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살아는 있어야 다시 마을을 세우든가 뭘 하든가 할 것 아닌가?

“시장님!”

“자크! 어떤가!”

“제기랄, 꽉꽉 막혀 있어요! 강제로 돌파하려 했다간 사흘도 못 가서 개미 밥이 될 겁니다!”

때마침 주변을 정찰하고 온 자크의 보고 또한 희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개미들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정도로 많은 마물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시장이 입술을 씹었다.

“어떻게든 뚫어야 하는데…….”

결단을 내린다고 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주민들의 체력과 식량, 그리고 물자가 남아 있을 때.

그러나 고개를 젓는 자크가 보였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때.

시장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를 갈고 있을 때.

―콰과과과과광!

“시, 시장님!”

크게 울려 퍼지는 굉음에 시장과 자크가 흠칫 놀랐다.

소리는 도시의 옆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망루에서 이쪽을 부르는 소리에 시장이 다급히 그곳으로 가보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터진 것이 아닌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보인 것은.

“저들은……?”

얼마 전, 반을 찾겠다고 개미들의 영역으로 들어간 이들.

그들이 마주하는 개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시안 일행과 반이 개미들의 체액을 잔뜩 뒤집어쓴 채로 목책 안으로 들어왔다.

무척 더러운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들은 없었다.

방금 보여준 그들의 무위는 도시 전체에 희망을 불러오고 있었으니까.

“자네!”

“시장님.”

시장이 대번에 시안에게 다가왔다.

차분히 악수를 나눌 시간도 없다.

시안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곤 물었다.

“탈출에 필요한 준비는 다 마치셨습니까?”

“짐은 다 싸놨네. 주민들에게도 모두 알려놓았고.”

그런데 탈출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했다.

‘도주로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모양이군.’

시안이 물었다.

“정찰은 해보셨나요?”

“어디든 다 막혀 있다네. 도저히 길이 보이질 않아.”

“목적지는 생각해 두셨을 것 같은데요.”

“에버웨일로 가려고 하네.”

시안의 몸이 잠시 멈추었다. 아주 잠시.

시장은 그런 시안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다른 곳도 생각해 봤는데 에버웨일이 가장 가까워. 또 그곳에는 하이마스터가 있지 않은가. 설령 개미들을 달고 간다고 해도 피해를 입을 일은 없겠지.”

“그렇군요.”

이들은 에버웨일이 대장군에게 장악된 사실을 모른다.

시안 일행이 그곳에서 도망쳐 왔다는 사실도.

다만.

‘애초에 모두 우리 쪽 사정일 뿐이니.’

어느 것이나 이들과는 일절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에버웨일을 목적지로 삼는 시장의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쪽으로 길을 뚫어봐야겠네요.”

“당장 아는 길은 몇 개 되는데, 자크의 말로는 모두 힘들 것 같다고 하네.”

“일단 적당한 길을 찾아야겠군요.”

방향만 잡은 채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직은 여력은 있어 보이는군.’

도시의 상태를 보면 당장 무너질 만한 상황은 아니다.

당연히 태평하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정찰을 하고 올 때까진 버틸 수 있으리라.

시안이 시장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하루빨리 길을 잡아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서로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길을 잡을 것이냐 하는 점.

“제가 둘러보고 오죠. 길을 잘 아는 사람 하나만 붙여주세요.”

“자네가?”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

잠시 후, 시안은 시장이 붙여준 자크와 함께 둘이서 길을 둘러보러 출발했다.

* * *

“쓸데없이 저항하는군.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먼 곳에서 사내 하나가 공격받는 켈드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여왕개미를 이용해 개미들을 조종한 흑마법사, 세드릭이었다.

“응?”

그때, 그의 눈에 도시에서 나오는 두 인영이 보였다.

몰래 탈출하는 것 같지는 않고, 정찰을 위해 나온 것 같았다.

‘아까도 정찰하고 들어갔었던가.’

그들이 달려드는 개미를 처리하며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세드릭이 턱을 쓰다듬었다.

도시 주변 전체를 정찰했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의 두 인영은 명확한 목적을 가진 것 같았다.

그는 그 방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곳과 가장 가까운 인간들의 거처, 에버웨일을 목표로 삼은 것이리라.

“괜히 변수를 만드는 것도 싫으니.”

그가 한쪽에 턱짓을 했다. 이윽고 키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곳에 있던 개미 한 마리가 떠나갔다.

악마의 사체를 삼킨 여왕개미.

그녀가 두 인영이 들어간 숲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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