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0화
시안이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냐.”
거인이 대답했다.
「위명 바다의 거인 아틀란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었던 종족 중 하나지.」
거인?
시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대라 불리는 옛 시절, 모든 종족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실제로 한때나마 대륙을 지배했던.
그러나 인간과 요정, 수인의 연합에 밀려 동쪽 땅에서 스러져 간 이들.
실제로 동쪽의 산악 지대 ‘거인들의 무덤’의 모든 산은 거인들의 시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거인 중 하나가 벤델 영지의 유적 아래에 있었다고?
‘심지어 제법 멀쩡해 보이잖아?’
묶여 있는 데다 힘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린다. 말도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아주 생생히 살아 있는 셈이 아닌가?
“네메시스란 게 무슨 소리지?”
「…….」
방금 자신을 가리키며 했던 말에 시안이 되물었다. 그러자 아틀란타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군.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그가 아니구나. 넌 누구지?」
“내 이름은 시안이다. 인간이지.”
「인간…… 과연, 인간이로구나. 네메시스도 스스로가 인간이라 하였었지. 아무도 믿진 않았지만.」
“…….”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었지. 때론 차갑고 때론 뜨거운 고통스러운, 저 아래 묻혀 있던 가장 낮은 세계. 그런데 그 세계로 발을 들이는 우리를 막아서는 이가 있더군.」
그게 네메시스라는 녀석인가?
「밤하늘의 왕 네메시스. 그는 강했지만…… 우린 기어코 그를 죽이고 나아갔네. 그러자 그곳의 주민들이 자유를 가져다주어 고맙다며 기꺼이 힘을 빌려주더군.」
새로운 세계. 거인들이 얻은 새로운 힘.
들은 기억이 있다.
가주에게 들은 지옥과 악마들에 대한 얘기였다.
「그 힘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줬고 우리가 대륙을 유린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네. 물론, 결국은 패배하여 모든 동족이 죽거나 나와 같은 꼴이 되었다만.」
녀석이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을 잃고 지난날을 후회하는 듯한.
그러나 놈의 감정 따위에 시안은 공감하고 있을 수 없었다.
‘네메시스라…….’
거인이 처음 지옥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앞을 막아섰던 존재. 그리고 정황상 지옥의 악마들 역시 막고 있던 존재.
그건 다시 말해 지옥의 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과 같은 녀석이었단 말이다.
지옥세계의 섭리에 따라 악마를 묶을 수 있으면서도 악마와는 조금 다른 존재.
시안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라비.’
그야말로 라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던가?
라비의 힘은 지옥의 최상위 군주 중 하나라는 프시케를 묶었고, 그럼에도 알티마의 불꽃에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라비가 그 네메시스라는 존재인가?
‘우웅?’
그러나 라비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뭘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라비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든가…… 아니면 본인이 모르는 관계가 있다든가.’
이 정도까지 돼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 역시 사실인 것 같다. 뭔가를 알고 있다면 어디선가 분명 반응을 하였을 것이다.
해령궁주를 등에 업은 베리엄을 만났을 때라든가, 유설에게 강림한 프시케에게 목줄을 채웠을 때라든가, 혹은 마룡왕을 만났을 때라든가.
그러나 그 어느 때도, 지금조차도 아무 반응이 없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결국 남은 단서는 해령궁주뿐인가.’
베리엄과 싸울 때 해령궁주는 라비의 정체를 아는 것처럼 보였다.
놈을 만나 물어보는 것 외에 남은 단서는 없었다.
「이보게 인간.」
그때 아틀란타가 시안을 불렀다.
시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나를 죽여다오.」
“뭐?”
눈을 찌푸리는 시안을 향해 아틀란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얘기했다.
「아직까지 죽지 못한 것은 저주나 다름없다. 이제 그만 동족의 곁으로 가고 싶구나.」
시안이 조용히 놈을 보았다.
고민이 들었다. 이놈을 죽이는 것이 나은가 그렇지 않은 것이 나은가.
놈의 무력함이나 놈이 과거에 뭔 짓을 저질렀는지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단지 살려놓고 써먹을 수 있는 곳이 있나 고민했을 뿐.
거인이 가진 고대의 지식만 하더라도 사학계가 뒤집힐 가치 있는 것들이 상당수 있지 않겠는가.
고민하는 시안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틀란타가 얘기했다.
「네놈도 날 이용해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
시안의 눈이 꿈틀거렸다. 네놈도?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날 죽이고 내 심장을 취해라.」
“심장을?”
「너의 심장을 거인의 것과 같이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 말에 시안이 결정을 내렸다.
거인의 심장.
그것은 사학계를 뒤집어 놓는 것 따위보다는 훨씬 매력이 있어 보였다.
* * *
‘아니, 이 녀석들, 그냥 대놓고 나오잖아?’
헥토르가 볼을 긁적였다.
아무런 반응 없이 서 있기만 하는 그를 보곤 검은 로브가 눈을 찌푸렸다.
“뭐 하고 있나, 헥토르. 이쪽으로 오지 않고.”
검은 로브 중 다른 한 명이 손가락으로 헥토르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는가 싶더니, 이내 투툭 하고 헥토르의 목걸이가 잘려나갔다.
헥토르가 눈을 깜빡이며 목을 쓰다듬었다.
그런 그를 향해 검은 로브 중 하나가 비웃듯 얘기했다.
“멍청하게 이딴 거에나 묶이고 다니다니. 네 주인이란 자도 얼마나 멍청할지 상상이 되는구나.”
“뭐 인마!”
헥토르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지금 그 말은 즉 자신을 욕하는 말이 아닌가?
“흥, 이제야 좀 너 같군. 왜 이렇게 어벙한가 싶었다.”
“이 자식이…….”
“어쨌든 빨리 와라. 손 하나가 급한 시점이니.”
헥토르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러나 발은 솔직하게 검은 로브를 향했다.
아무리 짜증이 난다지만 시안의 명령을 위반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헥토르의 뒷모습을 줄리오가 입을 벌리며 바라보았다.
“네, 네놈! 첩자였구나!”
“씁. 뭐 그렇지.”
검은 로브가 줄리오 일행을 꽁꽁 묶는 것을 헥토르가 도왔다.
“이 녀석들은 어쩌게?”
“가둬야지. 아델하이트의 아들이라면 인질로는 더할 나위 없어.”
헥토르가 그들을 묶은 포승줄을 손에 잡고는 검은 로브들을 뒤따랐다.
이윽고 아지트에 도착한 그들.
헥토르는 줄리오 일행을 직접 한쪽 방에 가두어 넣었다.
작은 동굴과 같은 방으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입구를 막는 방식이었다.
“네 이놈, 노예 놈! 시안 그놈은 대체 어떤 놈을 데리고 온 거야!”
줄리오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헥토르가 바위를 밀었다.
모두 밀 때쯤에는 더 이상 그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끝났나, 헥토르?”
“어, 대충.”
“따라와라. 지부장이 부른다.”
“응? 어 그래.”
지부장이라면 이곳의 책임자를 말하는 건가?
헥토르가 다소 긴장하며 검은 로브의 뒤를 따랐다.
딱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이 정도 놈들은 트럭으로 가져와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시안의 명령은 첩자질을 하는 것.
즉 최대한 놈들에게서 정보를 캐내란 것이다.
날뛰는 게 아니라.
‘그래도 여차하면 다 잡아버리면 되겠지.’
그 정도로 생각하며 그가 지부장이란 놈이 있는 석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과 마주쳤다.
한 명은 무척이나 다크서클이 짙고 음울한 표정의 사내였다.
벤델 영지 칠흑마탑의 지부장 이덴.
그를 보자마자 헥토르는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해령궁주의 가호를 받고 있군.’
해령궁주. 마룡왕과 함께 지상에 가장 공을 들이던 대악마 중 하나.
다만 뇌력천주인 그가 느끼기에 그 둘이 지상에 집착하는 것은 조금 양상이 달랐다.
마룡왕이 무언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지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해령궁주는 보다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간섭하길 원했다.
아마 힘을 주는 화신의 수도 해령궁주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리고 이덴의 앞쪽에 있는 이도,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잘 아는 얼굴이었기에 헥토르는 오히려 놀랐다.
“너…….”
“적이 아니니 안심하시길.”
“적이 아니라고?”
헥토르가 그녀, 파멜라의 말에 눈을 찡그렸다. 복잡해지는 상황에 잠깐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두 사람을 두고,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이덴이 입을 열었다.
“안심해라, 헥토르. 우리 편이라는 듯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이덴의 말에 헥토르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물론 대부분은 연기였다. 시안에게 보낼 정보를 캐내기 위한.
그러나 호기심도 없진 않았다.
아무리 칠흑마탑에 대해 잘 모르는 헥토르라고 해도 정화교단과 칠흑마탑이 적대 관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교단의 신성기사단장이 칠흑마탑과 같은 편이라고?
‘그놈의 말이 맞았던 건가…….’
시안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예민하게만 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게 있으니 그녀를 감시하라던.
진짜로 그냥 예민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딱 들어맞지 않았는가?
“우리 편이라는 말은 배신이라도 했단 소린가?”
“아니. 애초에 신성기사가 되기 전부터 가호를 받고 있었다더군.”
“가호? 누구한테.”
“마룡왕이요.”
“마룡왕!”
옆에서 얘기하는 파멜라의 말에 헥토르가 기겁했다.
이곳의 지부장이 해령궁주의 비호를 받는 놈이라는 것보다, 신성기사단장인 파멜라가 적이 아니라며 이 자리에 있는 것보다.
그 무엇보다도 마룡왕이란 이름이 경악스러웠다.
“-? 뭘 그렇게 놀라지?”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화교단의 기사단장의 정체에 놀랐을 뿐이다.”
“이해한다. 나도 아까 듣고 꽤나 놀랐으니까.”
이덴에겐 적당히 대답하며 헥토르가 둘러댔다.
파멜라가 칠흑마탑의 편이란 사실은 잘 알았다. 시안의 적이란 사실도.
그런데 하필이면 마룡왕이라니!
아무래도 눈앞의 인간 놈들은 모르고 있는 듯하나, 마룡왕이란 이름은 지옥에서 단 하나로 통했다.
공포란 이름으로.
그 험한 지옥에서도 누구보다 강대한 존재. 만마의 정점에 오른 자.
해령궁주의 화신을 방해하는 일 정도야 크게 문제없다. 놈 역시 강한 악마였지만 도망칠 자신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마룡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름만으로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크윽…… 사이에 끼어서 나만 뭐야 이게!’
괜히 시안 그놈한테 잡혀가지고, 그와 마룡왕 사이에 끼게 되었지 않은가!
암담하기만 한 미래에 헥토르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 헥토르의 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이덴과 파멜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헥토르, 파멜라. 마침 적당히 제물들이 들어온 참이니, 좋은 걸 보여주마.”
“제물? 유적에 들어온 용병들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헥토르가 붙잡혔는데도 지부를 이동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요.”
“절대 벗어날 수 없지. 그걸 두고 말이야.”
이덴이 평소의 음울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흥분한 기색을 띄우며 킬킬거렸다.
“이제 곧 이 영지에 고대의 거인이 깨어날 것이다.”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정작 그 시각, 거인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