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2화
염노와 앤디가 보는 상황은 최악이었다.
파멜라는 흑마법사로 보이는 이를 붙잡고 있긴 하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헥토르가 시안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헥토르를 데려온 것이 실수는 아닐까 항상 경계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눈앞에 보고 나니 머리카릭이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파멜라가 보는 상황 역시 최악이었다.
시안을 제압한 것은 좋았으나 보는 눈이 많은 것이 문제였다.
시안 하나 정도라면 그냥 슥삭 하고 시체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 버리고 끝내겠지만, 염노와 기사들까지 나타났다.
그들 앞에서 그녀는 어디까지나 흑마법사의 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날 의심하나……?’
그 와중에서도 시안이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이 된다.
맨 처음 이덴과 헥토르와 함께 나란히 이 장소에 들어왔을 때, 그 한순간 때문에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시안이 보는 상황은 썩 나쁘지 않았다.
‘헥토르에 대한 것만 해결하면 뭐.’
염노와 기사들이 목걸이가 풀리고도 자신의 말을 따르는 헥토르를 어찌 볼 것인가.
그것만 대충 해결한다면 이 상황은 그에게 누구보다도 유리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이는 염노이며 놈들은 헥토르를 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헥토르의 기습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 어쩐다…….’
문제는 그 한 가지. 헥토르에 대한 염노와 기사들의 시선.
서로가 서로를 붙잡은 인질 덕에 묘한 대치가 이어나가고 있을 때 시안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야,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저 위에서 할아범이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뭐라도 좋으니까 빨리 좀 해주면 안 될까? 저 시선만으로 뒤통수가 홀라당 타버릴 거 같아.”
오래 끌 수는 없다.
‘일단 상황부터 어떻게 하자.’
시안이 헥토르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것에 녀석이 조용히 수긍하더니, 잠시 후 상황이 진행되었다.
“앗!”
시안이 헥토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손바닥으로 턱주가리를 올려쳤다.
빠악! 심상치 않은 소리가 유적 내에 울려 퍼졌다.
헥토르의 원망스러운 눈빛이 시안을 향했다.
‘너무 세게 때렸잖아!’
‘네가 꺾은 내 팔도 아팠어.’
눈물을 찔끔거린 헥토르가 손바닥에서 전격을 만들어 시안에게 던졌다. 그것에 시안이 잠시 움츠린 사이, 녀석이 이덴 쪽으로 달려들었다.
“됐다!”
“도련님이 풀려나셨다! 다 잡아!”
염노와 기사들이 때는 이때라 아래로 뛰어내렸다. 오러를 피어 올리며 달려드는 기사들과 무엇보다 염노가 만들어낸 붉은 불꽃에 파멜라와 이덴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특히 불꽃 쪽은 염노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처럼 천장을 가득 덮을 정도로 컸다.
일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하지만 이놈들은 포기할 수밖에.’
‘파멜라 이년이라면 날 배신하는 건 일도 아니다.’
파멜라가 검을 들어 올렸다. 단단하게 결집된 마나가 그녀의 검을 더욱 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헥토르가 발을 굴러 전격을 일으켰다.
“!”
“……!”
넘실거리는 전격의 파도는 이 자리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에게 향했다.
이덴. 이 유적에 몰래 숨어들어 일을 꾸미던 그 흑마법사에게.
“뭣……!”
파멜라라면 몰라도 설마 헥토르에게 배신당할 줄 몰랐던 그가 기겁을 했다.
그가 순간적으로 해령궁주에게 받은 힘을 끌어올렸다. 그 손에 궁주의 기운이 뭉쳐 들었으나.
콰과과과과광!
“끄아아아악!”
이런 상황에서 헥토르의 전격과 염노의 불꽃을 양쪽에서 받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염노의 눈길이 날카롭게 헥토르를 살폈다.
뇌력천주라는 이름에도 무색하게 헥토르는 염노의 눈빛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염노는 헥토르보단 이덴을 붙잡는 데 더욱 주력했다.
염노, 헥토르, 그리고 연기 중인 파멜라까지.
이덴은 해령궁주의 힘을 제대로 끌어올리지도 못했다.
‘와봐.’
시안이 조용히 처맞고 있는 이덴을 응시했다. 해령궁주. 그놈이 조금이라도 이덴의 몸에 직접 강림하는 것 같으면 자신이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해령궁주가 분노에 가득 찹니다.]
[거칠게 땅을 구르며 뒤로 돕니다.]
베리엄 때와 마찬가지로 놈은 시안의, 정확히는 라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틀란타의 기억에서 보았던 해령궁주. 놈은 거인족을 끌어들여 네메시스란 존재를 처치했다.
그 이유는 프시케가 이미 얘기한 바 있었다.
악마는 보다 상위의 존재에게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하극상을 위해서 지상의 인간을 이용한다고.
그것과 같은 논리로 해령궁주는 거인을 이용해 네메시스를 죽였다.
그리고 라비는 그런 네메시스와 모종의 관계가 있어 보이는 존재.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커어억―!”
결국 해령궁주는 이덴을 버리고 떠나갔다. 모처럼 구한 ‘쓸 만한’ 인간이었음에도 돌아서는 걸음에 한 점 망설임이 없었다.
헥토르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왜냐면 자기 자신이 바로 아무것도 모르고 강림했다 붙잡힌 피해자가 아닌가.
인간 하나를 위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한다면 악마라 불리지도 않을 것이다.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다치신 데는요!”
“없어. 괜찮아, 염노.”
처참한 이덴에게 마무리를 날린 염노가 시안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몸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시안이 이덴을, 정확히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시체를 보는 파멜라를 바라보았다.
“파멜라.”
“……! 예, 뭐죠?”
파멜라가 흠칫 놀라더니 시안을 보았다.
제 발이 저려 덜덜 떠는 그녀를 보곤 시안이 웃으며 얘기했다.
“덕분에 벤델 영지에서 말썽을 부리려던 흑마법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 하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시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흑마법사란 사실은 시안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하필 마룡왕의 사도란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그리드 영지로 왔었던 게 우연이 아니었어.’
시기를 따져보자면 아마…… 헥토르의 사건 때문에 온 것은 절대 아니니 에버웨일에서의 사건 후에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 마룡왕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그 때문에 아그리드 영지로 온 것이 아닐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씁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관찰하는 시안.
“나는 적이 아닙니다! 보셨잖아요, 흑마법사 기습한 거!”
“닥쳐! 네놈이 도련님을 붙잡고 있는 걸 다 봤는데!”
“그 도련님 명령으로 잠깐 연기하고 있던 거라고요! 진짜예요!”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을 두고 한쪽에선, 헥토르와 기사들의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 * *
그 후 일행은 곧바로 흑마법사의 아지트로 쳐들어갔다. 거기엔 세 명의 흑마법사 외에도 몇 명의 흑마법사들이 더 있었다.
그들 모두 염노의 불꽃은 물론 기사들의 오러에조차 대항하지 못했다.
염노와 기사들이 흑마법사 잔당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시안은 헥토르와 함께 줄리오가 감금된 장소로 찾아왔다.
헥토르가 입구를 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드르륵 옆으로 밀었다.
“누, 누구야!”
“나.”
“헉! 시안!”
시안이 들어가 줄리오와 아델하이트의 기사들을 묶은 줄을 모두 잘라내었다.
“고, 고맙다.”
“별거 아냐.”
시안에게 겸연쩍게 감사 인사를 하던 줄리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너! 대체 무슨 노예를 데리고 온 거야! 그놈 배신자였다고!”
“노예라면 얘 말인가?”
시안의 손짓에 바위를 열었던 헥토르가 뚱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줄리오가 헥토르를 보더니 파르르 떨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래, 얘!”
“배신자 아니다. 내가 연기하면서 정보 좀 빼내라고 보낸 거거든.”
“뭐, 뭐? 네가 보냈다고?”
“배신자가 아니라 첩자였단 말이지.”
줄리오가 멍한 표정으로 헥토르와 시안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첩자로 보낼 수 있는지 그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았다.
시안의 말은 즉 자신들이 붙잡힌 것 역시 시안의 탓이란 말 아닌가!
“내 탓이긴. 네가 약하니까 붙잡힌 거지.”
“큭!”
항변해 보았으나 당연히 그가 원하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안의 말에 줄리오는 대꾸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헥토르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자신들은 붙잡혔다…….
“도련님, 모두 처리했습니다.”
“챙길 거는?”
“다 챙겼습니다.”
염노의 말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트도 찾았겠다, 흑마법사 녀석들도 다 잡았겠다, 더 볼일은 없었다.
“돌아가자.”
영지로 돌아갈 때였다.
* * *
“불편한 거 없으시죠?”
“예, 그럼요.”
돌아가는 길, 시안이 파멜라에게 물었다.
파멜라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어색한 미소였다. 그녀는 이번 여정의 목적을 단 하나도 이뤄내지 못했다.
시안 아그리드가 칠흑마탑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하는 걸 실패했다.
그곳의 물건을 싹 털렸을 뿐만 아니라 지부장은 물론 거인까지 허무하게 죽었다. 이덴은 그렇다 쳐도 거인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뼈아팠다.
시안 아그리드가 어째서 마룡왕의 주목을 받는 것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녀가 본 시안은 과연 비범하긴 하였으나 그것이 마룡왕이 눈독 들일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격렬한 전투가 있던 것도 아니기에 알아낼 기회조차 없었다.
헥토르가 왜 배신을 했는지에 이르러선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굳이 한 가지를 들어보자면, 20년간 천둥마탑에서 지내면서 이들에게 감화되었다…… 라는 이유 정도가 떠올랐다.
마룡왕이나 해령궁주와는 다르게 헥토르의 주인인 뇌력천주는 칠흑마탑에 딱히 미련이 없는 이였으니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켰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마룡왕의 사도란 것을 시안에게 들켰다.
돌아오는 내내 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헥토르가 당연히 칠흑마탑의 편인 줄 알고 정체를 드러냈으니까.
그 헥토르가 사실 시안의 첩자였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자신의 정체는 시안에게 모두 까발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아니, 옳고 그르고 이전에 100%다.
‘이대론 안 돼.’
그녀의 눈이 가라앉았다. 무슨 일인지 시안은 아무 말도 걸어오지 않았지만 타임리미트는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이 아그리드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때까지 뭔가 수를 내야 한다. 아그리드에 도착하게 되면, 그 베르페드가 도사리는 장소에 들어가게 되면.
그땐 도망칠 수 없다.
―부스럭.
그날 밤.
노숙하는 일행들 사이에서 파멜라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일행 중 혼자 여자였으므로 자는 곳이 혼자 떨어져 있었다.
즉 도망치기엔 최적의 위치.
잠시 조용히 일행들 쪽의 기색을 살폈다.
모두 자고 있다. 기사도 사제들도. 모닥불 앞에서 불침번인 기사 하나가 불을 보고 있는 것을 제하면 모두 곯아떨어져 있었다.
툭.
“……!”
그리고 기사 하나 조용히 제압하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기사의 입을 막고 뒷목을 쳐 기절시킨 그녀가 기사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련의 과정에서 조금의 소음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미리 싸둔 짐을 챙겨 들고 뛰었다.
‘앞으로의 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고.’
지금은 도망가자.
그녀가 별빛 내리는 밤하늘 아래를 달렸다.
그때.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시안 아그리드…….”
달빛을 등지고 나타난 그는, 아그리드의 장남 시안 아그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