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8화
티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생각보다 커다란 곳이었다.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옴폭 들어가 있는 분지.
그 평야 지대에 널따랗게 목책이 둘러싸고 있었고, 산 부분에는 계단식으로 농지가 개간되어 있었다.
“오…….”
에르제가 켈드윈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이 보였다.
대륙에 있는 다른 도시에 비하면 당연히 손색이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곳이 마물의 땅 한복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저만큼이나 구색을 갖춘, 거기다 넓기까지 한 인간들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감동까지 불러일으킬 만한 광경이었다.
“이제 노숙은 그만해도 되겠네!”
에르제가 방긋 웃으며 그리 얘기했다.
……뭐, 그 부분도 확실히 기쁘긴 하지.
에버웨일을 나와 몇몇 마을을 전전하긴 하였으나 거인들의 무덤에 들어온 후부턴 모두 노숙이었다.
노숙 좀 한다고 몸이 망가질 멤버는 아니었지만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헥토르가 시안에게 물었다.
그는 물론 다른 일행도 티스가 시안에게 하는 설명을 모두 들었다.
동쪽 끝으로 향하기 위해선 개미들의 영역을 뚫고 가야 한다는, 그리고 그건 불가능하다는 얘기.
“방법을 찾아봐야지.”
개미들을 몇 놈 죽여보긴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된 놈들의 영역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벌써부터 포기하기엔 많이 일렀다.
“어이, 티스! 뭐냐, 그놈들은!”
목책에 가까이 다가오자 저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쳐다보니 입구에 설치된 높다란 망루 위에서 한 사내가 석궁을 들곤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수염이 가득한 불곰처럼 생긴 사내였다.
“자크! 그 석궁 치워! 내 생명의 은인들이다!”
“하! 그래서 뭐 어쩌라고?”
티스의 외침에도 자크라 불린 사내는 콧방귀만 뀌며 석궁을 치우지 않았다.
자크가 더욱 단단히 티스의 뒤쪽에 늘어선 녀석들을 노려봤다.
모두 후드를 쓰고 있는 탓에 이쪽에선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못 보던 놈들이란 것은 확실했다.
그때 놈들 중에 가장 앞에 서 있던 녀석이 티스의 앞으로 나섰다.
“내 이름은 시안이다. 제국에서 도망쳐 왔다.”
“제국?”
시안이 후드를 벗으며 얘기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얼굴을 보며 자크가 혀를 찼다.
덩치는 어지간한 장정 못지않았으나 얼굴을 보니 스물은 채 되었을까 싶은 애송이였다.
‘안 그래도 요새 그쪽은 난리도 아니라고 하더만, 저런 꼬맹이들까지 쫓겨날 정도인가 보군.’
근래 켈드윈에는 제국 쪽에서 도망쳐오는 인원이 늘었다. 개중에는 군에서 탈영한 병사도 있었다.
켈드윈은 도망자들의 마을. 전쟁이 일어나면 인구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도망자들이라 이거지? 하지만 이쪽도 아무나 받을 수는 없단 말이지.”
자크가 겨누었던 석궁을 살짝 옆으로 치웠다.
물론 장전한 화살은 풀지 않고 언제든지 들어 쏠 수 있도록 단단히 손에 쥐고 있었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이나 지식이라도 있나? 철을 다룰 줄 안다던가 약초 하난 빠삭하다든가.”
“기술?”
시안이 슬쩍 일행을 돌아보았으나 모두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기술은 모르겠고 싸움은 좀 하는데.”
“얌마! 그건 여기까지 오는 놈들은 엔간히 다 하는 거고!”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자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켈드윈이 대륙으로 향하는 입구와 비교적 가까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마물들의 영역을 지나와야 한다.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에서 이미 어느 정도 전투력이 있다는 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거 말곤 뭐 없어?”
“흠.”
별 대답이 없는 아래쪽을 보곤 자크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럴 줄 알았지. 저런 어린놈이 이곳까지 도착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그 이상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때 시안이 얘기했다.
“조금 잘 싸운다는 건 어때.”
“뭐?”
시안의 이상한 말에 자크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그의 귓가를 스치며 팔이 불쑥 솟아났다.
“으헉!”
자크가 기겁하는 사이 그 손에 쥐어진 얇은 단검이 석궁에 장전된 볼트를 베어냈다.
순식간에 자크가 든 석궁은 반 토막난 화살밖에 걸려 있지 않게 되었다.
“어, 어느새!?”
자크가 다급히 물러나며 품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 단검에선 희미하게나마 오러가 피어올랐다.
반면 눈앞의 여자는 태연하게 단검을 돌리곤 품에 넣을 뿐이었다.
자크가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4명이서 있었던 후드들이 지금은 셋밖에 없었다.
‘계속 보고 있었는데!’
분명 석궁을 들고 계속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느새 한 녀석이 빠져서 어떻게 이 망루로 올라와 화살을 잘라냈단 말인가?
심지어 눈앞에 둔 지금 이 순간에조차 제대로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자크는 완전히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아래쪽에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제는 단검을 완전히 품에 넣고는 망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부상 하나 없이 땅바닥에 폴짝 착지한 그녀가 총총 뛰어 시안 쪽으로 향했다.
“그, 그래. 일단 들어가라.”
등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자크가 끝내 목책의 문을 열었다.
저런 놈들이 넷이나 있다면, 그로서는 막고 싶어도 막을 수단이 없었기에.
시안이 일행을 데리고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며 에르제가 망루 위의 자크를 바라보며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아…… 티스 녀석, 대체 누굴 데려온 건지.’
에르제의 손 인사에 자크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은거를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환영이지만, 어쩐지 그렇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이, 일단 시장님에게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단숨에 망루 위의 자크를 무력화시킨 것으로 한층 더 겁을 먹었는지, 티스가 더듬거리며 얘기했다.
큰길을 가로지르며 시장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시선들이 시안과 일행에게 쏟아졌다.
단숨에 외부인이란 것을 눈치챈 것이다.
“지금 망루에 있는 게 누구였지?”
“자크일걸.”
“자크가 통과시켰단 말이야? 그러면 이곳 주민이 될 가능성이 높겠군.”
“모르지. 시장이 무슨 소릴 할지. 애초에 잠깐 들른 여행객일 수도 있잖아.”
“야, 이런 곳으로 여행 올 사람이 어디 있어.”
그들 역시 거의가 바깥에서 온 이들이다.
그렇기에 외부인이라고 배척하는 분위기는 없었지만, 호기심 짙은 시선은 피할 수 없었다.
조금 후, 다른 집보다 조금 큰 집에 도착했다.
호화롭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그냥 크기만 살짝 클 뿐이었다.
“손님인가, 티스?”
이윽고 시장이란 자가 시안 일행을 맞았다.
“개미들에 둘러싸여 있던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데려왔다?”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하셔서요. 은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자네라면 충분히 무시하고 남을 거 같은데.”
“하하……. 그, 그럼 저는 이만.”
대충 소개를 하는 듯 마는 듯하고 티스는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시장과 시안을 비롯한 일행들뿐이었다.
“앉게.”
“예.”
시장과 마주 보는 자리에 시안과 일행들이 자리했다.
시안이 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는데, 노인답지 않게 상당히 건장한 모습이었다.
덩치도 크고 실전으로 다져진 근육이 아직도 발달되어 있다. 얼굴에는 커다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장이라기보단 흉악한 산적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제국에서 왔습니다.”
“전쟁 때문에?”
“그런 셈이죠.”
“꽤나 어려 보이는데…….”
“동안이라서.”
“그렇군.”
도망자를 받아들이는 걸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지 시장은 몇 마디 말로 빠르게 시안의 내력을 납득했다.
그리고 일정 이상 선을 긋고 그 이상은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자크가 통과시킨 것을 보니 한 가락 재주는 있는 모양이지.”
“잘 싸웁니다.”
“응? 잘 싸워? 그걸로 자크가 통과시켰다고?”
“네.”
“그, 그렇군.”
시장이 눈을 깜빡이며 시안을 바라보았다.
자크는, 켈드윈에서 가장 센 녀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러를 쓸 수 있을 정도의 강자다.
그런 자크가 납득했다면 분명 그 이상의 강자라는 뜻.
‘이 어려 보이는 애들이?’
신경 쓰이지도 않던 시안 일행의 내력이 갑자기 궁금해져 왔다. 어디 기사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이들인가?
물론 갑자기 궁금해졌다고 물어보거나 하진 않았다.
“이곳에는 살기 위해 온 건가? 살 만한 공간이야 얼마든지 남아 있다만.”
“아예 눌러앉을 생각은 아니고, 개미들의 영역에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그리 얘기하자 시장이 눈을 찡그렸다.
그가 잠시 말을 고르고는 시안을 만류했다.
“관두는 게 좋을 텐데……. 그놈들은 다른 마물들을 죄다 밀어내고 이 땅을 차지한 녀석들이야. 희희낙락 관광을 떠날 만한 곳이 아니란 말일세.”
이곳조차 위험해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시장이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말 한마디로 포기할 시안이 아니었다.
“정 불가능하면 포기하겠습니다만, 아직 그걸 판단할 때는 아니군요.”
“허어…… 오면서 아마 개미들과 조우했을 테지만 그 정도로 생각하면 안 돼. 놈들의 힘은 끝없는 숫자에서 나오네. 더구나 이곳에 출몰하는 놈들은 놈들의 왕국에서도 도태된 녀석들이야.”
“도태요?”
“놈들 사이에서 너무 나약해서 영역 밖으로 쫓겨난 녀석들이란 말일세.”
본격적으로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면 이곳의 개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놈들이 나타난다는 뜻이었다.
뿐만 아니라 개체 수가 압도적이기까지.
‘확실히 위험하긴 하겠어.’
시안이 팔짱을 끼고 생각을 하다가 슬쩍 헥토르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그에게 작게 물었다.
“헥토르. 넌 그 몸이 죽어도 지옥계로 돌아가고 끝나지? 강림만 한 거잖아.”
“그야 그렇지. 강림만 풀면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 누구 씨 때문에 묶여 있어서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잘 대답을 하던 헥토르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야, 너 설마 위험해지면 날 내팽개치고 도망갈 생각이냐?”
“꼭 그런다는 건 아니고. 플랜 중 하나로는 놔둘 법한 것 같다.”
“얌마! 이거 아주 어? 이런 악독한 인간을 봤나, 대체 누가 악마야 이거!”
“그렇게 되면 너도 좋은 거 아니냐. 지옥계로 강제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그래도 자유는 찾게 되잖아.”
“응? 그, 그런가……?”
묘한 논리에 설득당한 헥토르가 갸웃거리고 있을 때 시안은 시장과의 대화를 마저 이어갔다.
“흠…… 개미들의 영역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뭔가 방법이라도?”
“내게는 없지만 방법을 알 만한 이라면 알고 있네.”
시장이 구석의 바구니를 뒤적거리더니 간단한 지도가 그려진 천 한 장을 꺼내었다.
“이건?”
시안이 물었다.
구불구불한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는 묘한 지도였다.
“개미들의 영역을 그린 지도인데, 아 초입 부분만 약간 그려져 있을 뿐이네. 여기 이쪽에 표시된 부분이 있지? 그곳에 사람이 하나 살고 있을걸세.”
“사람이요?”
개미의 영역에 사람이 산다고? 이 도시를 놔두고?
“대체 무슨 수로 거기서 사는지는 나도 몰라. 그래도 간간이 도시에 내려오는 걸 보면 멀쩡히 잘살고 있는 모양인데. 한번 찾아가서 물어보게. 개미를 피하는 방법이든 뭐든, 뭐라도 알고 있지 않겠나?”
시안이 눈을 빛내며 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귀한 정보를 들었군요.”
“귀하고 자시고 여기 주민들은 다 알고 있는 정본데 뭘. 지나가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아는 유명한 괴짜야.”
“그랬군요.”
시안이 천을 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급한 일도 처리했으니, 다음으로 급한 일이 남았다.
“혹시 여관…… 음, 아니, 민박이나 아니면 빈집이라도 잠시 빌릴 수 없을까요?”
일단은 지붕이 있는 곳에서 씻고 쉬는 것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