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9화
시장의 호의로 시안 일행은 거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도시 구석진 곳에 있는 먼지가 쌓인 낡은 움막.
결코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노숙을 해온 일행에겐 충분히 만족스러운 장소였다.
그렇게 하루를 쉰 일행이, 다시금 정비를 마치고 다음 날 새벽 일찍 도시를 떠났다.
“이쪽이다.”
지도를 보며 그들이 개미들의 영역으로 향했다.
도시를 둘러싼 산등성이를 넘어 얼마간 나아가자 숲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전까진 조금 울창할 뿐인 평범한 숲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무의 색도 짙어지고 공기도 훨씬 더 무거워져 왔다.
비릿한 냄새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들어왔나 봐.”
에르제가 단검을 꺼내 들며 주변을 경계했다.
이 묵직하고 따끔거리는 분위기. 마물의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딱 그대로의 공기였다.
“다들 조심하고, 목적지까지는 조금 걸어야 할 거야.”
“얼마나 걸리는데?”
알렌의 물음에 시안이 대답했다.
“아무런 방해도 없으면 하루 정도 되는 거리인데, 하루 만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시안이 그리 말하며 흑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한 곳을 바라보자.
―키릭.
저 숲 너머에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일행이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하며 서로 등을 맞댔다.
뒤쪽에도 역시 개미들의 붉은 눈이 보이고 있었다.
“영역 안에 놈들은 조금 세다고 그랬지?”
“그랬지. 다들 조심하고…….”
―키릭!
시안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개미들이 일제히 덮쳐왔다.
쿠구궁! 우지끈!
큼직한 덩치가 흙을 파헤치고 나무를 부러뜨리며 달려든다.
시안이 검을 휘둘러 가장 앞 놈의 머리를 세로로 쪼개버렸다.
그럼에도 다른 개미들은 일절 위축되지 않고 시안을 덮쳐들었다.
“말할 틈도 안 주는군.”
그가 가볍게 검에 오러를 둘렀다.
지금 한 놈 썰어본 결과 딱 적당히, 마나 소모를 최소화하며 잡을 수 있을 만큼만.
개미가 옆으로 벌어진 턱을 카락거리며 시안을 물어뜯기 위해 쇄도했다.
보통의 작은 개미였으면 피부가 조금 찝힌 정도로 끝났겠지만, 이 자이언트 앤트들은 아니다.
놈들의 턱은 시안의 머리를 통째로 뜯어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강인했다.
―카락!
달려드는 자이언트 앤트. 시안이 검을 휘둘러 녀석의 턱에 검을 걸었다.
캉, 소리가 나며 녀석이 검조차 물어뜯을 것처럼 턱을 오물거렸다.
강철조차 씹어 먹는다고 하는 자이언트 앤트의 턱이다. 평범한 기사의 평범한 검이었다면 정말로 검이 뜯겨 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검도 그걸 휘두르는 사람도 평범한 이들은 아니었다.
서걱!
시안이 몸을 비틀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희미한 밤의 오러에 휩싸인 검이 개미의 머리와 몸통을 말 그대로 양단했다.
놈의 체액이 분수처럼 튀어 오르며 주변의 개미의 몸에 튀었다.
―카락! 카라락!
―키릭!
동료들의 체액으로 흥건해질수록 놈들의 눈은 더욱 붉게 변해갔다. 분노라도 하는 것인지 점점 흉포해지며 거칠어지는 개미들.
그러나 그래봤자 딱히 더 힘이 세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녀석들의 공격 패턴이 변화하는 것에만 주의하며 시안이 차분히 개미를 썰어 나갔다.
“확실히, 바깥 놈들보다 더 강하긴 한가 봐!”
콰앙!
알렌이 개미들 사이로 푸른 불꽃을 터뜨리며 시안에게 소리쳤다.
“체감이 될 정도는 되는군.”
시안도 그 말에 동감했다.
들었던 대로 영역 안의 개미는 바깥 놈들보다는 훨씬 강했다.
갑피가 더 단단했고 힘도 강했다. 성격도 훨씬 거친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강해질 텐데.’
아마 영역 중심부로 향할수록 더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것까지 생각해서 계획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크게 문제는 없어.”
머지않아 전투는 끝이 났다.
개미들의 사체로 산을 쌓아 올린 그곳에서, 시안과 일행들이 호흡을 골랐다.
칼에 베인 놈들, 알티마의 불에 픽픽 쓰러져간 놈들, 전기에 지져진 놈들, 머리와 몸통을 잇는 가느다란 목이 핀포인트로 모조리 동강 난 놈들 등등.
사인도 참 다양했다.
“큰 문제는 없긴 한데.”
시안이 그리 얘기하며 혀를 찼다.
한바탕 개미들을 모두 처리한 직후인데도, 저 앞에서 다시금 붉은 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중 일부는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물고는 먹이로 쓰겠다는 듯 옮기고 있는 녀석들도 몇 놈 보였다.
“이 숫자는 좀 문제네.”
시안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런 그의 몸을 밤의 오러가 감싸며 서서히 체력을 회복시켜 주고 있었다.
* * *
결과적으로 하루 만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안과 일행들은 과장 좀 보태서 세 걸음 걸을 때마다 100 이상의 개미들을 죽이며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가다 보니 문제가 더욱 커졌다.
시안은 라비의 체력 회복 능력이 있으니 다소는 괜찮았고, 헥토르도 본래가 오우거인 놈이다. 체력 하나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알렌과 에르제는 체력이 빠르게 고갈되었다.
결국 그날 하루 동안 이동한 거리는 목적지까지의 1/4 정도에 불과했다.
“하아…… 하아…….”
“후우…….”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그들이 휴식을 취했다.
알렌과 에르제는 땀에 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방식을 조금 바꿔야겠어.”
“어…… 어떻게……?”
에르제가 힘겹게 물었다.
“둘씩 나눠서 한쪽은 길을 뚫고 한쪽은 적당히 엄호만 하는 식으로 체력을 보존하자. 지금처럼 네 명이 전부 싸우면서 나아가는 건 효율적이지 못한 것 같다.”
“좋은…… 좋은 생각 같아.”
“나도 찬성…….”
에르제와 알렌이 팔랑 손을 들어 올리며 찬성했다.
그들 역시 스스로의 체력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늘과 같은 강행군을 이어갔다간 내일은 오늘보다 더 처참하리라.
“야, 주인. 여기도 왔다.”
바깥쪽을 감시하고 있던 헥토르가 그리 얘기했다. 개미가 또 쳐들어왔다는 소리.
그 말에 에르제와 알렌이 움찔거렸다.
오늘 하루 만에 평생 볼 개미를 모두 본 것 같은 기분인데.
“너희는 일단 쉬고 있어. 나랑 헥토르가 다녀오지.”
“응…….”
“미안…….”
시무룩해지는 두 사람을 두곤 시안과 헥토르가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개미들이 또 한가득 모여 있었다.
“최대한 흔적은 지우면서 왔는데.”
“그런 게 사람한테나 통하지 벌레한테 통하겠냐.”
“그것도 그렇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놈들의 추적 능력이 이 정도라면 몸을 숨겨 잠을 자는 것은 무리다. 지금처럼 간간히 휴식을 취하며 번갈아 선잠을 자는 정도로 그쳐야 하리라.
‘그 상태로 4~5일인가.’
그 정도라면 얼추 가능하리라.
지금은 저러고 있지만 알렌과 에르제도 아카데미의 쉼 없는 실전 수업들을 돌파한 이들이다.
4~5일 정도 잠 좀 못 잔다고 큰일이 나진 않는다.
“저쪽을 맡아. 난 반대쪽을 할 테니.”
“엉.”
시안과 헥토르가 은신처를 중심으로 서로 반대편으로 흩어졌다.
쿠구구구궁!
뒤쪽에서 들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시안이 검을 꺼내 들었다.
창해를 들까 하였으나 모처럼이니 그도 뇌명을 꺼냈다. 벼락을 뿜어내는 세이버.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콰과과과과광!
가로로 검을 휘두르니 그 경로를 따라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하얀 전격에 개미들이 휩쓸려 모조리 타들어 갔다.
벌레가 타는 매캐하고 불쾌한 냄새가 곳곳에 퍼지며 시안이 기계적으로 놈들을 정리해 갔다.
오늘만 해도 1인당 수백, 어쩌면 천 이상도 잡은 마물이다.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지금은 어떻게 지나가고 있지만.’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면. 이보다 더 강한 개미들이, 이런 숫자로 계속해서 들이닥친다면.
그걸 뚫고 나아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알렌과 에르제의 체력 운운할 것이 아니라 시안 본인도 자신이 없었다.
‘그 괴짜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개미들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거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저 개체수도 많고 흉악하며 냄새까지 귀신같이 맡는 개미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그 방법을 익힐 수만 있다면 무사히 개미들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다 끝났냐?”
“어. 그쪽은?”
“여기도 끝났다. 또 언제 몰려들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한쪽을 모두 정리한 헥토르가 다가왔다.
시안이 하던 생각은 잠시 멈추고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갑자기 빤히 바라보는 것에 헥토르가 눈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까 하나 물어보는 걸 깜빡한 것 같아서.”
“뭔데?”
사실 깜빡한 것이 아니라 알렌과 에르제가 있어서 물어보지 못했던 거지만.
시안이 그동안 그에게 묻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거인왕을 직접 본 적이 있나?”
이번 여정의 목표. 아틀란타가 얘기한,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을 거인왕을 찾는 것.
헥토르는, 뇌력천주는 거인왕이 멀쩡히 살아있을 당시에도 존재해왔던 악마다.
에버웨일을 감쌌던 퀘른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거인왕도 실제로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음, 뭐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긴 한데.”
헥토르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선 거인왕에 대한 이야기가 풀려 나왔다.
* * *
다음 날, 일행들은 시안의 말대로 둘씩 나누어서 길을 뚫었다.
애초부터 굳이 넷이 모두 달려들 일이 아니었다.
둘만 되어도 개미들 수십 정도는 손쉽게 뚫어낼 수 있었으니까.
시안은 알렌과 한 조를 이루었고 에르제는 헥토르와 조를 짰다.
에르제는 시안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였지만 이쪽이 보다 합리적이라며 시안이 결정한 것이다.
광역 공격에 보다 특화된 알렌과 헥토르를 나누고, 무력의 밸런스를 생각해 알렌 쪽엔 자신이, 헥토르 쪽엔 에르제를 붙였다.
이보다 더 밸런스가 좋을 수 없었기에 에르제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시안의 말에는 절대 반대하지 않긴 했지만.
그렇게 나아가길 이틀.
조를 나눈 후로 하루 동안 나아가는 거리가 길어져, 어느새 목적지까지 하루 정도면 도착할 지점에 도달했다.
개미들의 영역에 살고 있다는 묘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까지 하루.
그런데, 의외로 시안 일행은 그 묘한 이와 더욱 일찍 조우하게 되었다.
“이봐, 너희들. 그렇게 개미들의 체액을 덕지덕지 묻히고 이 길로 지나가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이 앞에 우리 집이 있거든.”
들려오는 소리에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쳐다보니 한 그루의 나무 위에서 뭔가를 질겅거리며 이쪽을 보는 남자가 보였다.
“수인?”
귀에 여우의 것과 비슷한 귀가 나있는 남자였다.
수인 치고는 묘하게 마른 남자.
아니, 그냥 마른 정도가 아니라 무슨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키는 또 훌쩍 큰 데다, 입은 옷은 평범한 사이즈였음에도 굉장히 품이 크게 보였다.
“뭐야, 수인 처음 봐?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수인인데.”
그가 질겅거리던 것을 옆에 퉤, 하고 뱉으며 얘기했다.
“이 앞은 개미들이 못 오게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는 곳이거든? 그러니까 니들이 그렇게 체액을 묻히고 들어오면 굉장히 곤란하다 이 말이야. 알아들었으면 딴 길로 돌아가던가 물가에서 벅벅 닦고 오든가 하라고. 이대로는 못 지나가니까.”
그 말에, 시안의 눈이 반짝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