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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98화 (9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8화

결과적으로 대련은 치러지지 않았다.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두고 보자!”

그 말만을 남긴 채 줄리오가 급하게 자리를 떠나갔다.

아델하이트의 기사들이 ‘도련님?’, ‘그러지 말고 혼내주시죠!’ 하는 둥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줄리오는 절대 뒤를 돌지 않았다.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저렇게 도망가는 녀석의 등을 많이도 봤었지.

“뭔 일이었지?”

녀석이 떠나간 후 시안이 헥토르에게 물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지나가는데 저 떡대 놈들이 복도를 꽉 메운 채 오고 있잖아. 그러다 부딪쳤는데 사과하라니 뭐라니 그러네. 복도를 다 차지한 쪽이 잘못이지 내 잘못인가.”

“진짜 별일 아니군.”

“그렇다니까. 그나저나 유적에 대해선 뭐 좀 들었나?”

헥토르의 질문에 시안이 알버트 남작에게 들었던 걸 잠시 설명했다.

그렇다곤 해도 유적에 대한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얼마 전에 작은 지진이 있었고 그 때문에 새로운 통로가 드러났다는 정도.

그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파멜라가 헥토르에게 물었다.

“당신은 저 유적 속 마탑 소속이었죠? 그 통로는 뭐죠?”

헥토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는데.”

“그게 말이 되나요? 당신이 속한 곳의 구조를 모른다구요?”

“속했다고 해도 10살 무렵부터 천둥마탑에서만 자랐으니까. 이쪽엔 거의 와본 적도 없고 그나마 한 번씩 왔을 때에도 비밀 통로 같은 건 알지도 못했어.”

물론 다 적당히 지어낸 변명이다. 사전에 시안이 헥토르에게 이런 식으로 대답하라고 주입을 했었다.

“끙…….”

헥토르의 말에 납득을 한 건지 파멜라는 더 캐묻지 않았다. 속으로만 삭이고 있을 뿐.

그런 둘에게 시안이 얘기했다.

“영주성에서 머물러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잠시 쉬었다가 탐사 준비를 마치고 다시 집합하도록.”

“어.”

“알겠어요.”

“헥토르. 넌 잠깐 날 따라오도록. 해둘 말이 있어.”

“?”

의아해하는 헥토르를 데리고 시안이 따로 자리를 가졌다.

“무슨 일인데? 그 여자 때문에?”

“뭐 그것도 있고.”

“아직까지는 크게 수상한 점은 없던데. 근데 널 신경 쓰는 모습은 있더라.”

“그런가.”

파멜라를 주시하라던 것에 대한 간략한 보고를 들었다.

아직 확신할 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여전히 수상쩍긴 하였지만.

다만 헥토르를 남으라고 한 것은 다른 용건이 있기 때문이다.

시안이 품을 뒤져 작은 유리구슬을 꺼내 헥토르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통신구. 네가 마나를 일으키면 다른 쪽 통신구가 공명해서 음성이 전달되는 아티팩트다.”

“흐음. 신기한 게 다 있군. 아무한테나 연락할 수 있는 건가?”

“반대쪽 구슬을 가진 사람한테만. 통신구는 두 개가 한 세트거든.”

지옥에는 없는 인간 세상의 문물에 헥토르가 제법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시안이 가르쳐 주는 대로 사용법을 잠시 숙지했다.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마나의 섬세한 조절이 필요했기에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뇌력천주란 이름을 가진 그에게는 별 어려움도 아니었다.

“근데 이걸 왜 나한테? 그 할아범이나 날 노려보던 기사한테나 주지. 아니면 그 여자한테 주든가.”

“아니. 네가 맞아.”

헥토르가 당연한 의문을 품었지만 시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통신구는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 가지고 온 것.

그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건넬 이는 헥토르 말고는 없었다.

* * *

잠시 시간이 흘러, 일행들이 유적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영주성의 앞에 모였다.

염노와 기사들, 파멜라와 사제들, 그리고 헥토르와 시안.

일행들의 얼굴엔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지금 향하는 곳이 평범한 유적이 아님을 염노와 파멜라가 사전에 얘기해 두었기 때문이다.

“천둥마탑을 이용하려 했던 그놈들의 본거지가 여기란 말이군요.”

악마니 지옥이니 하는 설명은 괜스레 복잡해져서 하진 않았지만, 가문의 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전했다.

그제야 그들은 마스터가 둘이나 붙어 있는 이 일행의 구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의아했었다. 고작해야 유적 관광에 마스터가 둘이나 붙다니?

하나라면 개인적인 취미라 할 수 있겠지만 둘씩이나 되면 뭔가 묘하지 않은가?

거기에 아무리 목걸이를 채웠다지만 헥토르를 굳이 관광에 데려갈 이유도 없었다.

실상은 관광 따위가 아니라 적을 치러 가는 것이었던 것.

이윽고 그들이 영지 밖에 있는 유적으로 향했다.

길을 잃을 염려는 전혀 없었다. 과거 유적이 아직 활발하게 발굴될 때 닦아놓은 길이 있었고, 무엇보다 유적 쪽으로 사람들이 잔뜩 오가고 있었으니까.

도착한 유적은 지하로 들어가는 형태의 유적이었다.

고대의 양식으로 지어진 입구가 지면에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구조.

그리고 그 입구와 유적 속에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이미 유적의 일정 깊이까지는 모두 탐사가 완료된 곳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곳은 한 부분. 지진 탓에 드러났다는 새로 열린 통로였다.

그 앞까지 다가가니 삼삼오오 모인 용병과 트레져 헌터들이 보였다.

그때 통로 안쪽에서 두어 명의 사람들이 이마를 닦으며 빠져나왔다.

미리 들어가 초동 조사를 하고 나온 이들.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그들에게 쏠렸다.

“후우!”

“이봐! 저 안은 어때?”

“몬스터가 있다. 마음 편히 들어갔다간 큰일 날 거야.”

“몬스터?”

“나가가 있어.”

몬스터란 말에 사람들 사이로 살짝 동요가 퍼졌다.

한편 시안도 조금 놀라고 있었다.

나가라면 어인이라고도 불리는, 물고기와 사람을 합쳐놓은 것 같은 몬스터다.

물가에나 서식하는 놈들인데 그게 왜 이곳에?

“지하에 커다란 수맥이라도 흐르는 모양이야. 아래쪽은 상당히 습하다. 횃불이 젖지 않게 조심해야 할 거야.”

그들의 말을 들으며 시안이 입가를 매만졌다.

설마 칠흑마탑에서 몬스터까지 준비해 놨을 줄이야.

아니면 원래 저 깊숙한 곳에 살고 있던 몬스턴가?

‘그 몬스터들이 놈들이 준비한 함정일지도.’

어느 쪽이든 칠흑마탑과 관련이 없을 수는 없을 터.

새로운 정보를 정리하던 시안이 문득 고개를 돌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영주성에서 헤어졌던 줄리오였다.

“!”

시안을 보더니 줄리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우리도 들어간다!”

그러곤 기사들과 함께 자신만만하게 통로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유적 지하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통로로.

시안도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들었다시피 저 안에는 적이 있다. 무슨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무서우면 지금 얘기하도록.”

“괜찮습니다! 도련님이 가시는 길이 저희가 따라야 할 길입니다.”

앤디를 비롯한 기사들이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충성도 높은 기사들. 그것은 아그리드에게 바치는 충성이지 시안에게 향하는 것은 아니긴 했지만, 지금 상황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좋아. 그럼 들어가지.”

시안의 호령과 함께 그들도 통로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들어가자마자 어둡고 습한 공기가 훅 하고 올라왔다.

일행들이 하나둘 횃불에 불을 붙이곤 신중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둘. 헥토르까지 하면 셋 이상에 나까지 있다.’

이 정도면 말도 안 되게 강한 전력이다. 데려온 기사들도 결코 수준이 낮지 않았고 사제들도 있으니 싸움이 길어져도 전혀 문제가 없다.

고작 칠흑마탑의 지부 하나 정도에 밀릴 전력은 아니었다.

지부 하나가 이 정도 전력을 막아낼 정도라면 칠흑마탑이 뭐 하러 어둠 속에 숨어서 활동을 하겠는가.

대놓고 활동해도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인데.

‘관건은 놈들이 어떤 함정을 준비했느냐인데.’

그 함정의 종류에 따라 일이 간단하게 끝날지 어렵게 갈지 결정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지하 깊은 곳으로 향하던 중.

드드드드드드―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지진인가?”

일행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저 앞쪽에서도 비슷한 소란이 들려온다. 줄리오 일행을 포함해 미리 들어갔던 이들.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함정이라는 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

이 타이밍에 딱 맞게 지진이 일어난다니 말도 안 된다.

놈들이 준비해 놓은 함정일 터.

이윽고.

쿠르르르릉!

유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밑이 급격히 불안정해진다. 일행들이 제각기 몸을 낮춰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그 직후.

“으아아아악!”

“도련님!”

그들이 서 있던 땅이, 폭삭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발밑이 꺼지며 모두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와중 일행들이 제각각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간신히 바닥에 착지를 하고 보니, 시안은 홀로 미궁과 같은 유적 속에 덩그러니 떨어져 버렸다.

시안이 즉시 횃불에 불을 붙여 사위를 살폈다.

‘유적 전체에 이런 기능이 있던 건가.’

그가 눈을 찌푸렸다.

상정했던 것보다도 훨씬 스케일이 큰 함정이었다.

주변을 살펴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후, 그가 품속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그리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헥토르, 들리나?

잠시 후, 답이 돌아왔다.

―어, 잘 들려.

―그쪽 상황은?

―나 혼자…… 아니네. 좀 앞쪽에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 염노나 기사들? 아니면 파멜라와 사제들인가?

―둘 다 아냐. 아까 영주성에서 시비 걸던 그 떡대들.

줄리오 일행과 붙은 건가…….

아무래도 염노나 파멜라 일행은 또 따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넌 어때?

―난 혼자다.

―그래? 위험한 거 아냐?

―……어째 기대감이 넘쳐 보이는군.

―으응~?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생각하는 게 훤히 보였다.

자신이 이참에 객사라도 하길 바라고 있겠지. 그러면 자유의 몸이 될 테니까.

―이 정도로 죽을 일은 없으니 걱정 말도록.

―쳇, 거 다행이네.

퉁명스럽게 혀를 차고는,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거냐?

―예상?

―그래서 나한테 통신구 준 거 아냐?

타당한 추론이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렇게 전부 다 흩어놓을 것까진 예상 못 했는데. 다만 너랑 나를 떼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

―왜?

―저들 입장에선 너는 노예의 목걸이가 채워져 강제로 굴복하게 된 동료일 테니까.

그래서 혹시…… 라고 생각했다.

놈들이 헥토르를 구하려 하진 않을까. 목걸이를 떼어내고 역으로 자신에게 반격할 기회를 노리진 않을까.

하나 있는 통신구를 염노나 앤디가 아니라 헥토르에게 건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시안의 말에 헥토르가 감탄의 음성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 시안이 얘기했다.

―만약 놈들이 너한테 접근한다면 동료인 척 들어가.

―뭐? 나보고 그런 일을 하라고?

헥토르가 펄쩍 뛰었다. 이 폭풍산의 뇌력천주를 보고 인간들 사이에서 첩자질이나 하라니!

―연기력 한번 보도록 하지.

―야 인마……!

뚝.

헥토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안이 통신구의 마력을 끊었다.

전달할 건 모두 전달했으니.

“그럼 나도 가볼까.”

저쪽만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

시안이 횃불을 들어 올리곤 미궁 탐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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