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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14화 (11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4화

거인왕.

아틀란타가 이야기한 봉인된 거인들의 왕.

그 얘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반신반의였다. 아틀란타가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해서 다른 거인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거인의 생존을 제국이 증명했다.

‘그렇다면 거인왕도 정말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찾아볼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거인의 힘과 존재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얻은 것을 계기로 제국이 오랜 평화를 깨기로 마음먹었을 정도니까.

그런 거인의 왕쯤 된다면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겠는가.

거기에 녀석에겐 물어볼 것도 있었다.

네메시스란 존재에 대해서.

‘일단은…… 거기부터 가봐야 하나.’

첫 목적지는 거기로 잡으면 될 것이다.

거인들의 무덤은 마물들의 땅이지만 그렇다고 마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도 엄연히 사람이 사는 곳이 있었다.

사연이 많거나 혹은 범죄를 저질러 제 나라에 있을 수 없게 된 이들이 흘러들어 가는.

무법자들의 도시 켈드윈.

“거인들의 무덤에 가겠다고?”

시안의 얘기에 알렌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곤 눈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차라리 가문에 들어가서 웅크리고 있는 쪽이…….”

지당한 말이었다.

제국 내에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라고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다.

크루거 가문이나 아그리드 가문 정도라면 마음만 먹으면 후방으로 빠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최전선에는 공에 눈이 먼 귀족들이 득시글거릴 테니까.

하지만 시안이 거인들의 무덤에 가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방학 때 벤델 영지의 유적에서 거인을 봤어.”

“뭐……!”

“묘한 구속구에 봉인되어 있더군.”

이제 와선 딱히 숨길 필요도 없는 얘기다.

이미 저 영지 바깥에 화염거인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본 시점에서 거인에 대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놈도 황실이 준비하던 놈이었어?”

알렌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것까진 몰라. 많이 약해져 있어서 그랬는지 금방 죽었거든.”

자신이 죽였단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알렌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첫 질문에 대해 시안이 모두 대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거인들의 무덤은 위험하지 않겠냐는 질문.

시안이 대답했다.

“그놈이 죽으면서 거인왕을 찾아보란 얘기를 하더군.”

“왕을…… 찾아?”

“그래. 녀석이 적당히 내뱉은 말이 아니라면 거인왕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단 뜻이겠지.”

“그렇다면…….”

“기록상 거인들의 왕은 동쪽의 끝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동쪽의 끝. 일컬어지기를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땅.

거인왕은 그곳까지 몰려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되어있다.

시안의 당면한 목적지였다.

“……그걸 찾아볼 생각이었구나. 그래서 거인들의 무덤에 가겠다는 거고.”

“그래. 거기는 혼자 가기엔 너무 위험해. 그래서 너에게 말을 건 거고.”

“만약 내가 가문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면?”

“그럼 다른 일행을 찾아봐야겠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시안은 알렌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거인의 존재는 흑마법사와 칠흑마탑의 기원과 같은 것이다.

본래 칠흑마탑이란 존재가 인간을 배신하고 거인에게 붙었던 배신자들이 세운 것이었으니까.

그 거인왕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흑마법사에 대해 심상치 않은 증오를 품고 있는 알렌이라면 거절하지 않으리라.

“시안.”

알렌이 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알티마만 설득하고 올게.”

실질적으로 수락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오늘 저녁에 다시 보자는 약속을 끝으로 알렌이 떠나갔다.

혼자 남은 방에서 시안이 해야 할 일을 차분히 정리했다.

목적지를 정한 것은 좋으나 당장 지금의 일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

이윽고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시안의 방에는 네 명이나 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방주인인 시안 본인과 알티마를 설득하고 온 알렌. 그리고 사용인 숙소에 연락해 오라고 한 헥토르.

나머지 하나는 에르제였다.

“진짜 우리랑 가겠다고?”

“응.”

시안의 물음에 그녀가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난리가 났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

“괜찮아. 이미 연락은 보내놨어.”

“네 능력이라면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귀족위를 받을 수도 있을지도 몰라. 요인 암살이나 호위 분야는 어디에서나 천금을 주며 구하는 분야니까.”

“싫어. 눈먼 화살에 맞을지도 모르고 위험하잖아.”

“우리는 거인들의 무덤을 가로지를 생각이야. 어쩌면 전쟁터가 더 안전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나도 가고 싶어.”

전쟁터는 위험해서 싫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거인들의 무덤은 가고 싶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시안이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결의에 찬 눈으로 시안을 보고 있었다.

‘내가 지켜줘야 돼.’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전쟁에 나가는 것을 거부한 것은 시안이 없으니까. 단순히 그 이유뿐이다.

만약 시안이 거인들의 무덤이 아니라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겠다 했더라면 그녀 역시 전쟁터에 갔을 것이다.

“……그래, 알았다.”

그녀의 생각을 시안이 모두 꿰뚫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시안에게 있어선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동료가 늘어나는 것만큼 기꺼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거인들의 무덤으로 향하는 일행은 4명으로 결정되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지 주인? 그냥 얌전히 나갈 텐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헥토르가 얘기했다.

녀석도 무게를 잡으니 꽤나 그럴듯했다. 입고 있는 집사복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기 전에 할 일이 하나 있다.”

시안이 품에서 두 장의 편지를 꺼냈다.

본래는 직접 전달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더 적임자가 있다.

“에르제. 자카르타랑 빙하백령의 학생들이 갇힌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겠어? 기사들한테 들키지 않고.”

“거기로 가면 돼?”

“유설이랑 란한테 전해줘.”

“무슨 편진데?”

그가 에르제에게 편지를 건네었다.

딱히 대단한 글귀가 적힌 편지는 아니다. 그곳에 적힌 건 단 하나였다.

“지금부터 화염거인을 치러 갈 거다.”

그러니 생각이 있다면 기회를 봐 탈출하라고.

시안도 할 일이 있기에 그들을 탈출시키는 데 전력을 쏟을 여유는 없었다.

이 편지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호의였다.

“……좋아.”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알렌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전의를 다졌다.

그는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을 게 뻔한 거인을 그냥 두고 간다는 것이 계속 목의 가시처럼 걸리던 중이었다.

헥토르가 크게 박수를 치며 히죽 웃었다.

방금까지 진중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평소의 그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재미를 위해 이 지상에 올라왔던 그로서는 거인을 피해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은 고려하지조차 않았다.

“갔다 올게.”

에르제가 편지를 품에 넣고 조용히 사라졌다. 검은 선으로 들어간 것이다.

“준비하지.”

그리 말하며 시안이 일어섰다.

그의 손에 밤의 기운이 모이고 있었다.

* * *

아카데미를 완전히 장악하고 로데릭이 가장 처음 착수한 일은, 거점을 꾸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부하들에게 모두 맡겨둔 채 그는 오직 한 가지에 매진했다.

이 아카데미에 있을 원시 마법을 찾는 일.

“……없군.”

그러나 강제로 문을 비틀어 베어 들어와 본 비고 안에 원시 마법은 없었다.

다른 아티팩트나 보물들은 가득했지만 로데릭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찾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

“흠…… 얼마 전까지 이곳에 보관되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장군.”

“그런가.”

데려온 화염마탑의 마법사가 그리 얘기했다.

황녀가 붙여준 이로, 로데릭 본인에 비해선 손색이 있었지만 그 역시 마스터에 달하는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이였다.

“모든 벽에 진하게 마나의 잔향이 눌어붙어 있습니다. 이는 단기간에, 그것도 미미한 마나를 뿜어내는 정도론 불가능합니다, 장군.”

“문 역시, 이곳의 문이 가장 베기 힘들었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했단 얘기겠죠.”

“근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군.”

마법사가 눈을 찡그리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나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총장이 미리 빼돌렸나 보군요.”

“…….”

로데릭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일이 귀찮게 되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비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만 가보게.”

“총장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그래야지.”

그러곤 마법사를 보내고 홀로 제레흐를 보기 위해 총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라는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퀭한 눈으로 이쪽을 쏘아보는 제레흐의 모습이 보였다.

“많이 수척해졌군요.”

“누구 덕분에 말이지.”

그는 거의 총장실에서 생활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하이마스터인 그가 이렇게 수척해질 리가 없다.

제레흐가 이렇게 된 것은 마음고생 때문이었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며 로데릭의 행보를 파악했고 기숙사 쪽에 소란이 일진 않는지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교육자의 귀감이십니다, 제레흐. 제가 어릴 때도 당신 같은 사람이 선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실없는 소리는 됐고, 왜 온 건가? 이만 돌아가겠다는 말이라면 내 두 팔 벌려 환영하겠네만.”

“원시 마법은 어디 있습니까?”

제레흐가 입을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주위로 마나가 요동치며 총장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약한 이라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만한 기운이었지만, 로데릭은 가볍게 그것을 흘려 넘겼다.

그 역시 제레흐과 같은 하이마스터의 검사였으니.

“이제 보니 그게 목적이었구먼? 거인을 부리는 대가로 마룡왕에게 갖다 바치기라도 할 건가?”

마룡왕? 그 단어에 로데릭이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이내 딱딱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폐하의 명령입니다.”

그는 그저 황제의 명을 수행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러자 제레흐가 코웃음을 쳤다.

“내게 그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네. 에버웨일은 그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 도시야.”

“지금은 저와 제국의 장병들이 장악 중입니다.”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겐가?”

제레흐가 눈을 부릅뜨며 얘기했다.

로데릭은, 정말로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지금 잡아놓은 학생들. 그들을 데리고 조건이라도 걸어야 이 노인이 입을 열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 다급하면 최후의 수단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할 때는 아니다.

그 역시 가능한 어린아이들에게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제레흐, 만약 당신이 그걸 숨긴 거라면…….”

그때.

가슴속에 넣어두었던 통신구가 마나를 발했다.

로데릭이 말을 멈추곤 품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연락 담당인 부하와 연결되어 있는 물건.

―장군님! 기숙사에 모아두었던 학생들이 일제히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로데릭이 눈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감시하고 있던 기사들은?”

―모두 당했습니다!

그 보고를 듣곤 총장실에 있는 두 사내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얼굴을 찌푸린 로데릭에 비해 제레흐는 흐물흐물 웃고 있었다.

“학생들에게조차 당하는 기사라니, 대장군의 이름이 울겠구먼.”

“쯧.”

로데릭이 혀를 차더니 부하에게 얘기했다.

“소란 피우지 마라. 어차피 이 영지는 거인이 감싸고 있다. 학생들 수준으로 퀘른델의 장벽을 뚫을 수는 없어.”

―그, 그것이……!

통신구 너머의 부하가 말을 더듬었다. 대체 왜 그러나 싶은 로데릭이었지만, 이내 그도 부하가 더듬은 이유를 알았다.

총장실에 있는 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 이 밤중에도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거대한 화염거인.

“대체 누가!”

그 거인의 팔 한쪽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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