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9화
줄리오는 숲에 숨어 있었다.
거점 주변에 촘촘히 실을 펼친 채, 그 모든 실을 조정하고 감시할 수 있는 장소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
그렇기에 그에겐 실을 자르며 헤매는 에르제가 훤히 느껴졌다.
‘잘도 자르는군.’
그는 지금 실을 자르고 돌아다니는 이가 시안도 유설도 아닌 예의 300위의 학생이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움직임으로 안다. 시안은 아만이 직접 맡겠다고 했었고, 마법사는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자르며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소 의외였다.
천련사는 그냥 실이 아니다. 어지간한 실력이 없이는 자르기는커녕 걷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실이다.
그걸 무슨 거미줄 걷어내는 것마냥 치우며 숲을 돌아다니는 에르제.
1학년 중에서도 꼴찌라는 녀석이 이 정도라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뭐 상관없지만.’
놀랍긴 하나 그렇다고 딱히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녀석은 자신의 위치는 짐작하지도 못한 채 함정이 가득한 숲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중이다.
적당한 함정 하나에 걸려든다면 곧바로 무력화할 수 있다.
‘지금이다!’
그리고 이내, 녀석이 함정 중 하나에 발을 들였다.
줄리오가 회심의 웃음을 지르며 실을 당겼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 까딱했을 뿐이지만 지금쯤 함정에선 꽁꽁 묶인 누에고치가 된 녀석이 포박돼 있으리라.
‘그러게 적진에 들어갈 땐 조심해야지.’
줄리오가 희희낙락 미소를 지으며 에르제가 묶여있을 장소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에르제가 아니었다.
“어?”
적당히 나뭇가지들을 채워 돌돌 말은 망토. 실에 묶여 있는 것은 그 망토였다.
줄리오가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이 느껴졌다.
“큭!”
줄리오가 뒤를 돌았다. 그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오는 비도가 보였다.
그가 다급히 몇 가닥의 실을 자아내 비도를 캐치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오는 두 자루의 비도가 더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상대는 분명 한 명일 텐데 비도는 오른쪽과 왼쪽 양쪽에서 날아왔다.
“제길!”
줄리오가 실을 조종해 계속해서 날아오는 비도를 걷어냈다. 동시에 에르제의 위치를 탐색했다.
그러나 짐작도 가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비도가 날아온 방향에 녀석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비도는 계속해서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어디지!?’
순식간에 둘의 입장이 역전되었다.
분명 처음에는 자리를 잡고 숨어있는 줄리오를 에르제가 찾고 있었지만, 지금은 반대로 숨어있는 에르제를 줄리오가 찾고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에르제는 확고한 실마리를 가지고 줄리오를 찾았지만 줄리오는 에르제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대론 답이 없다.’
줄리오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명백히 불리한 상황이다.
상대는 아직 견제 정도의 공격 밖에 하지 않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시간문제다.
일단은 숨어야 한다. 그런 생각에 그가 천련사를 펼쳤다.
[ 강사(强絲) - 구름바위 ]
마나가 담겨 철과 같이 단단해진 실이 줄리오의 주위에 펼쳐졌다. 그것은 가장 단단한 구의 형태가 되어 줄리오를 감싸 안았다.
일단은 방비를 철저히 한 다음에 반격의 틈을 볼 생각.
그러나.
―푹!
구체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줄리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에르제가 구체의 중심에 숏소드를 꽂아 넣은 것이 보였다.
“대체 언제!”
이렇게 접근해 검을 찔러 넣을 때까지 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줄리오가 경악할 때.
중심을 잘라 실을 모두 흩어버린 에르제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검을 그었다.
줄리오가 반사적으로 실을 들어 막으려 하였으나 구름바위를 만드는 데 이미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실을 사용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고작 한두 가닥의 실뿐이었다.
당연히 그것으로 에르제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고.
―서걱.
에르제의 숏소드가 줄리오의 옷과 표식을 베어냈다.
탈락이었다.
“어떻게…… 시안도 아닌 이런 놈한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는 줄리오의 위에서 에르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엔 승리의 희열 따윈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할 일을 마쳤다는 생각밖에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적색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콰과과광! 우지끈!
데미안과 유설이 있는 그곳에선, 아까부터 굉음과 함께 진동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설을 도우러 가야 한다.
에르제가 숏소드를 품에 갈무리하며 다시 검은 선 안으로 몸을 숨겼다.
* * *
부러진 아만의 검신이 빙그르르 돌더니 흙 속에 푹 꽂혔다.
그 앞에 서 있는 시안. 그리고 시안의 앞에는 눈을 부릅뜬 아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러진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졌다고?”
고전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유명한 검왕의 아들이 아닌가. 망나니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실력 역시 확실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리란 여기곤 있었지만.
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졌다.’
우연찮게, 하수가 뻗은 검이 우연찮게 들어맞아 졌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정면에서 정정당당하게, 아무런 변수 없이 실력으로 패배했다.
시안의 밤의 오러는 자신의 태양빛 오러를 압도하였으며, 반대로 자신의 오러는 시안의 것을 뚫어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검왕의 아들이라고 하나 결국 이제 막 영지를 벗어나 아카데미 생활을 시작한 애송이다.
녀석이 집을 떠나 온 것은 고작 반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전까진 안전한 영지에서 수련만 해왔을 온실 속 화초란 말이었다.
반대로 자신은 가문이라는 온실을 벗어나 야생에 발을 들인 지 이제 3년이 되어간다.
이 경험의 차이는 어설픈 실력으론 메꾸지 못할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시안을 바라보았다.
“…….”
그러나 이미 시안의 눈에선 그에 대한 흥미가 모두 사라진 후였다.
데미안의 사상에 동조하는 이란 점에서 인간적으로도 딱히 끌리지 않는다. 그나마 흥미가 있던 아카데미 1위의 실력도 방금 확인했다.
그가 아만에게 흥미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
‘가봐야겠군.’
저쪽은 어떻게 됐으려나.
시안이 아만에게 등을 돌려 적색 기둥이 보이는 장소로 향했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그 모습에 아만은 무척이나 굴욕을 느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를 악물고 패배의 울분을 삭이는 것밖에는.
시안이 수풀을 헤치며 데미안과 유설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지금 이 순간에도 굉음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마법들이 부딪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장소에선 데미안과 유설이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데미안이 큼직한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휘두르니 허공에 수십의 마법진이 펼쳐지며 콰과과광 터져 나갔다.
수십의 폭발이 유설이 쏘는 얼음비를 모조리 녹이고 파괴했다.
유설의 마법은 데미안을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으나, 데미안 역시 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으며 칼같이 세팅해 놓았던 머리도 흐트러져 있다.
얼굴에도 여유가 없었다.
“시안?”
그리고 도착한 시안을 보고는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아만을 이기고 온 것이냐?”
“예.”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이 끄응 신음을 삼켰다.
그 역시 아만이 시안에게 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시안의 실력이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게 아만을 넘을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에 혼자 시안을 상대하러 가겠다는 아만의 말을 흔쾌히 들어주었던 것이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스락.
뒤쪽에서 켈하자드의 망토를 두르고 숏소드를 꺼내 든 에르제가, 일부러 수풀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줄리오까지 패배했다는 뜻.
눈앞에 보이는 유설과 시안, 그리고 뒤쪽의 에르제.
완전히 포위당한 데미안이 탄식을 하며 지팡이를 놓았다.
퉁, 투르르르―
“졌다. 포기하지.”
그가 적색 깃발을 들어 시안에게 던졌다. 시안이 날아오는 깃발을 캐치했다.
“씁쓸하구나. 설마 3명 다 패배할 줄은.”
어쩌다 보니 팀전이 아닌 개인전처럼 되어버렸다만, 설마 이쪽 팀이 모두 패배할 줄은 몰랐다.
데미안 본인은 유설과 동수를 이루고 있긴 하였으나 동수를 이룬 것 자체를 데미안은 패배라고 받아들였다.
선배로서 후배와 비기는 것은 패배나 다름없었다.
“패배는 씁쓸하구나. 하지만 너의 실력에는 참으로 놀랐다. 이거 참, 후일이 기대되는구나.”
데미안이 시안의 어깨를 툭 치곤 지나갔다.
떠나가는 그를 보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후일이 기대돼? 대체 무슨?
‘역시 뭔가가 있어.’
시합 전의 위화감을 다시 의식하며 시안이 깃발을 품에 넣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나머지 두 팀도 모두 정리하곤, 대회가 종료되었다.
* * *
경기가 끝났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우승자는 1학년만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시안과 유설, 에르제가 속한 팀.
“1학년들이 이겼다고?”
“아만을 제쳤어?”
특히 아만 발자크를 단신으로 쓰러뜨린 시안에 대해선 다들 경악할 정도였다.
신입생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선배들에게 아만 발자크의 이름은 최강과 동의어였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은 학생.
그런데 설마 반년 전에 입학한 신입생에게 저 정도로 압도적으로 패배할 줄은.
심지어 발목만 잡으리라 생각했던 300위의 학생이 2학년 6위인 줄리오를 잡은 일 역시 화젯거리가 되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시안 아그리드, 유설, 에르제. 세 학생은 단상으로 올라오도록.”
총장 제레흐가 직접 세 사람을 불러 상패를 내렸다.
그가 시안의 어깨를 치며 씨익 웃었다.
“역시 믿음직스럽구먼. 파멜라를 찾아낸 것이 우연이 아니었어.”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게 그가 시안에게 얘기했다.
파멜라 드레이크. 그러고 보니 그녀의 수색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자신 때문에 스파이란 것이 들켰으니 크든 작든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그녀를 가호하는 악마는 그 마룡왕이다.
시안으로선 여러모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안의 궁금증을 읽었는지 제레흐가 시안과 다른 두 사람을 보며 얘기했다.
“우승을 했으니 상품을 받아야겠지. 따라오게. 내 직접 비고로 안내하지.”
대회 장소의 정리는 다른 교관들에게 맡기고는, 제레흐가 세 사람을 데리고 아카데미 지하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본관의 지하, 아카데미 비고 안.
그 안에서도 더더욱 깊은 곳의 문이 총장의 손에 의해 직접 열렸다.
다른 보물들보다도 뿜어져 나오는 S급 아티팩트의 존재감을 느끼며 시안이 눈을 빛냈다.
이 안 어딘가에 있을 원시 마법. 당연히 그걸 가지는 것은 안 되겠지만.
‘잘 찾아보면 구경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상품으로 준다던 아티팩트보다도 오히려 그쪽에 더 마음이 쏠리는 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