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4화
시안이 헥토르와 함께 에버웨일로 돌아왔다.
익숙한 도시의 정경을 보며 그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오히려 이곳이 더 편하네.’
영지에 있을 때보다 이곳이 더 고향 같았다.
아그리드 영지에서 십수 년간 살아오긴 했으나 그때는 염노와 작은 저택에만 갇혀 살았다.
실질적으로 영주성에서 지냈던 기간은 이번 방학 기간이 전부.
그보다는 반년을 있었던 에버웨일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 나도 기숙사로 들어가나?”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어헤친 헥토르가 그리 물었다. 염노의 시선이 사라진 직후 곧바로 타이를 끌러 버린 녀석이었다.
단정함의 상징인 집사복을 입고 있는 주제에 타이는 풀어헤친 모습이라니.
“학생 기숙사는 안 되고, 아카데미 내에 개인 사용인을 위한 숙소가 따로 있다. 거기 들어가면 된다.”
“하인들이랑 같이 살게 되는 건가…….”
“하인 말고도 호위 기사들이 묵는 일도 있다. 너 같은 집사들이 묵기도 하고.”
“호.”
그렇게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 있다니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며 헥토르가 희희낙락했다.
녀석이 이 지상에서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지루하던 지옥의 생활보다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것. 그런 의미로 사용인 전용 숙사는 적적할 것 같진 않았다.
“새로운 사용인을 데려오셨군요. 방이 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카데미의 직원에게 데려가자 그가 서류를 보며 펜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시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사용인 숙사가 가득 찼나? 저번 학기 땐 절반 정도밖에 안 찼던 거 같은데.”
“그게 말입니다, 이번 학기엔 유독 호위를 데리고 온 분들이 많아서요.”
“호위?”
“아마 시험 때 있었던 사건 때문에 경각심이 높아진 게 아닐까 합니다.”
아아……. 직원의 추측에 시안이 납득했다.
안드라스가 수백의 와이번과 리자드맨을 소환해 투척했던 1학기 시험 때의 사건. 심지어 마룡왕까지 등장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단 한두 명이라도 호위 기사를 더 붙여 보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 여기 남는 자리 있네요. 따라오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정원이 다 찬 것은 아닌지 직원이 화색을 지었다.
시안이 턱짓으로 헥토르에게 그를 따라가라 시켰다.
“간다.”
“그래.”
헥토르가 제 짐을 들고 손을 흔들며 직원의 뒤를 따랐다.
집사복을 입고 있는 녀석이 도련님에게 서슴없이 반말을 하는 것을 보곤 직원이 눈을 크게 뜨긴 하였으나, 뭐라 물어오지는 않았다.
직원과 헥토르를 떠나보내고 시안은 혼자서 기숙사로 향했다.
주로 소메르 제국의 학생들이 묵는 사파이어관. 사용인 숙소가 꽉 들어찼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도 이미 들어와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며 시안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학 내내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방이지만, 기숙사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모두 깔끔히 청소해 놓았기에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았다.
“후우.”
그가 기숙사 침대에 뛰어들었다. 탄력 있는 매트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거인왕.’
아틀란타가 했던 얘기. 그 말이 사실이라면 거인의 왕이라는 작자 또한 살아 있다는 말이다.
아마 녀석처럼 봉인된 상태로.
‘장소는 거인들의 무덤 깊숙한 곳에 있겠지.’
아틀란타가 왜 벤델 영지에서 봉인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인왕의 최후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대 전쟁에서 거인들은 다종족 연합에게 밀려 동쪽 땅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전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인왕이 잠들어 있을 만한 장소는 동쪽의 거인들의 무덤 외엔 없었다.
‘혼자 다니긴 좀 위험한데.’
거인왕을 찾아보고는 싶다. 놈도 네메시스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라비에 대해서도 짐작 가는 것이 있겠지.
다만 혼자 놈을 찾아보러 가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적어도 심상세계를 열어 마스터에 발을 들인다면, 헥토르를 데리고 떠나볼 수 있지 않을까.
‘마스터.’
일단 그것에 오르는 것이 먼저다.
이미 턱밑까지 도달했단 자각은 있었다. 단 한 걸음, 문턱 하나만 넘는다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하나가 문제였지만.
‘……일단 수업부터 듣고.’
시안이 눈을 감았다.
이제 곧 다시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었다.
* * *
―드르륵.
시안이 1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잠시 멈추며 침묵이 내려앉나 싶더니.
“시안!”
“잘 지냈냐?”
이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웃으며 다가오는 동급생들. 그들에게 화답을 하며 시안이 자리에 앉았다.
새삼 입학식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인사를 하는 아이는커녕 멀찍이서 수군대던 이들밖에 없었는데.
“방학 때 어떻게 지냈냐?”
“어디 여행은 갔어?”
“아니. 거의 영지에만 있었는데.”
벤델 영지에 가긴 했었지만 그건 여행이 아니라 임무 때문이었다.
“그 긴 방학을 집에서만 보냈단 말야?”
“수련할 시간도 없어.”
“……독하다 독해.”
그리 얘기하다 시안이 슬쩍 뒤쪽을 바라보았다.
수련이라고 하니 란이 떠올랐다. 녀석은 방학 동안 제대로 수련을 했으려나.
“…….”
시안이 쳐다보자 란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피하는 것 자체는 입학식 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전만큼 까칠한 모습은 없었다.
그리고 더욱 뒤쪽에는 에르제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손을 흔들어왔다.
그 직후, 앞문이 열리며 테일 교관이 들어왔다.
“오랜만이다, 다들 잘 지냈냐?”
“예.”
“교관님도 잘 지내셨죠?”
“나도 뭐 푹 쉬다 왔지.”
정말로 잘 쉬고 온 것인지 테일 교관은 얼굴이 갈색으로 타 있었다. 여름휴가는 확실하게 즐기고 온 모양이었다.
잠시 잡담이 이어졌다. 내용은 당연히 방학 동안 어딜 갔다 왔는지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테일 교관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본론이란 다름 아닌 수업에 대한 공지.
“잠깐 나와보거라. 본관 앞 강당에 집합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학생들의 의문 부호를 띄우면서도 테일 교관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강당에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1학년은 물론 2학년과 3학년, 전원이 모인 자리.
그리고 앞쪽 단상 위에는 학원장 제레흐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흐 총장.’
천도맹의 일원인 3명의 하이마스터 중 하나.
그에게도 파멜라의 정보는 들어갔을 테지.
시안이 고개를 돌려 아는 얼굴을 찾아보았다.
선배들 중에는 데미안과 줄리오가 보였다. 그 외에는 한두 번 얼굴을 마주친 정도인 유설의 언니 유연과 비스트 길드의 리더인 쿠르간.
동급생 중에는 다른 반인 알렌과 유설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과 레이나, 드론드도 환한 얼굴로 서 있었고.
눈이 마주치니 모두 살짝 인사를 해주었다. 홱 고개를 돌린 줄리오만 빼고.
“다 모였는가.”
학생들이 다 모인 듯하자 제레흐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총장이 직접, 학생들을 다 모아놓고 얘기를 하는 거지?
의아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제레흐가 음성증폭기로 얘기했다.
“우리 학교가 이렇게 전 학생이 다 모이기가 쉽지가 않지. 학기가 시작되면 다들 의뢰다 수업이다 바깥으로 나도니까 말이야.”
특히 고학년일수록 그것은 더 심하다.
갓 입학한 1학년 1학기 때도 몇 번이나 교외 수업이니 현장 수업이니 내보내는 학교다.
2학년, 3학년 학생들은 학기 중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바깥에서 의뢰를 수행하는 학생이 더욱 많을 정도였다.
“이렇게 학기 초나 시험 기간 정도가 아니면 모일 수가 없어.”
맞는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시험 기간이라도 모이기가 쉽지가 않다.
중간에 빠질 수 없는 의뢰를 하고 있어 시험을 나중에 치르는 3학년들도 몇몇 있기 때문이다.
‘저번 학기 시험 때도 몇 사람은 없었다고 그랬었지.’
결국 학기 중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자리는 학기가 막 시작한 지금 정도였다.
‘선후배들을 다 섞어서 뭘 할 생각인가?’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가능성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한 번쯤은 학년은 무관하게 대항전을 해볼까 하네.”
대항전?
그 말에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왔다.
대항전이란 이름 자체는 익숙하긴 했지만, 학년과 무관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럼 자세한 일정과 규칙을 말해주지. 아, 그리고 보상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제레흐가 웃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방학이 끝나자마자 바로인가…….’
수업보다도 애들끼리 싸움을 붙일 생각에 씨익 웃는 제레흐를 보며 시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 * *
총장이 얘기한 룰은 간단했다.
학년 무관하게 자유로이 3명씩 팀을 이뤄 경기를 실시한다.
학년과 무관하단 말은 말 그대로 3학년끼리 팀을 이뤄도 좋고 1, 2학년을 섞어도 좋다는 뜻이었다.
누가 됐든 간에 본인이 짤 수 있는 가장 강한 팀을 짜 경기를 치른다는 얘기.
보상은 일전에 그레이트 힐에서의 수업으로 받았던 것과 비슷했다. 아카데미 지하 비고를 개방하여 아티팩트를 준다고 한다.
단 이번엔 더욱 높은 등급의 물건을.
‘S급은…… 당연히 안 되겠지.’
아카데미에 있다는 S급 아티팩트 ‘원시(元始) 마법’. 준다고 한다면 그게 가장 갖고 싶지만 아마 이건 안 될 것이다.
제레흐가 유달리 신경 쓰는 물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마룡왕이 노리는 물건이다.
그걸 아는 제레흐가 학생의 손에 맡길 리가 없었다.
‘그래도 1등은 A급까지 가능하다고 하니까.’
그 정도만 돼도 불평할 이유는 없다.
A급 아티팩트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가 사용자의 목숨을 수십 번은 구해줄 수 있을 그런 물건들이 가득하니까.
“시안! 대항전 팀 어떻게 할 거야? 누구 팀에 들어가기로 했어?”
“시안 아그리드! 3학년의 록스라고 하는데, 혹시 팀은 이미 정했니?”
“우리랑 같이하자!”
제레흐의 말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 벌써부터 팀 짜기가 시작되었다.
시안의 주위로도 많은 인파가 쏠렸다.
1학년이라곤 하지만 1위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 2학년 6위인 줄리오를 쓰러뜨린 일도 알음알음 퍼져 있는 상태였기에 1학년이라고 무시하는 선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우야! 이번에야말로 우리 제국연이 힘을 보여줄 때다! 제국연 출신들로 1, 2, 3위 전부 먹어보자꾸나!”
데미안이 잽싸게도 시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며 친분을 과시했다.
그러면서 주위를 스윽 둘러보는 것이 시안을 데려가려 모여든 선배들을 견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시안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헬레네 황녀랑은 잘 화해한 모양이군.’
평소처럼 기분이 좋은 것을 보니 헬레네와 얘기가 잘 풀린 모양이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으로 끌려가는 걸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뭐 그런 그렇고.
“제국연에 들어간 기억은 없습니다만…….”
시안이 어깨에 올려진 데미안의 손을 내려놓으며 얘기했다.
데미안과 팀을 이루는 것. 그다지 메리트가 없는 일이다.
선배와 팀을 이루겠다면 차라리 3학년에 더 강한 선배를 찾아보는 것이 낫고, 애초에 데미안이나 제국연 무리와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언젠가 아그리드가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입장에선 제국의 고위 귀족들과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뭐냐? 설마 이미 마음에 둔 선배가 있단 말이냐? 유연이나 그 쿠르간 놈은 아니겠지?”
데미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의 말에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팀은 제가 알아서 짤까 합니다.”
남의 팀에 들어가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승률이 높을 거란 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