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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0화 (120/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0화

남자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꽤 높은 나무였음에도 착지는 가벼웠다. 시안이 남자의 머리 위를 보았다.

‘호랑이 귀.’

수인들 중에서도 호월족이란 얘기였다.

호월족이라 하면 란이 있는 아슬라 가문이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아슬라 가는 호월족의 대표 가문이지 호월족 전체가 속한 가문은 아니니.

“개미들 사냥하러 온 거면 이 근방에서 적당히 잡다 꺼져라. 괜히 더 들어갈 생각 말고.”

남자가 피로한 듯 목을 풀며 얘기했다. 그러고 보면 얼굴도 푸석하고 눈에도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관찰은 그쯤에서 끝내고 시안이 얘기했다.

“더 안으로 들어갈 생각인데.”

“안으로? 왜?”

“찾는 게 있어서.”

잠시 두 사람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호월족의 남자가 시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경계심을 보이며 내쫓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의외로 그의 반응은 달랐다.

“그럴 거면 저쪽에 냇가 있으니까 씻고 와라. 대충 몸만 담갔다 빼지 말고 이걸로 빡빡 문질러 씻어.”

남자가 휙 하고 주먹만 한 병 하나를 던졌다.

시안이 공중에서 그것을 받았다.

“막으려던 거 아니었나?”

“엉? 막긴 뭘 막아. 여기가 내 땅도 아닌데. 내가 직접 제조한 개미 페로몬 빼는 약품이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시안이 병을 열어 잠시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리고 손등에 한 방울 흘려 문질러 보기도.

딱히 독이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갈 거면 빨리 갔다 와. 개미들 몰려오기 전에.”

“……그러지.”

시안이 일행을 데리고 남자가 가리킨 방향에 있는 냇가로 향했다.

안 그래도 개미들 체액과 껍질 부스러기 등을 잔뜩 뒤집어쓴 참이다. 몸을 씻는 것은 환영이었다.

잠시 후.

그들이 깨끗이 씻고 돌아왔다. 남자는 의리도 좋게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쌰.”

모두 돌아오는 것을 보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톡톡 허리를 두드렸다.

그러곤 따라오라 손짓을 하였다.

이렇게 바로 안내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리 말하는데 괜한 짓 했다간 니들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처신 잘해.”

남자가 손톱을 그어 손가락 끝에 살짝 상처를 내었다. 그러곤 흐르는 피 한 방울을 땅에 떨어뜨렸다.

치익― 소리가 나며 흙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독?”

“약 만드는 게 전문이거든.”

수인족 약제사라는 것도 놀랍지만 몸속을 흐르는 피에 독이 담겨 있다는 것은 더 놀랍다.

세상의 어떤 약제사가 독이 흐르는 피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래서 너넨 누구냐. 이 정도는 물어도 괜찮다고 보는데.”

“시안이다. 제국에서 왔지.”

알렌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차례차례 이름을 대었다.

물론 남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밝힐 수 있는 것은 이름과 제국에서 왔다는 것 하나밖에 없었으니.

“제국에서 뭔 일이 터졌다고 하더만 그거 때문에 도망쳐 온 건가?”

“그런 셈이지. 그래서 당신은?”

“난 반 아슬라다.”

남자의 뒤를 따라 걸으며 시안이 조금 놀랐다. 알렌과 에르제도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아슬라라면 겐 아슬라의?”

“뭐야, 형님을 알고 있나?”

겐 아슬라의 동생. 즉 란과 샨의 숙부라는 말이다.

자신에게 묻는 반에게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지인은 아니고 이름만 아는 정도지. 겐 아슬라는 유명하니까.”

“하긴. 형님이 좀 유명하긴 하지.”

반이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는 어조는 아니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자조적인 것도 아닌, 굳이 얘기하자면 그냥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가주의 동생이라면 이미 출가한 상태겠군.’

그렇다면 크게 관심이 없을 만도 했다. 애초에 수인족은 정착해 살기보단 방랑하며 사는 이들이 많은 종족이기도 했고.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이들이었다.

“지금 가는 곳은, 당신이 사는 거천가?”

“엉. 일단 가서 얘기하지.”

시안이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반의 뒤를 따랐다.

반이 처음 얘기한 대로 이 길 쪽엔 개미들이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막힘없이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여긴.’

그러던 중 시안은 천막 하나가 자리했었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확인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반은 더 깊숙이 들어갔다.

‘계속 거처를 더 안으로 옮기고 있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한 곳에 딱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꾸준히 개미들의 영역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들어가자 드디어 반의 거처가 나타났다.

어디 유목 민족이 쓰는 것과 비슷한, 금방 철거가 가능한 종류의 천막이었다.

“와서 앉아라. 대접할 차 같은 건 없으니까 알아서 마시고. 아니지, 오히려 너희들이 나한테 좀 나눠줘라.”

“우리도 차는 없어.”

고상하게 차나 마시며 마물의 땅에 들어올 정신머리는 없다.

“쳇.”

그러자 반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시안이 앉았고, 일행 세 명도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근처에 앉았다.

따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일행의 리더가 시안이란 걸 눈치로 알았는지, 반이 시안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얘기했다.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지. 뭘 찾으러 왔다고?”

“흠…… 꼭 말해야 하나?”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 혹시 같은 목적이면 돕고 살자고 하려고.”

“같은 목적?”

“나도 뭐 좀 찾으러 들어온 거거든.”

시안이 잠시 고민했다.

일단 거인왕을 찾으러 왔다는 건 얘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거인을 찾으러 왔다는 정도는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거인의 존재는 이제 와선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제국 탓에 온 대륙의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으니.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해볼까?”

시안이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을 찾으러 왔다. 오히려 이 정도 대답이 아니라면 굳이 개미들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납득시키긴 힘들겠지.

반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셋을 센 직후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꺼냈다.

“거인을 찾으러 왔다.”

“찾고 있는 흑마법사가 있어서.”

시안과 반이 서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겹치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겹치지 않는 목적들이었다.

“거인? 이 근처에 거인이 있어?”

“그건 몰라. 일단 개미들 영역을 가로질러서 동쪽으로 가볼 생각이야. 그곳에서 우수수 죽었다고 하니까 남아 있는 놈들도 있겠지.”

“그것도 그렇군.”

“그보다 넌? 이 근처에 흑마법사가 있다고?”

“어.”

반은 시안이 흑마법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거인을 찾는다는 것에서 이미, 흑마법사와 칠흑마탑의 존재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개인적으로 쫓고 있는 녀석이 있어서 말야. 아, 혹시 너네 흑마법사라거나 그쪽 편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제국 황실이 칠흑마탑과 손을 잡았다던데…… 라고 중얼거리며 그가 시안 일행을 의심스레 둘러보았다.

‘흑마법사 정도가 아니라 악마 본인이 이 자리에 있는데.’

헥토르의 존재를 떠올리며, 시안이 태연스레 고개를 저었다.

“우린 아냐. 제국에 반발해서 도망쳐온 거거든.”

“그래?”

“우린 원래 에버웨일의 학생이었어.”

“에버웨일이라고?”

놀라는 반에게 시안이 아카데미에서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대장군이 거인을 끌고 나타나 에버웨일을 장악했고, 그것에 반발해 거인을 베고 탈출했다고.

넌지시 반요정, 그리고 수인족의 학생들이 탈출했던 것도 덧붙였다.

“그럼 혹시 란 아슬라를 알고 있나?”

“나랑 에르제가 같은 반이었어.”

“오오, 이거 세상 참 좁구만.”

란과 동급생이었다는 얘기가 나오자 대번에 분위기가 풀려왔다.

란뿐만 아니라 샨까지 알고 있고, 그리고 샨이 잘 따라준다는 얘기까지 하니 반이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조카들의 얘기가 꽤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물론 마지막엔 잘 도망쳤을까 걱정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래, 좋아! 너희들만 좋다면 당분간 함께 행동하지 않을래? 어쩌면 내가 찾는 흑마법사가 거인이 있어서 이곳에 온 걸지도 모르잖아.”

“그건…….”

부정은 힘들다. 거인왕의 존재를 아는 거인이 아틀란타 하나뿐일 거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만약 칠흑마탑이 부리는 거인들 중에도 거인왕이 살아있음을 아는 이가 있다면, 그쪽도 거인왕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리라.

“찾고 있는 놈이 누군데? 정보는 있나?”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반이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땅에 드륵드륵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약제사라 손재주가 좋아서 그런지, 그림도 제법 그릴 줄 알았다.

“……대충 이렇게 생긴 놈이고, 불을 주로 쓰는 놈이야. 아마 놈이 계약한 악마가 불의 힘을 가진 악마인 모양이야.”

“그렇군.”

그림을 보며 시안이 턱을 잡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놈을 잡으면 거인왕의 단서를 들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안 그래도 동쪽 끝에 다다른다 할지라도 그 넓은 땅에서 거인왕을 찾기는 요원한 일이었는데.

그때, 문득 옆을 보니.

“……불을 쓴다고.”

알렌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곤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설마…….’

시안이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알렌은 땅의 그림에만 시선이 못 박혀 있었다.

* * *

“이걸 가지고 들어가라. 6시간마다 한 번씩 몸에 뿌려.”

반은 일행들에게 향수병과 같은 것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개미들의 체액으로 만든 약이야. 놈들의 페로몬이 들어 있어서 너흴 동료라고 생각할 거야.”

반이 개미들 사이에서 유유히 거처를 만들 수 있던 이유였다.

그가 직접 만든 것으로 상당한 효과를 가졌다고 한다.

다만.

“이게 만능은 아니거든. 일반 개미들한테는 다 통하는데 안 통하는 놈들이 있어. 좀 특별한 개체들인데…….”

그가 이곳에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곳까지는 일반 개미들밖에 없었기에 이 약으로 무사히 올 수 있었지만, 이 너머부터는 특별한 개체도 간간이 출몰한다고.

그리고 놈들에게 걸리면 약이고 뭐고 인근의 모든 개미가 달려든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이 그 특별한 놈들의 체액을 가져와 줬으면 좋겠어. 그걸로 약을 좀 개량해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거든.”

이어진 반의 말은 이것이었다. 약의 개량을 위해 그 특별한 개미의 체액을 가져다 달라고.

자신은 독이 아니면 놈들을 사냥하지 못해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독으로 잡으면 체액까지 독으로 변질되어 버리기에 어쩔 수 없는 일.

제대로 개량에 성공하면 나눠주겠다는 약속에, 일행이 개미들의 영역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이 둘씩 나뉘어 2교대로 사냥하며 나아가기로 했다.

처음은 에르제와 헥토르의 차례.

두 사람이 앞서 사냥을 위해 떨어지고 시안과 알렌은 조금 뒤에서 휴식을 취했다.

“알렌.”

물어보려면 이때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혼자 고민에 빠져 있던 알렌.

그가 말하기 어렵다는 듯이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의 가슴팍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더니, 작은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깜장아, 도와줘…….」

알티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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