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1화
알티마는 그간 강하게 말해오진 않았지만, 알렌의 복수를 위한 행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알렌의 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복수 같은 건 잊고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라던.
알티마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알렌이 복수 같은 위험한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후우…… 됐어, 알티마. 내가 얘기할게.”
「어, 응. 괜히 나와서 미안.」
“아니야.”
알티마가 이 타이밍에 왜 나타났는지 알렌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시안에게 과거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오래 얘기할 것은 없었다. 이미 데릭 교수의 사건에서 시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알렌이 나머지 사정을 모두 설명하기 까지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랬군. 그래서 그 불을 쓰는 흑마법사가 원수라는 얘긴가?”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알렌은 어렸을 때의 일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일은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한 사내의 손짓에 불타는 화마가 마을을 덮치고, 모두를 휩쓸었던 그 날의 일을.
“불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그놈이라고 확정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높겠군.”
“응.”
알렌이 강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이곳에 있다는 흑마법사가 자신의 원수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 그리고 원수가 맞다면.
스스로의 손으로 처단하는 것.
「깜장아. 알렌을 도와주면 안 될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알티마가 드물게도 약한 소리를 내뱉으며 시안에게 사정을 해왔다.
불을 쓰는 흑마법사. 원수일지도 모를 그 녀석의 단서가 발견된 이상 알렌을 막을 수는 없어졌다.
그렇다면 알렌의 안전을 위해서는, 강한 동료가 필요했다.
알티마가 부탁할 수 있는 이들 중에 가장 강한 이는, 시안밖에 없었다.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시안을 보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좋아.”
흔쾌히 대답하는 시안의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렌의 복수는 어디까지나 알렌 개인의 사정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부탁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녀였는데.
시안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게 대답해 버렸다.
“어차피 흑마법사는 확인하고 갈 생각이었어. 녀석이 원수가 맞다면 도와주지.”
시안이 흔쾌히 수락을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어차피 하려고 했던 일이니까.
‘지금 이 시점에 놈들이 이곳에 왔다면 거인을 찾으러 왔을 가능성이 높아.’
거인왕의 단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제국과 칠흑마탑의 연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이곳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결국은 대륙으로 나가야 해.’
거인왕을 찾는 것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도중에 포기하거나. 어느 쪽이든 결말이 나면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때의 대륙은 그에게 있어 결코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그를 위해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수집해야 했다.
‘녀석의 힘도 뽑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거기에 그 흑마법사의 기운을 흡수할 수도 있다. 강림을 시켜 헥토르처럼 노예로 만드는 수도 있지만, 그건 알렌과 완전히 척을 지는 일이니.
여러모로 놈을 잡지 않고 갈 이유가 없었다.
「고마워!」
“딱히. 내 목적이랑 겹치기도 하니까.”
“그래도 고마워 시안. 네 덕분에 조금은 불안이 가셨어.”
알렌이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덤덤하게 얘기하는 시안을 보니 과거 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넘어진 아이를 일으키곤 꽃을 받아주었던 그때의 일이.
그의 눈에 시안은,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후우! 뭐야? 무슨 얘기해?”
“교대다 교대. 저 앞의 나무 있는 데까지 전부 쓸고 왔어.”
그때 개미들을 사냥하던 에르제와 헥토르가 돌아왔다. 알렌의 어깨에 있던 알티마가 잽싸게 불꽃으로 변해 사라졌다.
시안이 둘을 보며 물었다.
“반이 얘기한 특이한 개체는 있었어?”
“응. 덩치도 더 크고 가시 같은 게 막 나 있기도 하고 그러더라.”
“그것뿐?”
“또 몸이 엄청 단단해서…….”
시안과 알렌이 출발하기 전에, 에르제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얘기를 모두 들을 때쯤 되자, 개미들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안과 알렌이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개미들의 영역은 거인들의 무덤을 커다랗게 잠식하고 있었다. 그중의 한 곳.
거인들의 무덤에서 가장 커다랗게 자라 있는 수백 년 고목이 박혀 있는 지하.
그 아래에 여왕개미의 거처가 있었다.
“대충 퍼졌나?”
“예.”
그 거처에, 두 남자가 있었다. 정작 거처의 주인인 여왕개미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으며 두 사람이 제 안방처럼 자리 잡고 서 있었다.
그중 지위가 낮은지 한껏 몸을 숙이고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수색을 개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
보고를 받은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자 손이 거뭇게 변해가며 이윽고 전신의 피부가 점점 짙어졌다. 눈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내가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감에도 부복하고 있는 사내는 익숙한 듯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거인을 찾는다. 제국에도 몇 마리 남아 있을 정도야. 분명 이곳에는 훨씬 더 많이 있겠지.]
울리는 듯한 목소리. 사내는 이미 진작 악마에게 몸을 내어준 상태였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부복한 사내가 옆을 힐끔 보았다. 구석에 박혀 있는 여왕개미. 그들이 제압하여 완전히 복종시킨 개체.
거인들의 무덤에 있는 수많은 마물들 중 그들은 개미를 선택했다. 그리고 개미들의 영역을 강제로 넓혔다.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숫자가 많은 개미들이다. 조금 신경 써주는 것만으로 다른 마물을 쫓아내기엔 충분한 마물이었다.
그렇게 거인들의 무덤의 절반 이상을 잠식하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지하 수색에 들어갈 시기였다.
[크크크. 제국놈들 지금쯤 세상이 제 것이 된 양 으스대고 있겠지? 멍청한 녀석들.]
“마룡왕은 어쩌실 겁니까?”
[…….]
한창 실실거리던 악마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닫았다.
그러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사내에게 소리쳤다.
[당연히 그놈도 몰아내야지! 그놈 사도가 파멜라라는 년이었던가?]
“예.”
[좋아. 일단 거인들을 있는 대로 회수한 후에 그년부터 찾겠다.]
“…….”
악마가 짜증스럽게 몸을 돌렸다. 부복한 사내가 가만히 악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악마의 일그러진 표정 속에 일순간 스친 감정을 정확히 읽었다.
“겁먹었군.”
그건 공포였다.
[뭐!?]
사내의 말에 악마가 거칠게 뒤로 돌았다. 그러자 무언가가 그의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컥!]
그건 사내의 손바닥이었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사내가 악마의 얼굴을 잡더니 그대로 천천히 들어올렸다.
악마가 사내의 팔을 붙잡고 떨쳐내려 버둥거렸으나, 어찌나 힘이 센지 사내의 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너, 너 이 새끼 뭐야!]
악마가 기겁했다. 그가 알고 있는 사내는, 칠흑마탑의 그저 말단에 불과했다. 악마의 힘이란 달콤한 미끼에 홀려 든 발에 채이도록 있는 쓰레기.
그런데 이 힘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떻게 된 게 마룡왕 얘기만 꺼내면 다 똑같은 반응인지 모르겠어.”
[켁, 케헥!]
사내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악마의 관자놀이를 그대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악마가 한껏 발버둥을 쳤으나 사내는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겁에 질린 개는 필요 없다. 화살받이로도 못 쓸 쓰레기들.”
콰직!
악마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버렸다. 머리가 사라진 악마의 몸뚱이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사내가 허리를 굽혀 악마의 시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여왕개미 쪽으로 툭 던졌다.
제 거처를 빼앗기고 병력을 빼앗기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개미가, 사내의 눈치를 살피더니 악마의 시체를 덥석 물었다.
―와그작, 우드드득.
이윽고 게걸스레 악마의 시체를 뜯어먹는 개미를 일별하곤 사내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 불길이 한번 치솟더니 묻어 있는 더러운 피를 모조리 증발시켜 버렸다.
“그럼 나 혼자 시작해 볼까.”
사내가 중얼거리고는 개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거인들의 무덤 전역에 널리 퍼져 나가도록.
* * *
에르제와 헥토르가 쉬고 있는 사이 시안과 알렌이 개미들의 처치를 맡았다.
물론 반이 얘기한 특이한 개미들의 체액을 채집해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놈들인가 보네.”
특이하다는 게 어떤 놈들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 고만고만한 개미들이 가득한 사이에 중간중간 훨씬 덩치가 큰 녀석들이 섞여 있었다.
에르제의 말대로 가시가 달린 놈도 있었고 아닌 놈도 있었다.
“그럼 아까 얘기한 대로.”
“응.”
시안과 알렌이 개미들 사이로 달려들었다.
이내 놈들이 동료가 아닌 다른 존재를 감지했는지 미친 듯이 발광을 하며 쇄도했다.
그런 놈들을 맞은 것은 알렌의 불꽃이었다.
‘일반 개미들은 맡기고.’
미리 역할을 나눠놓았다. 알렌은 일반 개미들을 맡고 시안은 특이한 개체들을 맡기로.
알렌의 불꽃은 개미들의 마기를 모조리 태운다. 그 과정에서 반이 채집을 부탁했던 특이한 개체의 체액이 변질될 우려가 있었다.
그 때문에 알렌은 일반 개미를 쓸어버리고, 그 사이로 시안이 들어가 특이한 개체들을 손수 처치하기로 결정한 것.
개미들이 픽픽 쓰러지고, 알렌이 펼친 푸른 불꽃 사이를 시안이 달렸다.
지옥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것은 시안에게는 일절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윽고 시안이 다른 놈들보다 한층 더 큰 개체에게 접근했다.
―키기기기기!
시안이 일반 개미를 상대할 때보다 더 많은 오러를 쏟았다. 그리고 놈의 목을 그으니.
캉―
시안이 살짝 놀랐다.
갑피가 예상보다도 훨씬 단단했다.
‘무슨 강철 같군.’
개미가 시안을 떨쳐내려 머리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시안이 찌푸리며 거리를 벌리자, 그런 시간의 머리 위로 개미의 다리가 떨어져 내렸다.
쿵, 떨어지는 다리를 살짝 피하곤, 시안이 녀석의 관절을 밟고 점프했다.
카가가강!
그가 개미의 머리에 칼을 박아 넣었다. 아까보다 오러를 더 강하게 넣은 검이었다.
개미의 갑피를 뚫는 거라곤 믿기지 않는 소리가 들리며 검이 놈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체액이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시안이 품에서 병을 꺼내 흘러나오는 체액을 담았다.
그러며 주위를 살폈다.
‘일반 개미들은 알렌이 잘 막고 있고, 이런 강철 개미는 10마리 정도 남았나?’
더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장은 저 녀석들이 전부란 소리다.
에르제가 채집한 것도 있으니 저 정도 잡으면 아마 연구 샘플로는 충분할 테지.
그때.
―쿠구구구궁!
땅이 엄청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강철 개미의 위에서 시안이 검을 잡고 균형을 잡았다.
“시안!”
알렌이 급하게 이쪽으로 합류했다.
그와 함께 시안이 찌푸린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그러곤 눈을 크게 떴다.
―두두두두두두!
지축이 울리며, 지금까지의 수십 배는 되는 규모의 개미 떼가 산을 덮으며 이쪽으로 향하고 쇄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