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03화 (103/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3화

파멜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산책이나 할까 해서요.”

잘 웃을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시안을 보면, 뱃속이 뒤틀리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참기 힘들었다.

마룡왕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만 해도 이미 그러했는데, 심지어 이번 여정으로 놈에게 정체까지 들켜 버렸다.

대체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헥토르를 구워삶아 첩자로 보냈던 것 때문에.

그건 그녀에게 있어 치명적이었다.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는다. 정화교단에서 쌓아 올린 지위도, 동료도, 추억도.

여동생과의 시간조차도.

“불침번을 기절시키면서 가는 게 산책인가?”

“기절이라뇨, 전 모르는 일인데요?”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다 봤는데 뭘.”

시안이 딱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염노와 헥토르. 그 두 사람이 파멜라를 포위하는 형태로 섰다.

“솔직히 반신반의였습니다만…… 이런 돌발행동을 보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군요.”

염노가 굳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진짜라니까. 할아범은 내가 아니라 저 여자를 의심했어야 돼!”

“너도 아직은 의심 대상이다.”

“쳇!”

투덜거리는 헥토르에게 한 마디 던지곤 염노가 다시 파멜라를 보았다.

그의 손엔 이미 검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완벽한 전투태세란 뜻이었다.

“…….”

파멜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염노, 헥토르, 시안. 셋 다 마스터급은 되는 실력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포위당한 이상 도망칠 길은 요원해 보였지만.

“당신들은 저를 잡을 수 없어요.”

파멜라가 검을 들었다.

시안은 그녀의 목덜미에서 눈에 익은 것을 보았다. 역린. 안드라스의 목에도 나 있던 그것이 그녀의 목에 자라나고 있었다.

‘사도라고 하더니 숨길 수 있던 모양이군.’

안드라스는 자력으로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의료용 밴드 따위로 숨기고 있었었다.

그녀는 숨기는 것이 가능한 모양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정화교단에서 첩자질을 하고 있었겠지.

“용린갑(龍鱗甲).”

그 역린을 시작으로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의 피부, 그리고 갑옷 위까지 자라나며 단단히 그녀를 감쌌다.

순식간에 용의 갑옷을 입은 그녀가 검을 크게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잡으라고 되어 있는 투 핸디드 소드를 한 손으로, 무슨 나뭇가지 휘두르듯 가볍게.

이내 그 검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화교단의 신성검술을 익혔을 때 나오는 빛의 오러. 그러나 거기에 검은 기운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이, 물과 기름처럼 혼합되지 않은 채 뒤섞인다.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도련님!”

염노가 시안의 앞으로 뛰어들어 막아주었다. 그 시각에 헥토르는 파멜라의 뒤를 쳤다. 시안 역시 창해를 휘둘러 검격을 피해 그녀를 베어 들어갔다.

콰과과과과광!

네 사람의 갖가지 기운이 뒤엉키며 천지가 진동했다.

짙은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속, 시안의 눈에 연기 속 파멜라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쯧.”

시안이 혀를 차며 지체 없이 뛰었다. 검을 휘둘러 먼지를 흩어내었다.

그 안에서 파멜라는 흑백의 기운을 뭉쳐 소환진을 만들어내었다. 거기선 일전에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것보다도 훨씬 큰, 작은 용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커다란 와이번이 나타났다.

그녀가 날아올랐다.

“잡아!”

염노의 불꽃이 하늘을 뒤덮고 헥토르의 뇌격의 창이 그 가운데를 찔러 들어갔다.

뛰어오른 시안이 크게 검을 그었다. 상천검, 참.

콰아아아앙!

파멜라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마룡왕의 힘을 한껏 받은 그녀가 그 기운을 아낌없이 폭사해 모든 공격을 흩어내었다.

쿨럭.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덕분에 그녀가 탄 와이번은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젠장!”

잡을 수 없다는 말은 이 뜻이었나!

아무리 이 일행이라도 기동력의 차이는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말을 타고 도망가는 것이었다면 대륙 끝까지 추격하겠지만, 와이번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시안 아그리드.”

펄럭이는 와이번의 날개에서 발생한 강풍이 일대의 흙과 나무를 강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시안이 파멜라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동생은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와 제 왕을 걸고 맹세합니다.”

“…….”

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한마디 더 하고 싶은 듯 입을 벌렸지만, 이내 꾹 다물었다.

그러곤 와이번을 타고 밤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도, 도련님!”

“어떻게 된 겁니까? 단장님은 대체!”

뒤늦게 소란을 듣고 기사들과 사제들이 달려왔다. 늦게 오긴 했다지만 그들도 볼 건 다 보았다.

파멜라가 혼탁한 기운을 사용해 와이번을 소환하고, 그걸 타고 서쪽 하늘로 사라지는 모습을.

그들 사이에서 시안이 잔뜩 눈을 찌푸렸다.

이번 여정은 성공하긴 했다. 벤델 영지의 칠흑마탑을 초토화시켰고 놈들이 거인을 데리고 꾸미던 음모를 시작하기도 전에 망가뜨렸다.

칠흑마탑의 지부장인 이덴도 죽였다. 그는 해령궁주의 사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파멜라를 놓친 건 뼈아팠다.

‘더 대비가 되어 있었다면.’

못 잡을 게 아니었다. 미심쩍음에 헥토르를 이용해 감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쯤 확신하고 대비를 해놨더라면.

그랬다면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갑시다. 가서 할 얘기가 아주 많군요.”

시안이 뒤를 돌았다.

파멜라는 이미 놓쳤다. 일행이 타고 온 말만으론 놈을 추적할 수 없다.

와이번을 추적할 만한 방도를 가져온다고 해도, 그 시간에 이미 파멜라는 행방을 감출 것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도련님?”

“예정대로 영지로 복귀하고, 그리고.”

파멜라의 정체. 그것에 대해 가장 먼저 얘기를 나눠봐야 할 곳은 당연히 거기겠지.

“클로드 탑주와 얘기를 해봐야겠어.”

천도맹의 일원이라고 하던 클로드. 그를 다시 만나 볼 필요가 생겼다.

* * *

영지로 돌아왔다. 파멜라의 일을 듣고 샤밀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증인이 너무 많았다.

“아…….”

기사들뿐만 아니라 사제들까지 얘기를 하니 믿기 싫어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샤밀라는 방에 틀어박혔다. 체샤가 그녀를 달래주고는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은 맹 쪽엔 얘기를 해놓았네. 추적이 들어갈 게야.”

클로드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다. 설마 천도맹 내에, 그것도 정화교단의 기사단장이라는 높은 지위의 인물이 스파이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공자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로 의외로구만.”

“그 정도로 신심이 깊은 여자였습니까?”

“그보다는…… 여동생을 두고 그렇게 도망갔다는 사실이.”

그걸 듣자 파멜라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 떠올랐다. 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말이.

“그런 말을…….”

“그녀의 말을 믿고 믿지 말고는 알아서 판단할 문제입니다만.”

샤밀라가 정말 관련이 없는 건지는 판단할 근거가 없었다.

현재 그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체샤였는데, 라비를 체샤에게 붙여 감시를 해보았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파멜라의 맹세가 정말인 것인지…….

덧붙여 가주에게 이번 일을 보고할 때.

“거인을 보았나?”

그가 그렇게 물어왔다. 이덴이 거인에 대해 소리치는 것을 염노가 들었기에 가주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간 것이다.

‘거인이란 말이 대체 무슨 소린지 묻는 게 아니라, 거인을 보았는지 묻는군.’

가주의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거인의 존재를 알고 있던 것처럼.

‘벤델 영지에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겠지만.’

봉인된 거인이 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예. 제가 보았을 땐 힘을 잃고 이미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놈이 죽여 달라고 했던 것도, 그래서 자신이 놈을 죽인 것도. 심장을 회수한 것도 모두 숨겼다.

물론 놈이 얘기한 네메시스란 존재에 대한 것도.

시안이 가주에게 보고한 것은 정말로 단락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그 일은 당분간 함구하도록.”

“……알겠습니다.”

함구 명령을 듣곤 시안이 영주성의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문을 닫고 나오며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당분간, 이라…….’

가주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후로 며칠이 더 흐르고 정화교단의 기사들이 더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샤밀라가 영지를 떠났다.

혹시 몰라 클로드까지 호위로 함께 붙었다. 중간에 파멜라가 샤밀라를 데려가기 위해 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갔네요.”

“그러게.”

모든 손님이 떠나가고 영지에는 본래 있던 사람들만이 남았다.

조용해진 영지에서 시안이 방학 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그동안 얻었던 것들.

뇌력천주의 힘을 받았던 본래의 헥토르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의 힘이 마스터에게도 충분히 통한다는 뜻이었다.

‘아직 심상세계가 열리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게 가능했던 것은 마룡왕과 조우하면서 익혔던 그것 때문이겠지.

그 외에 강림한 뇌력천주에게 족쇄를 채웠고, 놈의 기운을 일부 흡수해 뇌명을 얻었다.

뇌명 자체는 쓸만한 아티팩트가 하나 더 생긴 정도. 하지만 뇌력천주를 묶은 것은 컸다.

‘녀석도 못해도 마스터급은 되니까.’

본인 말론 지옥에 있는 본신에 비하면 훨씬 약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본래의 헥토르보다는 셀 것이다.

그런 녀석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주의 사람이 아닌 나의 사람.’

그 점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비록 기사들과 같은 충성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 지옥의 법칙으로 묶인 관계라곤 할지라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거인의 심장.

―두근.

아직도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거인의 심장에서 얻은 마나는 자신의 마나와는 크게 이질적이었다.

자유로이 흐르고 찢어지고 합쳐지는 스스로의 마나와 달리 거인의 마나는 무척이나 단단했다.

인간의 마나만큼이나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았고 놔두면 계속해서 가라앉는 성질이 있었다.

그러나 묵직하고 단단했다.

‘…….’

수련장. 시안이 홀로 검을 휘둘렀다.

상천검, 참.

거인의 마나를 담은 검이 연병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두두두두―!

대기가 떨려오며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쩌적 갈라졌다.

‘이 기운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야겠어.’

다루긴 어렵지만 확실히 위력은 있다.

얼마 안 남은 방학 기간을 시안은 오로지 수련으로 채웠다.

염노와 매일같이 대련을 하였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작은 저택에서 단둘이서 해오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련님, 한 수 부탁드립니다!”

염노와 대련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단련 중인 기사들이 찾아와 끼어들었다.

앤디를 필두로 다른 기사들 역시 시안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빌프리트도 일이 없을 때 가끔 찾아와 검을 나누고 갔고 체샤도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나고.

“도련님. 다시 떠나시는군요.”

“방학 끝났으니까 가야지.”

“영지도 쓸쓸해지겠군요. 도련님 덕에 북적북적한 느낌이었는데요.”

“나 하나 있다고 그럴 리가.”

방학이 끝났다. 영주성의 입구에서 시안이 염노의 배웅을 받았다.

“그런데…… 그 녀석은 꼭 데려가셔야 합니까?”

염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시안의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그와 같은 집사복을 입은 헥토르가 있었다.

목 끝까지 단단히 조인 넥타이를 불편하다는 듯 매만지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