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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07화 (10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7화

얼음의 비가 실드를 때렸다. 경기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드론드가 심혈을 기울여 펼치고 짜놓은 실드다. 이 정도 요격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로 떨어지는 검은 번개까지 막지는 못하였다.

―콰과과과광!

반구형의 실드가 와장창 깨져나가며 그 사이로 한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그를 보곤 드론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안!”

시안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드론드의 팀이었군.’

아는 얼굴 하나와 모르는 얼굴 둘. 모르는 얼굴 쪽은 둘 다 백색 반지를 끼고 있으며 제 몸만큼 커다란 방패를 한 손에 들고 있다.

곧바로 그들의 작전이 이해가 갔다.

‘버티기만 하다가 마지막 남은 팀을 쓰러뜨릴 생각인가.’

시안도 한 번 생각해 본 적은 있는 작전이다. 하지만 폐기했다.

이치에는 맞지만 너무 상대방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작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드론드를 비롯해 나름 수비에 자신 있는 멤버들을 모아놓으니,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1학년 놈이 어딜!”

“릭, 가자!”

방패를 든 두 사람이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그 뒤에서 드론드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뒤쪽은 어차피 유설이 맡아줄 것이다. 드론드에겐 신경을 끄고 시안이 쇄도하는 두 3학년을 바라보았다.

검과 방패에 각기 은은하게 서려 있는 오러가 보인다.

‘완벽하진 않은데.’

다만 지금의 시안에겐 허술하게만 보이는 오러였다.

파멜라나 헥토르, 염노 등 최근 마스터들과의 싸움만 이어오던 그에겐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안이 흑검에 오러를 피어 올리곤 둘에게 역으로 달려들었다.

“오러!”

“1학년이 쓴다고!?”

3학년들이 시안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오러를 보며 경악했다.

1학년이 오러를 사용하는 것부터 놀랄 일인데, 심지어 자신들의 오러보다 훨씬 또렷하고 명료하다.

수준의 차이가 명확하단 얘기.

그 사실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고 이를 악무는 그들이었으나.

서걱!

“!”

“큭!”

시안의 칼질 한 번에 오러에 덮여있던 방패가 깔끔히 두 동강 났다.

시안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디며 반대편으로 검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막으려 검을 들어 올리는 3학년들이었으나, 방패로도 막지 못한 걸 검으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아악!”

“컥!”

순식간에 두 사람이 나가떨어진다. 시안이 쓰러진 릭에게 다가가 품속에서 청색 깃발을 꺼냈다.

뒤를 돌아보니 드론드는 이미 유설의 아래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그녀에게 다가간 시안이 발밑에 쓰러진 드론드를 잠깐 보았다.

그래도 나름 친한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인데 초장부터 쓰러뜨리게 될 줄이야.

그래도 별수 없다. 이건 그런 경기였으니까.

“에르제를 도우러 가야지?”

“가자.”

유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안이 적색 빛기둥 쪽으로 향했다.

에르제에겐 적팀의 발목잡기를 부탁했다.

뛰어난 은신 능력이 있는 그녀가 적색 팀의 대장을 지속적으로 견제한다면 적팀도 간단히 이쪽에 오진 못하리란 판단이었다.

그 생각은 잘 들어맞아 적색 기둥은 아까 있던 위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어, 움직인다.”

유설의 말에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멈춰 있던 적색 기둥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역시 혼자 발을 묶는 건 한계가 있군.”

“그래도 이 정도나 잡은 게 어디야. 충분히 역할은 한 거지.”

“그건 그렇지.”

시안과 유설이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런데, 적색 깃발을 가지고 도착한 것은 적팀이 아니었다.

“시안!”

에르제가 깃발을 흔들며 활짝 웃는 낯으로 달려왔다.

시안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깃발까지 뺏어올 줄은 몰랐는데.

“혼자 적팀한테서 깃발을 가져온 거야?”

“응.”

에르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시안의 시선이 에르제의 옆머리에 붙어 있는 나뭇잎으로 향했다.

그 시선 덕에 눈치챘는지 에르제가 나뭇잎을 떼어내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별거 없었어.”

생각보다도 든든한 대답을 하는 에르제의 모습에 시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첫 경기가 종료되었다. 정확히는 몇 개나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경기 중 시안이 있는 쪽만 종료됐다.

시안의 팀을 제외하곤 나머지는 아직도 한창 경기가 치러지는 중이었다.

“테일 교관. 교관네 학생들이 아주 잘하는군.”

사역마가 전송하는 경기장 내의 화면을 보며 제레흐가 테일 교관에게 얘기했다.

테일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원체 잘하는 아이니 놀랄 것도 없습니다만…… 에르제 저 아이가 저리 뛰어난 학생인 줄은 몰랐습니다.”

시안의 말을 듣고 혼자 떨어지는 에르제를 보며 테일 교관은 고개를 저었었다.

적팀은 3학년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팀이다.

그런 팀을 상대로 에르제가 조금이라도 버티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버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장을 급습해서 탈락시키고 깃발을 뺏어왔지 않은가?

‘기척을 숨기는 재주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의 은신술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교관으로서 부끄러움이 들기도 하고 뿌듯함이 들기도 하고, 영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가?”

“예. 순위도 한 학기 내내 300위였기도 했고, 애초에 눈에 띄질 않던 아이라…….”

“저 정도 실력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라……. 그게 역으로 저 학생의 뛰어남을 증명하는군.”

“그렇겠군요.”

“1학년만 셋이라 적당히 올라가다 탈락할 줄 알았는데, 저 정도 밸런스면 우승도 노려볼 만하겠어.”

제레흐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는 시안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안드라스 사건에서 활약한 이기도 했고, 파멜라의 건도 전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3학년들 앞에 무릎 꿇을 거라 여겼다. 이번 경기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 팀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팀들도 모두 한 가락 하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래도 아만의 팀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만 발자크. 제국 군부의 총 책임자인 대장군의 손자.

학생 신분인데도 이미 기사의 작위를 가진 학생으로 3학년 1위, 즉 학교에서 가장 강한 학생이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선 데미안, 줄리오와 팀을 이뤄 출전한 학생.

3학년 1위와 2학년 1위, 그리고 2학년 6위.

순위로만 봐도 다른 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강팀이었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재밌는 구경을 하겠다며 기대하는 제레흐.

한편 그들의 입방아에 오른 아만과 데미안 역시 시안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역시 내 아우다! 그렇지 그래. 아그리드의 피가 어디 가는 것이 아니지.”

적으로 만날 상대인데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시안의 활약에 기분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그 옆에서 아만이 찌푸린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저런 힘을 가지고도 제국을 위해 쓰지 않다니. 불경한 녀석입니다.”

“본인도 나름대로 제국을 생각하고 있지 않겠느냐?”

“그럴 거면 우리 제국연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뭐. 다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하하하.”

크게 심려치 않는 데미안을 보며 아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시안의 옆에 있는 유설을 가늘게 쳐다보며 데미안의 귀에 작게 얘기했다.

“이종과 저리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거사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염려는 말거라.”

아만의 진심 어린 충언에 데미안이 살짝 웃었다.

“애초에 큰일은 황궁에 계신 그분들이 행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학생들은 뭘 하든지 간에 별 지장도 없을 거다.”

이미 맹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 등에 타고 있는 것은 차기 황제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1황자와 3황녀. 그들을 따르는 대장군과 재상.

자신들은 그저 곁다리일 뿐이다.

고작해야 학생 신분 따위로 달리고 있는 맹수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이 검왕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저 조용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아만.”

“알겠습니다, 공자님.”

기사의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며 데미안이 웃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이 느낌이 그는 너무나 좋았다.

* * *

다음 경기도 큰 변수 없이 무난히 승리했다.

이번에도 시안은 다른 팀들을 찾아다니며 깃발을 수집했다. 한 마법사로만 이루어진 팀이 언덕 위에서 자리를 잡고 마법을 쏘아대었으나, 세 사람을 모두 합해도 유설을 뚫지 못했다.

그사이 에르제가 몸을 숨기고 언덕을 올라 모두 탈락시켰다.

근접 전투에 자신이 없던 마법사 학생들은 은신을 한 채 다가오는 에르제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나머지 두 팀은 전열과 후열이 밸런스 있게 섞인 일반적인 팀이었는데, 그들 역시 시안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했다.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마룡왕부터 시작해서 방학 때 마스터급의 이들과 몇 번이나 싸워왔던 일.

이미 시안은 학생 수준에선 한참 멀어져 있었다.

‘아직 모자라.’

그럼에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 정도론 모자란다. 고작 또래들보다 뛰어난 정도로는 가주와 견주려면 멀고 멀었다.

‘2학기부터는 외부 의뢰가 더 많아진다 그랬지.’

1학기 때는 적응 기간인 것도 해서 외부로 나갈 일이 많지 않다.

정화교단의 의뢰로 구울 토벌을 시행한 일이나 현장 학습으로 블라텐 용병단을 보러 간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많다고 할 수도 없었다.

2학기가 되면 외부 활동이 더 많아지고,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되면 몇 개월씩이나 학교 밖에 나가 있는 일도 있다고 한다.

물론 교내에도 아직 강한 교관들은 많다. 하이마스터인 총장도 있었고.

하지만 외부 활동이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라는 한정된 공간보단 넓은 세상 쪽이 훨씬 얻을 것이 많지 않겠는가.

“자, 결승전 준비를 하도록!”

그리고 이윽고.

대기 시간이 끝나고 결승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올라온 4개의 팀이 치르는 경기. 시안의 눈이 한 곳을 향했다.

“…….”

“…….”

마침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아만과 눈이 마주쳤다.

교내 1위의 학생.

‘그러고 보면.’

새삼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3학년 1위의 학생의 이름은 그가 알기로 아만 발자크. 발자크라고 하면 그 대장군의 가문이다.

대장군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마 손자나 조카손자, 그쯤 될 테지.

‘데미안과 대장군의 손자가 같은 팀이라고?’

둘 모두 제국연이니 그 인연으로 한 팀이 된 것이라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약간의 위화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데미안의 오르커스 가는 3황녀의 파벌이고 아만의 발자크 가는 1황녀의 파벌이다.

서로 다른 파벌의 자제들이 저렇게 가까이 지낸다고?

무시할 만한 위화감은 아니다.

혹시 황실 내부에서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위화감 자체는 머릿속에 넣어둔 채,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결승전을 시작한다!”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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