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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01화 (101/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1화

시안의 검이 아틀란타의 몸을 갈라내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생명력이 급속도로 꺼져가는 녀석의 눈.

그럼에도 아틀란타는 저항 한 번 하지 않았다.

얌전히 사슬에 묶인 채로 있었을 뿐.

‘이게 심장인가?’

그런 녀석의 가슴 속에 커다랗게 빛나고 있는 보석이 있었다.

짙은 바다색의 보석이 마치 나뭇가지와도 같은 무언가에 휘감겨 반짝이고 있다.

시안이 조용히 그 빛을 쬐며 기운을 살폈다.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시안을 적대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냥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시안이 그 보석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

시안의 뇌리에 기억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방대하게 흐르는 기억은 환상을 만들어내 시안의 눈앞에 나타났다.

넓은 초원. 거인 아틀란타와 그 앞에 있는 한 물빛 머리칼의 사내.

―무엇이 그리 걱정이더냐. 내가 말한 대로만 한다면 너희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사내가 얘기했다.

달콤한 제안. 이것이 달콤한 이유는, 사내에겐 정말로 저 말을 이뤄줄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틀란타는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뭐라!

사내의 도발에 아틀란타가 발끈 일어났다. 그런 아틀란타를 크게 비웃으며 사내가 얘기했다.

―녀석은 이미 힘이 다해가고 있다. 아직도 강대한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만 실상은 수명이 다해 허덕이고 있는 허접스러운 놈일 뿐이야.

―……그렇다면 네놈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않는가. 왜 우리를 끌어들이려 하지?

―그런 게 있어. 나의 세계는 네놈 세계와는 다른 섭리 하에 존재한다는 것만 말해두지.

―…….

한차례 도발을 당했음에도 고민하는 아틀란타.

그는 정말로 사내의 말을 일족에게 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결정이 일족의 운명을 결정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사내의 말이 악마의 속삭임임을 알고 있었기에.

―흥. 어처구니가 없는 겁쟁이 놈이로군. 되었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다른 놈을 찾아볼 따름이니.

―뭐라?

―굳이 네놈이 아니더라도 다른 거인과 접촉하면 된다. 뭣하면 요정이나 수인, 아니면 인간들 쪽에 얘기를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사내의 그 말이 아틀란타의 등을 떠밀었다.

이런 강대한 존재가 요정이나 수인, 인간들을 돕게 된다면? 그렇다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알았다. 왕에게 얘기하지.

아틀란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악마의 제안임을 알면서도.

그 사실이 못내 억울하고 원통했다.

―잘 생각했다.

반대로, 사내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다른 종족이어도 상관없다는 말은 사실이었으나 기왕이면 거인이 제격이다. 지상에 있는 놈들 중엔 가장 강인한 종족이니까.

이 종족만 손에 들어온다면, 드디어 그 가증스러운 네메시스를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니.

―네 이름은 무엇이냐.

아틀란타가 침통한 표정으로 놈에게 물었다.

물빛 머리칼의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궁주라고 부르거라.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것을 끝으로 심장이 가져다주는 환상은 사라졌다.

방금 봤던 광경에 시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틀란타……의 기억인가?’

녀석이 죽기 전 환각 마법 따위를 뿌린 것이 아니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본 사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아틀란타를 꼬드기던 물빛 머리칼의, 본인을 궁주라 칭하던 남자.

‘해령궁주.’

궁주라는 이름이 겹쳤을 뿐이지만 시안은 놈이 해령궁주라 확신했다.

본체인지 아니면 어떤 인간의 몸을 빼앗아 강림한 상태였는지 그것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베리엄에서 느껴졌던, 창해를 익힐 때 느꼈던 그 기운과 쏙 빼닮았다.

「왕을…… 왕을 찾거라……. 찾아서 나의…….」

녀석이 마지막 유언이라도 하듯 그리 얘기했다.

“왕을 찾아? 너희들의 왕 말이냐?”

거인왕. 거인들을 이끌고 선동하여 대륙을 침범했던 존재.

역사책에는 마치 마왕이나 마신과 같이 적혀 있는 녀석이다. 그리고 물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녀석.

“놈도 너처럼 살아 있나? 어디에? 거인들의 무덤에?”

「…….」

곧 죽을 것 같은 녀석의 상태에 시안이 빠르게 물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틀란타의 몸은 이미 잿빛으로 굳어지며 재가 되어 흩어지는 중이었다.

유일하게 색을 잃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놈의 심장. 물빛의 보석.

시안이 마저 심장의 기운을 모두 흡수했다.

두근.

그의 심장이 커다랗게 울렸다.

몸 곳곳에 스며든 기운이 심장을 중심으로 뭉쳤다가, 다시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 되어 시안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일전에 한 번 겪었던 경험이었다.

하이오크의 대전사였던 하크쉬와 싸웠을 때 겪었던 일.

“후우…….”

몸 안에 넘치는 힘을 느끼며 시안이 숨을 골랐다.

그가 바닥으로 내려와 잿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아틀란타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워낙 덩치가 큰 녀석이어서 그런지 사라지는 것도 느릿느릿했다.

‘설마 살아 있는 거인이 있었을 줄은.’

평범한 생물이 그 긴 시간을 살아 있을 수는 없다. 제아무리 거인이라도 수명이 있는 이상 그건 마찬가지다.

‘저 사슬들 때문인가.’

놈을 묶어놨던 사슬. 유적에 매달려있는 저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가져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사슬 역시 아틀란타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재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녀석의 육신은 물론 혼과 완전히 연결되어 있던 사슬인 모양이다.

‘…….’

사라지는 아틀란타의 시체를 두고 시안이 뒤를 돌았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염노와 기사들도 찾으러 가야 하고, 헥토르한테 보고도 받아야 하고, 이래저래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때.

“커헉!”

한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안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상상도 못 했던 조합이 있었다.

사라지는 아틀란타를 보며 절규하는 검은 로브의 사내. 모습을 보면 아마 이곳의 흑마법사가 분명하리라.

그리고 그 옆에서 놀라고 있는 헥토르와 그 뒤쪽으로 보이는.

흑마법사나 헥토르보다도 커다란 키와 갑옷 때문에 누가 봐도 눈에 띄는.

“파멜라?”

“……!”

파멜라 드레이크.

깜짝 놀라 몸을 긴장시키는 그녀를 보며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스치며 헥토르를 살폈다.

‘목걸이가 없다.’

자신이 위장용으로 걸어놓은 노예의 목걸이가 없다. 그 말은 즉 처음 얘기했던 대로 흑마법사 측에 첩자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는 뜻.

헥토르와 흑마법사. 그 두 사람과 파멜라가 같이 있다는 사실은…….

“무사하셨군요, 시안 아그리드. 이쪽은 이미 두 사람의 흑마법사를 생포했습니다.”

그 순간 파멜라가 선수를 치듯 빠르게 얘기했다.

분명히 처음에만 해도 없었던 오러를 펼쳐 흑마법사와 헥토르의 등을 점하고 있었다.

시안이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두 사람의 흑마법사라니, 헥토르는 어떻게 된 겁니까?”

“이놈도 역시 배신의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동료의 손으로 목걸이가 풀리자마자 바로 배반하더군요.”

“그렇군요.”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헥토르를 보았다. 헥토르가 파멜라의 눈을 피해 시안에게 입만 뻥긋하여 말을 전하였다.

―마. 룡. 왕.

녀석의 입 모양을 보곤 시안이 흠칫 놀랐다.

마룡왕이란 이름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크윽! 헥토르! 난 신경 쓰지 말고 저 새끼를 잡아!”

“어? 어어!”

그때 헥토르의 옆에 있던 흑마법사, 이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헥토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더니 빛살과 같은 속도로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일순간에 눈짓이 오고 갔는지 파멜라는 기가 막히게 헥토르를 놓친 척을 하였다.

“시안! 도망가세요!”

그 소리를 들으며 시안이 얌전히 헥토르에게 제압당해 주었다.

바닥에 엎어진 그의 등을 무릎으로 누른 채, 헥토르가 시안의 양손을 붙잡았다.

연기를 하라는 명령 덕에 합법적으로 시안을 제압하게 된 것은 헥토르에게 무척 즐거운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즐거워만 할 수 있는 사정이 있었다.

시안을 땅에 더욱 단단히 짓누르는 척을 하며 헥토르가 작게 속삭였다.

“마룡왕의 사도라고 하던데, 저 여자.”

“마룡왕의 사도? 파멜라가?”

“어. 젠장, 니네 둘이 싸우는 건 알 바 아닌데 나는 좀 빼주면 안 되냐? 마룡왕 그 노친네 겁나 무섭다고!”

“응, 안 돼.”

“크윽!”

간단히 풀어줄 것이었으면 애초에 족쇄를 씌운 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을 베고 라비한테 먹였으면 먹였지.

헥토르의 징징거림은 가볍게 무시하곤 시안이 마룡왕의 사도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에버웨일에서 마룡왕을 만났던 일. 그리고 놈이 자신에게 사도가 되라며 종용했던 일.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는 기억이다.

“시안! 반드시 구해드릴게요!”

“어떻게…… 어떻게 거인을 죽일 수 있었지!”

저쪽에서 들리는 소란 따위는 이젠 들려오지도 않았다.

시안의 시선이 헛소리를 계속해 대는 파멜라에게 향했다.

파멜라 드레이크. 정화교단의 신성기사단장. 그리고 천도맹의 촉망받는 루키.

‘그게 마룡왕의 사도였단 말이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칠흑마탑의 특성상 곳곳에 스파이가 있으리란 생각은 물론 하고 있었다만, 설마 교단의 기사단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을 줄이야.

‘이 정보를 어떻게 써먹는다…….’

시안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안! 시안 아그리드! 네놈이 감히 내 거인을!”

시안의 시선이 파멜라의 앞에 있는 이덴에게 향했다.

아틀란타가 얘기했었지. ‘네놈도’ 자신을 이용할 생각이냐며.

아마 아틀란타를 이용하려 했다는 그놈이 저 녀석인 것 같았다.

‘거인을 부활시켜 조종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확실히 그런 일이 있다면 큰 혼란이 도래할 것이다.

당장 이 영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거인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륙은 혼란에 빠질 터.

과거 다른 모든 종족을 억압하고 대륙을 지배하려 하였던 패권종족의 부활은 사람들의 입장에선 재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틀란타의 말에 따르면 거인왕도 비슷하게 살아 있을 수도 있어.’

칠흑마탑의 목적이 조금씩 보여 오는 것 같았다.

“내가 왔을 땐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생생히 살아 있었단 말이다! 네놈이 뭔가를 한 게 분명해!”

소리 지르는 이덴을 보다가 시안이 슬쩍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파멜라가 흠칫하더니 이덴의 등으로 오러에 쌓인 손을 더 가까이 붙였다.

“닥쳐라, 흑마법사.”

“뭐, 뭐? 너 이…… 크윽!”

뭐라 말하고 싶은 것이라도 있던 것처럼 입을 열었던 이덴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도 바보가 아니다. 파멜라가 시안 앞에서 정체를 숨겨야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애도 쓰는군.’

이미 시안은 헥토르를 통해 모든 것을 전해들은 후였지만 말이다.

“헥토르. 적당히 틈을 봐서 반격한다.”

“반격? 둘 다 잡으면 되나?”

“그래.”

저쪽이 되도 않는 연극을 하는 사이 이쪽은 착실하게 작전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 보던 와중.

콰과과과광!

갑자기 위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도련님!”

“도련님! 거기 계십니까!”

그곳에서 등장한 것은 염노와 앤디를 비롯한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정화교단의 사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네 이노오오옴!”

헥토르의 손에 시안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는 염노가 불같이 화를 내며, 손가락으로 헥토르의 머리를 겨냥했다.

“도련님! 금방 구해드리겠습니다!”

“역시 배신할 줄 알았어! 도련님! 한 번 배신한 놈은 또 배신한단 말입니다!”

시안이 주변 상황을 살폈다.

이미 들킨 것을 꿈에도 모른 채 흑마법사를 붙잡고 있는 마룡왕의 사도.

자신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붙잡은 척을 하고 있는 헥토르.

그리고 그런 헥토르를 보며 분개하는 염노와 기사들.

‘개판이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인지 고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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