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6화
시안이 침을 삼키며 검을 틀어쥐었다.
로데릭 발자크.
제국의 대장군, 하이마스터가 그의 앞에서 적의를 보이며 검을 들고 있었다.
‘안쪽이 아니라 이쪽을 우선시했군.’
시안이 굳이 에르제를 통해 유설과 란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은, 그들을 구출하려던 것도 있지만 대장군을 견제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학생들이 탈출을 시도하면 분명히 소란이 일어날 테고, 제레흐도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이 도시에서 제레흐를 견제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로데릭뿐.
그러니 로데릭은 학생들의 탈출을 돕는 제레흐를 치러 갈 거라 생각했었지만.
‘거인 쪽이 더 중요하다 이건가.’
인질들을 구류하는 것보다 한 마리 거인이 더 중요하단 뜻이리라.
납득이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제국 측이 거인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많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중요한 전력일 테지.
“고작 넷으로 거인을 잡은 건가.”
로데릭이 퀘른델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이미 모두 무너져 내려 잔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에버웨일을 감싸고 있던 화염 장벽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것을 보고는 그가 다시 시안을 향했다.
“제국의 학생들 중에 뛰어난 이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만, 조금 지나쳤어. 그 거인은 폐하의 물건이다.”
로데릭의 말에 옆에서 알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안이 물었다.
“벤델 영지에서 거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호오, 거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나? 베르페드의 아들이라 다른 모양이군.”
“칠흑마탑에서 데리고 있더군요.”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로데릭. 이것으로 황실과 칠흑마탑의 연결은 확실해진 셈이다.
“그들도 결국은 제국의 신민이다. 폐하께선 관대하신 마음으로 그들조차 품어주려 한 것이지.”
“…….”
시안이 얼굴을 구겼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할 것이지,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관대한 마음이 아니라 거인에 대한 욕심이겠지.
로데릭도 진심으로 한 얘기는 아닌지 피식 웃어 보였다.
“어찌 됐든 그것이 제국의 이익으로 귀결된다면 옳은 일이다. 폐하 역시 그런 생각으로 거인을 얻은 것이고. 공자는 다른 생각인가?”
“제게 있어 흑마법사와 악마들은 적입니다. 그들이 데리고 있던 거인 역시도.”
“아그리드 후작의 뜻인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시안의 대답에 로데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발언.
그러나 이미 제국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시안에게 있어선, 그다지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곤란해지는 건 가주뿐이니.’
한동안 제국은 안팎으로 혼란이 계속되겠지.
가주 역시 이 혼란 속에서 자리를 비우긴 어려울 것이다.
나가려면 지금.
그렇게 결정한 이상 가주와는 완전히 척을 질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맞았다.
‘염노.’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라면 염노와 채 작별을 하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가하게 인사를 나눌 정도로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만나러 가면 되니까.’
어차피 염노는 가주와 함께 안전하게 있을 테니 위험에 처할 일은 없겠지.
지금은 일단 스스로의 일을 걱정할 때였다.
“아직 어린 공자의 말이니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겠지. 내 직접 베르페드에게 물어보겠다.”
로데릭이 손을 들었다.
어느새 일행의 주위를 기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금껏 뻔히 보고 있던 일행이었지만, 로데릭 한 명 때문에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공자도 함께 가게 될 거야.”
기사들이 일행을 포박하기 위해 다가왔다.
시안과 일행이 뒷걸음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쪽에도 이미 기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망칠 길은 없다.
‘벨까?’
시안이 고민했다.
기사들을 베고 도망칠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일이 커질 수 있다.
거인을 벤 것과 황실의 기사를 벤 것은 상황의 경중이 전혀 다르다.
어쩌면 거인들의 무덤까지 추적자가 붙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 그래도 가주의 추적자가 있진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이때 황실의 추적자까지 붙게 된다면 일이 더욱 힘들어진다.
“시안.”
“어떡할 거야?”
알렌과 에르제가 그를 불렀다. 그들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유일하게 헥토르만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결단을 내린 그가 검을 꽉 쥐었다.
‘여기서 잡혀가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여기서 로데릭에게 잡힌다면 자신은 그대로 가주에게 환송될 터.
그리고 두 번 다시 아그리드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게 뻔했다.
한 번 검을 뽑은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그런 생각에 그가 눈을 번뜩이며 검을 들려 할 때.
“시안 공자!”
걸걸한 목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다.
시안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제레흐와 몇몇 교관들이, 탈출한 반요정과 수인 학생들을 데리고 시안을 포위한 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제레흐!”
로데릭이 빠득 이를 갈더니 대번에 그를 상대하러 뛰었다.
순식간에 접근한 로데릭이 검을 휘둘렀고, 제레흐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콰앙―!
단순한 검과 검의 부딪침에 대기가 크게 떨려왔다.
그걸 신호로 이종의 학생들과 제국 기사들의 전투가 과열되었다.
개중엔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유설과 란 아슬라.
심지어 란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쳐 메어진 샨까지 보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지자.”
시안의 말에 토를 다는 일행은 없었다. 그들 역시 제국 기사에게 직접 손을 쓰기는 꺼리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그들을 로데릭이 포착했다. 그가 당장에 이쪽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하였으나.
“어림없네, 로데릭 경!”
카앙!
제레흐의 검이 로데릭을 막았다.
두 사람의 주위엔 어느새 기사도 마법사도, 학생들도 아무도 없어져 있었다.
두 하이마스터의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두 멀찍이 떨어진 것이다.
시안이 잠깐 두 사람의 전투를 쳐다보고는, 그대로 바깥으로 뛰었다.
“시안!”
그때, 다급히 시안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그의 담임이었던 테일 교관.
“총장님이 네게 전해주라 하시더구나.”
그가 천에 싸인 무슨 보따리를 시안에게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은 시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천에 싸여 있었지만 이 물건의 존재감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비고에서 보았던 예의 청동 거울.
마룡왕이 찾아 헤매던 원시 마법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제국에 뺏길 수는 없다고 하더구나.”
“그걸…….”
왜, 라고 말하려던 시안은 이내 총장의 생각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로데릭에게 패배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그의 발을 잡으며, 자신을 비롯해 다른 학생들을 탈출시키는 것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도 함께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렇기에 본인이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을 떠나는 자신에게 이걸 맡긴 것이다.
어쩌면 마룡왕과 묘한 연이 있는 자신이었기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시안. 에버웨일은 평화의 상징이다.”
테일 교관이 시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에버웨일은 무너지지 않아.”
“교관님.”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수업을 들으러 오거라. 그때까지는 잠깐 휴교다.”
그가 시안의, 그리고 알렌과 에르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곧바로 기사들과 싸우는 학생들을 도우러 몸을 던졌다.
반년간 신세를 졌던 담임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는 시안이 그 자리를 떠났다.
“가자.”
그들을 태운 말이 평야를 달렸다.
목적지는 동쪽.
거인들의 무덤이었다.
* * *
“젠장! 개미 녀석들!”
한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틈틈이 뒤쪽을 바라보며 그가 급하게 다리와 팔뚝에 붕대를 감았다.
곳곳에 난 상처에서 흘린 피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개미 놈들이 이곳까지 내려왔을 줄이야……!’
개미라는 호칭은 딱히 상대를 멸시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를 쫓고 있는 것은 정말로 개미였다.
자이언트 앤트.
이 땅이 내뿜는 거인의 사기(死氣) 탓에 그 덩치가 비대하게 커져 버린 끔찍한 마물.
사람 하나 정도는 간식 삼아 씹어 먹을 정도로 거대하면서도, 개미의 습성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녀석들로 이 근방을 완전히 주름잡고 있는 마물이었다.
심지어 본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트롤들조차 압도적인 힘과 세력으로 밀어내고 이 땅을 차지한.
단언컨대 이 거인들의 무덤에서 가장 끔찍한 마물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에 들을 만한 녀석들이었다.
‘후우…… 어떡하지?’
사내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떡하고 자시고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이 근방에서 사람이 사는 도시라곤 단 하나뿐.
하지만.
‘저 녀석들을 데리고 도시에 들어갈 순 없는데.’
도시의 안녕을 생각하는 그런 아름답고 희생적인 마음이 아니다.
만약 저 개미들을 주렁주렁 달고 도시도 도망쳐 온 자신을 본다면.
도시의 경비들은 개미들보다도 자신을 먼저 죽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끌어내어 참수하리라.
어떠한 이유로도 도시를 위협하는 이는 용서하지 못한다.
이 마물의 땅에서 인간들의 도시, 켈드윈을 유지하기 위한 철의 규정이었다.
―키릭!
그때 정신이 팔려있던 오우거의 시체를 모두 뜯어 먹었는지 개미들 중 일부가 사내 쪽으로 향했다.
응급치료를 하며 개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사내는, 그 즉시 자리를 떴다.
하지만 한 방울씩 떨어지는 핏방울을 막진 못했고.
개미들은 끝도 없이 그를 쫓아왔다.
“제길…….”
사내가 개미들에게 따라잡히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내의 얼굴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도시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안전한 장소를 찾지도 못하고.
어디 절벽이라도 있었다면 뛰어내렸을 텐데 야속하게도 그런 것 하나 보이지 않았다.
팅, 팅, 팅!
사내가 마지막 발악으로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보았지만, 그의 화살은 개미의 외피조차 뚫지 못했다.
오러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나름 마나를 담은 화살이었는데.
―키이익!
개미들이 몰려들었다.
끔찍하게 징그러운 그것들을 보며 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놈들의 턱 힘은 인간의 뼈와 근육 정도는 젤리처럼 으깨버린다.
곧 엄습할 고통을 상상하며 그가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그때.
―쿠구구구구궁!
사내와 개미들, 그 밖에 있는 것이라곤 풀숲과 나무뿐이던 이 숲속에 난데없이 해일이 덮쳐왔다.
해일에 휩쓸린 개미들.
그런데 물에 휩쓸린 개미들이 모조리 절단되며 체액을 흩뿌렸다.
“뭐, 뭐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사내가 입을 벌렸다.
그런 사내의 앞에 후드를 쓴 수상쩍은 이들이 나타났다.
가장 앞에서 푸른 검을 들고 있는 사내가 후드를 넘겼다.
“간신히 사람을 찾았군.”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
아직 어린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에, 사내가 다시 한번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