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3화
대장군과 눈이 마주쳤다. 시안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베르페드의 아들인가.”
가주를 베르페드라고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몇 안 되는 존재.
“시안 아그리드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군.”
시안과 로데릭이 악수를 나누었다. 로데릭의 입장에선 시안과 좋게 지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데미안과 줄리오는 이미 3황녀의 라인이니 어쩔 수 없지만, 시안의 아그리드가는 아직 명확한 파벌을 타지 않았다.
베르페드 아그리드의 향방이 추후 중요해질 이 시점에 그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시안이 악수를 나누고는 흘깃 바깥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화염거인이 보였다.
“저 거인은 어떻게 된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지금의 시안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었다.
제국이 요정궁과 수인왕국 양쪽에 전쟁을 선포한 것도 물론 경악할 사건이긴 했으나, 따져보면 그 근본엔 거인의 존재가 있다.
거인이라는 확고한 전력을 손에 넣었기에 황제는 자신 있게 양국을 침공한 것이다.
“자세한 건 기밀이라 얘기해 주기 어렵다. 대충 고대 유적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하면 그리 틀리지 않을 거야.”
“칠흑마탑과는 관계가 없단 말씀이십니까?”
시안의 말에 로데릭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칠흑마탑에 대한 걸 이미 알고 있었군. 하긴, 베르페드의 아들이면 알아도 이상할 건 없나.”
“아버님도 거인의 일에 연관되어 있던 겁니까?”
사실 정말로 궁금한 건 이 부분이다.
칠흑마탑을 부수고 다니느라 분주하다고 생각했던 가주가, 황제가 뒤에서 칠흑마탑과 함께 거인을 준비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
알고 있었다면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후자는 가주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전자는 대장군이라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시안을 보며 로데릭이 피식 웃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 말만 남기곤 로데릭이 기사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본관으로 향하는 그의 등을 시안이 바라보았다.
결국 가주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다만.
‘황제가 칠흑마탑과 관계를 맺은 건 확실한 모양이지.’
칠흑마탑에 대해 얘기하는 대장군의 모습은 딱히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 황실과 칠흑마탑의 연결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였다.
과연 그런 황실을 가주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지켜보면 알겠지.’
이번 전쟁에서 가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하면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시안이 기숙사로 향했다.
* * *
로데릭은 아카데미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제레흐였으나 학생들이 묶여있는 이상 그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손가락 하나 안 댄다는 조건으로 제레흐는 스스로 총장실에 틀어박혔다.
그런 제레흐의 수발을 든다는 핑계로 로데릭의 기사들이 항시 그를 감시하고 있다.
로데릭의 영향력은 총장실에서 그치지 않았다.
빙하백령의 학생들과 자카르타의 학생들은 모조리 기숙사에 감금되었다.
제레흐와의 약속으로 거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유롭게 풀어주지도 않는 로데릭이었다.
반대로 제국의 학생들은 취급이 전혀 달랐다.
모든 제국 출신 학생들이 로데릭의 소집에 아카데미 중앙에 모였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로데릭이 처음 꺼낸 얘기는 그것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 공을 세우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뜻이지.”
학생들 사이에는 시안도 있었다. 그가 로데릭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무공을 세우기 좋은 시기라.’
맞는 말이었다. 지금 귀족들이 영지를 갖고 세금을 걷으며 사병을 부리는 것은 단순히 운이 좋다거나 그래서가 아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저마다의 공훈을 세워 당대 황제에게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평화의 시대를 지나며 공을 세울 기회나 장소는 점차 사라져만 갔다.
그러니 이번 일이 어쩌면 기회로 볼 수도 있으리라.
‘쯧.’
물론 시안에겐 아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그들 중엔 찝찝하거나 표정이 안 좋은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물론 정말로 기회로 보는 학생들도 많았다. 주로 데미안의 제국연에 속한 학생들이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며 로데릭이 얘기했다.
“내가 정할 문제는 아니지. 뜻이 있는 이라면 각자 가문에 돌아가 가문의 뜻을 따르도록.”
그러곤 표정이 안 좋은 학생들에게도 얘기했다.
“별로 뜻이 없다면 이 도시에 있어도 좋다. 그래도 개인적으론 돌아가는 걸 추천한다. 여기 있다간 무슨 일에 휘말릴지 알 수 없으니까.”
요는 어느 쪽이든 가문으로 돌아가란 소리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제국 귀족의 자제들. 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로데릭으로서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리라.
그렇기에 귀찮은 이들은 아예 치워버릴 생각으로 이렇게 모아놓고 얘기하는 것이다.
‘돌아간다라.’
로데릭이 돌아가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진지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어떡할 거야?”
“일단 돌아가야지. 여기서 해야 할 일도 없고.”
“수업은…… 당연히 안 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시안이 생각했다.
돌아간다.
그도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택할 수 있다. 가주가 기다리는 그 아그리드 영지의 저택으로.
‘가주가 아무 말도 없었던 건 굳이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없다는 뜻이겠지.’
가주가 황실의 불온한 움직임을, 전쟁에 대한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굳이 아무 말도 없었던 것은 이런 뜻일 것이다.
굳이 아카데미에서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얌전히 영지로 복귀해라.
이것 외엔 없었다.
그렇기에 이는 시안에게 결단의 때였다.
가주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의 후작이라는 작위를 아예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야 황제의 요청을 거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도 끌려가겠지.’
자신도 그 전쟁터에 끌려갈 것이다.
어쩌면 가주와 체샤는 그냥 영지에 남고 자신만 적당한 병력을 이끌고 국경으로 보내질지 모른다.
영지의 후계자를 직접 보낸다는 것으로 체면치레만 확실히 한 후, 실질적인 이득은 가주가 모두 보는.
가주가 자신을 살려놓은 것도 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전쟁은 안 돼.’
그러나 자신은 끌려갈 수 없다.
전쟁터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그 순간이 자신에게 있어 완전히 끝나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지 없는지도 문제였고, 설사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문제다.
공을 세워 돌아온다고 해도 그 공은 어디까지나 ‘아그리드 영식’으로서의 공로.
오히려 황실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자신은 더욱 아그리드란 이름에 얽매이게 되리라.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더 위험하겠군.’
그런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역으로 공을 세우고 살아 돌아왔을 때가 더 위험하다.
자신이 아그리드의 후계자라고 황실이 확실하게 인식을 할수록, 가주의 칼날이 자신에게 향해질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시안이 한번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이 가주의 입장이었다면 시안 아그리드란 존재를 어떻게 써먹는 것이 가장 유용할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공을 잔뜩 세우게 하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 처리해 버리는 것.’
그러면 깔끔하다.
시안 아그리드가 전쟁터에서 세운 공은 공대로 가문으로 돌아오고, 후계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을 황실에 요구할 수도 있다. 후계 구도를 아무런 잡음 없이 체샤로 돌릴 수 있다.
어딜 봐도 이익밖에 없는 플랜이 아닌가.
문제는 그 희생양으로 쓰일 시안 아그리드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
그래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도망가자.’
도주하기 힘든 영지나 전쟁터로 끌려가기 전에, 이 아카데미에서 미리 도망을 가자.
언젠가는 가주의 아래에서 벗어나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다.
‘……좀 많이 당겨진 것 같긴 한데.’
본래는 적어도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까지 최대한 힘을 기르고 경험을 쌓은 뒤, 보다 완벽한 타이밍에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전쟁터에 끌려가면 아카데미 졸업 따위는 우스울 정도로 오랜 기간 묶여 있게 될 수도 있으니.
그가 다른 모든 학생들을 지나쳐 가장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누구보다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학생.
“알렌, 얘기 좀 하지.”
알렌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곤 그가 기숙사 쪽을 가리켰다.
“어? 어, 응.”
그를 데리곤 시안이 비밀 얘기를 할 수 있는 곳.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 *
“어쩔 거지?”
“뭐가?”
“뭐긴 뭐야. 전쟁 얘기지.”
알렌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 시안이 서론은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그는 알렌이 어떤 고뇌를 하는지 알았다.
그는 칠흑마탑에 대항하여 설립된 천도맹의 일원이다. 더욱이 데릭 교수 때를 생각해 보면 흑마법사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도 깊어 보였다.
그런데 제국에서 거인을 부려 타국을 침공하다니.
‘충성을 바쳐야 할 황실과 원수를 갚아야 할 칠흑마탑.’
그 둘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알렌의 입장에선 복잡할 수밖에 없을 터.
“……모르겠어. 아버님은 일단 상황을 보자고 하시는데.”
“크루거 백작님도 천도맹이라고 했던가.”
“응.”
알렌이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확실히 크루거 백작도 미묘한 입장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황실은 분명히 천도맹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일원인 크루거 백작가는 지금 상황에 꽤나 가시방석일 터.
“알렌. 곧바로 가문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때.”
시안이 그에게 얘기를 꺼냈다.
가문이 걱정되어 돌아가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봤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번 얘기해 봄 직했다.
자신의 목적지를 생각해 본다면 알렌만큼 든든한 동료도 없었다.
“가다니 어딜? 아그리드 영지에?”
“아니. 난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뭐?”
시안의 말에 알렌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국이 전쟁을 벌인 지금 시점에 후작가의 아들이 다른 곳으로 새겠다니, 귀를 의심할 발언이긴 했다.
“제국 내에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전쟁에 휘말리게 될 거야. 난 나갈 생각이다.”
“어딜 가려고? 빙하백령이나 자카르타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잖아.”
“들어갈 수 없진 않지. 여기서 감금된 애들을 풀어주고 유설이나 란과 함께 가면 가능할걸.”
그런 길도 있긴 하다. 그들을 구해주고 그 대가로 망명을 요청한다면 거절할 가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러게……?”
“아니. 이건 그냥 해본 소리고.”
감금된 아이들을 해방하는 건 생각해보고 있긴 하다. 총장과 잘 얘기를 나눠본다면 승산은 없지 않았다.
다만 지금 얘기할 건 그것에 대한 건 아니다.
제국을 떠나 자신이 가려고 하는 곳.
“한 곳 더 있잖아.”
거인들의 무덤.
그 마물의 땅.
제국의 군대라도 쉽사리 침범하기 힘든 그 땅에서 당장은 몸을 숨길 생각이다.
그리고 더욱이.
‘거인왕.’
그곳에는 찾아볼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