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7화
말을 탄 일행들이 평야를 달렸다.
벤델 남작령까지의 여정. 워프 게이트를 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행이 생각보다 인원수가 많다는 이유도 있었고, 어차피 그 근방에는 가까운 워프 게이트가 없어서 그냥 가나 워프를 타고 가나 도착하는 시간은 비슷했다.
남작령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귀중한 워프 게이트를 설치할 만큼 큰 영지가 아니었다.
‘벤델 영지에서 유명한 건 고대 유적 하나.’
그곳은 별다른 특산물도 없고 관광할 만한 장소도 없는 곳이었지만, 과거 고대 유적이 발견된 장소로 잠시 유명했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유적이 모두 그러하듯 이미 탐사는 완료되었다.
털어갈 건 다 털어가고 남은 물건 하나 없는 텅텅 빈 유적.
때문에 지금 벤델 영지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 특색도 없고 오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그런 작은 영지에 불과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지 이건?”
일주일이 지나 영지에 도착했을 때, 시안은 제 눈을 의심했다.
한적한 영지의 모습을 예상하고 왔는데 정작 눈에 비친 것은 북적이고 있는 영지가 아닌가?
“헉! 아그리드 가문의 공자님이란 말씀이십니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문 너머에서 영지의 모습을 보며 시안 일행이 검문을 받았다.
문 앞을 경비하던 경비원이 시안의 신분을 듣고 재빨리 초소로 돌아가더니, 이윽고 한 중년 사내가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벤델 남작령의 수비대장을 맡고 있는 몸입니다! 공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시안 아그리드다. 뒤쪽에 저들은 보다시피 정화교단의 사제들이고.”
“신성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파멜라라고 합니다.”
“기, 기사단장!”
파멜라의 신원까지 들으니 수비대장은 숨이 넘어갈 듯한 반응을 보였다.
후작가의 도련님까지는 그렇다 쳐도, 거기에 정화교단의 기사단장이란 자까지 포함된 일행이라니.
일개 남작령의 수비대장으로선 기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따, 따라와 주십시오.”
그런 수비대장의 안내를 받아 일행이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먼저 향하는 곳은 벤델 남작이 사는 저택이었다.
“사람이 많아 보이는군.”
길을 따라 영주의 저택으로 향하며 시안이 영지의 상태를 살폈다.
남작령의 크기에 비해 굉장히 사람이 많았다.
그 대부분이 허리춤에 칼 한 자루씩은 차고 있는 이들이었다.
“공자님도 유적 때문에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시안이 눈을 찡그렸다. 자신들이 유적 때문에 온 것은 맞는데, 그걸 수비대장이 어찌 알지?
“열흘 전에 유적에 새로운 통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아직 탐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통로가 발견되었다고?”
“예. 덕분에 인근에서 용병들이나 트레져 헌터들, 자유 기사라는 이들까지 몰려들어서 아주 북새통입니다. 또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은 상인들이 오기도 했구요.”
덕분에 영지는 무슨 축젯날처럼 북적이게 되었으며, 여관과 술집들은 복에 겨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여관만으론 숙박 장소가 모자라 영지민들이 민박을 제공하며 쏠쏠하게 벌고 있을 정도라고.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새로운 통로가 발견되었다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함정이군.”
“그렇겠군요.”
시안이 수비대장이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것은 옆에 있던 염노와 파멜라뿐이었다.
함정.
그 단어에 파멜라의 표정이 순간 굳어왔다.
‘함정을 펴? 왜 철수하지 않았지?’
그녀가 눈을 찡그렸다.
그녀 역시 칠흑마탑의 일원이긴 하였으나, 이곳 벤델 영지의 흑탑의 일원은 아니다.
때문에 이곳 지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 쪽에서 연락을 할 방법도 없었고.
하지만 분명 본단 쪽에서 명령이 내려갔을 텐데.
‘철수 명령이 아니라 다른 명령이 내려왔나?’
그랬을 가능성도 적진 않다. 혹은 이게 아니라면 본단의 명령과는 별개로 이곳의 흑마법사들끼리 작당을 해서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걸지도.
다만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똑같았다.
시안의 말대로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
‘샤밀라를 두고 와서 다행이야.’
역시 동생을 데려오지 않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녀는 벤델의 흑마법사들이 무슨 함정을 펼쳤을지 알지 못한다. 만약 샤밀라가 운 나쁘게 그 함정에 걸려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랬다간 오늘의 일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겠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녀.
“…….”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헥토르가 빠짐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칠흑마탑의 일원이며 마룡왕의 사도란 사실은 마탑에서도 극히 일부밖에 모르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녀는 헥토르에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한때 흑마법사였고 지금은 배신을 하였다곤 하나, 그의 입에서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 일은 없었기에.
그 때문에 헥토르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시안과 염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역시 함정이라 생각합니다만, 어찌하실 건가요?”
시안이 힐긋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변하는 건 없습니다, 파멜라. 이대로 진행할 겁니다.”
역시 쉽게 돌아갈 리는 없나. 그녀가 속으로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영지를 가로질러 일행들이, 벤델 남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 * *
“어서 오시게! 나는 이곳의 영주인 알버트 벤델일세.”
“반갑습니다. 시안 아그리드입니다.”
“파멜라 드레이크입니다.”
“그 명성 높은 아그리드 후작의 자제와 정화교단의 기사단장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내 눈이 크게 뜨이는구만. 자자, 이리로 와서 앉게나.”
알버트 벤델이 손바닥을 비비며 시안과 파멜라를 맞은편의 자리에 앉혔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이게 웬 횡재냐는 생각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눈빛이었다.
“아직 작위도 없는 애송이일 뿐인데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허허, 겸손이 심하네. 지금이야 그렇다지만 머잖아 후작령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아니신가.”
“아직 모를 일이죠.”
“하하하!”
시안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만 받아들이는지 알버트가 크게 웃었다.
“그보다 유적 말입니다만. 오면서 들었는데 새로운 통로가 발견되었다고…….”
“아, 역시 그 일 때문에 오셨구만. 교단의 단장님도 같은 이유신가?”
“맞아요.”
파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한꺼번에 설명하면 되겠군. 뭐 사실 설명이랄 것까지도 없네. 얼마 전에 작은 지진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유적에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지 뭔가. 아무래도 이 영지도 아직 천운이 따라주는 모양이야. 내 당장에 동네방네 알리고 다녔지, 하하하!”
“그렇군요…….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통로의 존재를 숨기고 사병들로 발굴하실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나는 주제를 아는 사람이라네. 그 왜 커다란 보물에는 커다란 재앙이 따라붙게 마련이라지 않은가.”
“그래서 일부러 정보를 퍼뜨리셨다고.”
“그런 셈이지.”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는 이런 것이다. 유적에 대단한 보물이 있고 그걸 몰래 발굴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은 지킬 힘이 없다고.
재앙을 불러올 보물을 가지고 불안에 떨기보다는 차라리 영지를 조금이라도 부흥시킬 기회로 삼는 편이 낫다고.
결과적으로 그건 완벽히 옳은 판단이었다.
유적의 새 통로는 보물로 향하는 길 같은 것이 아니라 칠흑마탑이 깔아놓은 함정길이니까.
“어찌 됐든 탐사가 진행되는 동안엔 이곳에 머무시게. 바깥에선 여관방 하나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걸세.”
“배려 감사드립니다.”
“똑같이 황제 폐하를 모시는 봉신가문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하하하.”
그러니 다음번에 우리 쪽도 좀 잘 봐달라, 대충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남작의 신분으로 후작가에 끈을 대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어납시다, 파멜라.”
“예.”
무사히 묵을 장소를 확보한 시안이 파멜라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알버트 남작이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렇지. 저택에 온 손님들이 자네들만이 아니라네.”
“저희만이 아니라고 하시면?”
“아델하이트에서도 사람들이 와있어. 그쪽도 유적 탐사를 위해 왔다고 하니 자네들관 경쟁자가 되겠구먼.”
아델하이트 후작가. 갑자기 등장한 그 이름에 시안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편히 쉬고, 무운을 비네.”
생글거리는 알버트 남작을 두곤 시안과 파멜라가 집무실을 뒤로했다.
* * *
“아델하이트라……. 칠흑마탑의 함정인 걸 그쪽도 알고 온 것일까요?”
“글쎄요.”
집무실을 나오며 파멜라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시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천도맹 쪽에서 정보가 새지는 않았나 물어보는 것이었다.
“저희 쪽은 아니에요. 천둥마탑주의 전언은 나 혼자 들었거든요. 저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구요.”
“저희도 식솔들의 입막음은 확실하게 해놨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첩자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아델하이트는 정말로 유적이 새로 열린 줄 알고 왔다는 말이죠.”
부지불식 튀어나온 첩자란 단어에 파멜라가 살짝 긴장할 뻔하였으나, 이어지는 말에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군요.”
“아마도.”
“괜히 방해만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건 이미 늦었습니다.”
“늦어요?”
“남작이 유적의 새로운 통로라는 걸 동네방네 소문낸 시점에서 방해물이 없을 순 없어졌습니다. 이미 용병들이나 트레져 헌터라는 자들이 우글거릴 테니까요.”
시안의 말에 파멜라가 납득했다.
그것도 그렇다. 아델하이트의 기사니 뭐니 관계없이, 이미 유적 쪽엔 사람들이 바글거릴 테니까.
그녀가 눈을 찡그렸다.
그녀는 칠흑마탑의 단서가 퍼지지 않길 바란다. 그런 입장에서 과연 이 일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함정을 쳐놨다는 건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말일 텐데. 이것도 모두 계획인가? 아니면 남작의 행동은 예상 밖의 일인가?’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은 일단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는 일.
생각에 잠긴 파멜라를 데리고 시안이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복도를 향하던 중, 한곳에서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예 주제에 참으로 뻣뻣한 놈이로구나!
―아니, 노예고 뭐고, 그쪽이 먼저 부딪쳤으니 사과하는 게 맞잖아. 그게 그 뭐냐, 니들이 말하는 도린지 뭔지 하는 그거 아냐?
―그러니까 지금 우리보고 도리도 모르는 무지렁이라 하는 것이냐?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는데. 근데 너 말하는 거 들어보니 그런 거 같긴 하네.
―에잇! 이 건방진 놈이! 네 주인을 불러와라!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노예라 불리는 쪽 말고도 반대쪽도 말이다.
시안이 그 장소로 향했다.
그곳엔 뚱한 표정의 헥토르가 있었고, 그리고 그 헥토르를 노려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아델하이트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그 가장 앞에서 썩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놈.
줄리오 아델하이트.
‘아델하이트라고 해서 와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지만.’
시안이 고개를 저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를 먼저 발견한 헥토르가 반개한 표정으로 시안 쪽을 가리켰다.
“안 그래도 저기 오네. 쟤가 내 주인이다.”
“노예 주제에 무슨 말버릇이……. 쳇, 그래 주인 얼굴이나 좀 봐보자.”
줄리오가 그리 얘기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시안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네, 네가 왜 여기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그에게 시안이 얘기했다.
“내 노예에게 실례를 한 모양이군.”
“그래, 시안 아그리드! 네 노예가 나한테 실례를…… 응?”
시안의 말에 정색을 하던 줄리오가, 무언가 뉘앙스가 이상함을 깨닫고는 그대로 멈추었다.
“오랜만에 대련 한 판 어때?”
이어진 시안의 말에 옛 기억이 떠오르며 표정이 핼쑥해지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