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11화 (111/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1화

말은 찍어낸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간편한 물건일 리는 없었다.

청동거울을 보고 딱히 시안의 마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거나 훨씬 더 정순하게 변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시안이 얻은 것은 스스로의 심상에 대한 작은 깨달음,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간 여러 마스터들과 대등한 전투를 치러오며 이미 시안의 몸과 정신은 마스터에 이르기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저 단 하나, 단 한 걸음 오르지 못했던 계단을 원시 마법을 계기로 마저 오르게 된 것일 뿐.

‘그래도 제대로 된 심상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물건이다.’

자신과 비슷하게 벽에 막혀 있는 무인과 마법사들의 돌파구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어린 무인과 마법사들이 보다 옳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방향을 잡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사용 방법이나 조건을 완벽하게 알고 있을 때의 일이지만.

그건 그렇고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었다.

“신화시대의 사람들이 이 원시마법을 얻은 것을 계기로 마나를 깨우쳤다고 그랬었죠?”

“기록상으로는. 원시마법을 얻기 전의 인류는 마나의 ‘마’자도 모르고 말 그대로 원시적인 형태의 생활만 이어오던 이들이었다고 하더군.”

그 시대의 사람들도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오러나 마법은커녕 마나의 존재조차 모르던 이들이 스스로의 심상세계를 경험하고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 결과로 인류는 마나와 오러를 깨우쳤고 그 기술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룡왕이 이 원시마법을 자기 물건이라고 그랬었구요.”

“……그랬지.”

제레흐가 얼굴을 찡그리며 얘기했다.

그는 마룡왕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악마들이 으레 그렇듯 세상 모든 것을 제 것이라 생각하는 미친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신화시대에 인류에게 원시마법을 건네준 존재. 그 존재는 현재 정화교단에서 천신이라 부르며 추앙하는 존재다.

제레흐가 정화교단의 신자는 아니었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천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가진 의미가 어떤 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룡왕, 천신, 정화교단.’

제레흐의 생각과는 별개로 시안은 다른 의미로 눈을 찌푸렸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화교단의 기사단장이었던 파멜라가 사실은 마룡왕의 사도였던 일. 왜 하필 마룡왕은 본인의 사도를 굳이 정화교단에 집어넣은 것일까.

그냥 우연히 파멜라가 정화교단에 들어갔을 뿐일까? 아니면 마룡왕의 입김이 있던 것일까?

보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낡고 초라해 보이는 청동거울을 앞에 두고 노인과 학생이 침묵에 싸였다.

“……그만 돌아갈 텐가?”

“그러죠.”

이윽고 두 사람이 방을 나왔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언제고 끙끙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길로 제레흐는 비고의 입구 쪽으로 향했고 시안은 안쪽으로 들어가 아티팩트를 고르기 시작했다.

허락된 것은 B급의 아티팩트들 중 하나.

차분히 시간을 들여 하나를 고른 후 밖으로 나오자, 에르제와 유설은 이미 고르고 나와 시안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다 골랐나?”

“예.”

시안이 제레흐에게 들고 나온 아티팩트를 보여주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는 될까 싶은 작고 붉은 구슬이었다.

“좋은 녀석으로 잘 골라왔구먼. 검 같은 건 필요 없었나?”

“예. 검은 이미 좋은 녀석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지라.”

‘웅!’

그렇게 얘기하니 손목의 각인 안에서 라비가 힘차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제는 검신이 곤충의 날개마냥 굉장히 얇은 단검을 가져왔고, 유설은 못 보던 반지를 끼고 있었다.

모두가 제대로 B급을 하나씩만 가져온 것을 확인하곤 제레흐가 학생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제레흐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들은 후 에르제와 유설은 나란히 여자기숙사로 향했다.

서로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곤 시안도 기숙사로 향했다.

“시안 학생.”

제레흐가 그런 시안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기었다.

“마룡왕과 파멜라에겐 언제나 주의하게.”

“…….”

말하지 않아도 항상 주의하고 있는 사안이다.

시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제레흐가 덧붙였다.

“여차하면 나나 우리 맹의 사람들에게 의지하게나. 파멜라의 정체를 밝혀낸 일로 맹에서 자네에 대한 인식이 썩 나쁘지 않거든.”

“그렇습니까?”

“여차하면 맹에 들어오는 건 어떤가? 한 번 거절했다곤 하나 자네가 마음만 바꿔준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그건 꽤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일전에 시안이 제레흐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은 라비의 힘이 천도맹의 일원에게 악마의 힘으로 포착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티마의 불꽃조차 라비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면 지옥의 힘을 감별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들어가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대답해 두는 것이 좋겠지.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전보단 훨씬 긍정적인 대답이구먼, 하하!”

기분 좋게 웃으면서 제레흐가 떠나갔다.

시안이 손에 든 붉은 구슬을 만지작거리다 품에 넣고는, 기숙사로 향했다.

* * *

대항전이 끝나고서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별다른 사건 사고는 없었다. 시안은 꾸준히 수업에 출석하며 남는 시간은 오로지 스스로의 단련으로 보냈다.

그중에서도 그가 특히 신경을 쓰는 것은, 한 단계 경지가 올라간 오러를 더욱 정갈하게 다듬는 일이었다.

“후우…….”

수련동에 있는 1인용 수련실 하나에 자리를 잡은 시안이 호흡을 고르며 오러를 펼쳐냈다.

1인용이라지만 꽤나 널찍한 수련장이 그의 오러로 새까맣게 덮여갔다.

그 상태로 시안이 천천히 마나의 형질을 바꿔갔다.

일전에 거인 아틀란타의 심장을 흡수한 후부터 가능해진 재주였다.

“…….”

수련장을 뒤덮은 밤하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없이 쪼개진 오러들이 스스로 뭉치고 모이더니 다양한 크기의 입방체로 변해갔다.

본래 시안의 마나와는 달리 거인의 마나는 아예 다른 에너지라 불러도 될 정도로 차이가 컸다.

응집력이 강하고 훨씬 묵직하다. 덕분에 오러를 압축하여 사용할 땐 기존의 마나보다 효용성이 컸다.

‘펼쳐서 쓸 땐 본래대로 하고 뭉쳐서 쓸 땐 거인의 마나로 하면 되겠어.’

공간을 점하기 위해 사용할 땐 기존의 마나를 사용하고 검에 날카롭게 압축하거나 아니면 형태를 만들어 방출하거나 할 땐 거인의 마나를 사용하면 되리라.

각자의 장단점이 명확한 만큼 사용처를 구분하기도 쉬웠다.

‘심장을 취하길 잘했어.’

아틀란타가 죽음을 바라며 시안에게 내주었던 심장.

사실 시안으로서도 도박인 수였다.

아틀란타가 반드시 진실을 말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거인의 심장이 인간에게 독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모든 리스크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특히 이것은 가주가 결코 눈치챌 수 없는 힘이다.

거인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는 숨길 수 없었지만 그 심장을 취했단 사실은 완벽히 숨겼다.

가주가 모르는 무기가 하나 더 생긴 셈.

‘패는 많을수록 좋다.’

그런 의미로 시안은 도박에서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스스스―

시안이 펼쳐두었던 오러를 전부 회수하곤 수련장을 나왔다.

그리고 수련동을 가로질러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학생들이 굉장히 시끄럽고 다급한 분위기였다. 어떤 이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기숙사로 뛰어가는 것조차 보였다. 그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뭐지?’

분명 몇 시간 전에 수련동으로 갈 때만 해도 평소와 같은 분위기였는데.

“시안! 여기 있었구나!”

그때 다급히 그를 부르며 뛰어오는 학생이 있었다.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며 알렌이 달려오고 있었다.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역시 아직 못 들었구나!”

“계속 수련장에 있어서.”

알렌이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알렌도 반년이나 아카데미에서 단련한 학생이다. 연병장 수십 바퀴를 돌더라도 좀처럼 숨이 차지 않을 녀석인데.

지금은 어찌나 다급한 상황인지 새파랗게 질려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니 시안도 불안감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국이…… 황제 폐하가 전쟁을 선포했어!”

……그 소식은, 알렌은 물론 아카데미 전역을 뒤엎어놓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 * *

소메르 제국과 요정궁 빙하백령, 수인왕국 자카르타. 이 세 왕국은 오래도록 균형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빙하백령과 자카르타가 제국을 견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오르리라.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넓은 땅덩이와 높은 국력을 가진 나라였고, 빙하백령이나 자카르타나 단독으로 상대하긴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그건 반대로 말해, 제국 역시 두 국가를 동시에 침공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는 걸 뜻했다.

때문에 제국이 먼저 전쟁을 선포하다니 말도 안 된다…… 라고 말하기에 앞서 시안은 더 근본적인 의문에 빠졌다.

“아무런 징조도 없었는데 대뜸 전쟁을 선포했다고?”

전쟁이란 것이 그렇게 선전포고한다고 단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란 점이었다.

전쟁이란 것은 각국의 군과 군이 부딪치는 현상이며, 군이란 것은 결코 조용히 움직일 수 없는 집단이다.

소수의 별동대나 특별부대라면 몰라도 나라를 침공할 정도의 병력은 절대 숨길 수 없다.

시안의 이 당연한 의문에 답하는 알렌의 말은, 시안을 경악케 하기 충분했다.

“국경에 거인이 나타났대.”

“뭐?”

거인?

“그게…… 마탑에서 만든 골렘이 아니냐는 말도 있긴 한데, 어쨌든 거인으로밖에 안 보이는 생물체가 빙하백령과 자카르타의 국경에 각각 등장했다고 해.”

“……거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강철마탑에서 만든 새로운 골렘인 거 아냐?”

“나한테 온 전령도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알렌이 표정을 굳혔다. 예전에 한 번 봤던 얼굴이었다.

다크 이터에 잠식당한 데릭 교수를 상대할 때 보았던, 분노에 가득한 얼굴.

“아버님이 따로 알아본 바로는 ‘그’ 거인이 맞다고 하셔.”

“…….”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알렌 옆에서, 시안의 표정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가 과거 가주에게 칠흑마탑에 대한 것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분명히 칠흑마탑과 흑마법사의 존재를 세간에 숨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

그리고 낸 결론은 ‘권력자들이 놈들과의 전쟁을 통해 얻는 게 있기 때문’이란 결론이었다.

그때는 그저 추측에 불과했던 일이지만.

‘이걸로 확실해졌군.’

제국은, 황실을 포함한 고위 귀족들은 칠흑마탑에게서 얻어낸 것이 있다.

벤델 영지에서 흑마법사 이덴이 아틀란타를 살려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일.

그것과 똑같은 일을 제국이 하고 있다.

그 둘이 기가 막히게 똑같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 칠흑마탑과 제국은 무언가의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놈들에게서 강탈을 한 것인지, 아니면.

‘손을 잡은 건지.’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느 쪽이든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마 그래서 알렌도 저렇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리라.

“시안.”

그때, 또 다른 사내가 시안을 찾아왔다.

알렌이 더욱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렌의 인사는 대강 받은 채 녀석이 히죽 웃으며 시안을 바라보았다.

“데미안 형님.”

시안이 조용히 녀석의 눈을 보았다.

“때가 됐다, 시안. 너도 후작에게 미리 들은 것이 있을 테지?”

“…….”

그런 거 없다. 가주는 시안에게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들은 것이라곤 거인에 대해선 함구하라는 명령뿐.

“이제 곧 이곳에 대장군이 올 거다. 너도 얼른 준비하거라.”

거인이란 힘을 얻어 요정궁과 수인왕국 모두에 전쟁을 건 제국.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아카데미에 온다고 하는 대장군.

아직 완전히 상황이 파악된 것도 아니지만 시안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단의 때가 왔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