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96화 (96/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6화

파멜라 드레이크. 시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장신의 여성이었다. 키가 큰 여성이라 하면 최근에 본 이 중에는 헬레네 황녀가 있지만, 황녀는 자신과 비슷한 키였던 것에 비해 파멜라는 자신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 커다란 몸에 빈틈없이 갑주를 착용한 모습은 꽤나 위압적이었다.

‘단단하다.’

그게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적에겐 압도를, 아군에겐 안도를.

등에는 정화교단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투 핸디드 소드가 메여 있었다.

“그나저나 용케 여기까지 올 생각을 하셨군요. 교단의 본산과는 꽤나 거리가 있을 텐데.”

“순례 여행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이 방향으로 향하던 중에 천둥마탑주에게 연락이 왔더군요.”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다. 헥토르의 일을 듣고 출발했다기엔 교단과 영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순례 때문에 근처에 있었다는 말도, 그리고 클로드의 전언을 듣고 영지로 오게 되었다는 말도 아마 사실이겠지.

“시안 님은 그때보다 더욱 훤칠해지셨네요!”

샤밀라가 끼어들자 시안이 파멜라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자랐을 리가요.”

“듣고 보니? 그래도 거의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달라 보여요!”

“칭찬이시라면 달게 듣겠습니다.”

시안이 살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한 번 본 사이인 데다 샤밀라 본인이 워낙 거리낌 없는 성격인 덕분에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온화한 분위기.

그러던 중 시안이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옆을 보니 파멜라가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파멜라?”

“아, 예, 예. 무슨 일이시죠?”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만…….”

시안이 부르자 그녀가 당황하며 정신을 차렸다.

허둥지둥하는 그녀의 모습에 동생인 샤밀라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오랜 여행으로 조금 피곤한가 봐요! 아니면 나랑 시안 님이 친한 것 같아서 질투하는 건가?”

“샤밀라……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요?”

동생의 너스레에 파멜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정도 여행으로 피로한 것도, 하물며 질투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질투는 맞나.’

파멜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생각해 보면 질투가 맞을 것이다. 샤밀라가 얘기하는 것 같은 귀여운 질투가 아닌, 좀 더 음험하고 진득한.

마룡왕이 사도인 자신보다 시안 아그리드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서 오는 질투.

하지만 그걸 드러낼 수는 없지.

그녀가 단단히 정신을 차린 채 표정을 가다듬었다.

“큼큼. 그래서 이번 토벌 말입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저와 사제들도 동행해도 될까요?”

“벤델 영지의 유적 말이죠? 저도 가고 싶어요!”

헥토르가 소속해있던 칠흑마탑의 지부가 있는 장소. 벤델 남작의 영지. 그곳에 있는 한 유적 속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번 일은 그 유적을 탐사하러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실상은 칠흑마탑의 지부를 조사하러 가는 것이다.

모든 진실을 아는 이는 일행 중에선 시안과 염노, 그리고 파멜라가 유일했다.

유적에 도착하면 일행들에게도 모두 얘기하긴 할 테지만.

“와주신다면 든든합니다. 다만 혹시라도 유적에서 발견되는 물건이 있다면…….”

“괜찮습니다. 저희 교단은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는 곳이 아니기에.”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 속뜻은 ‘칠흑마탑에서 얻는 성과를 나누어줄 수는 없다, 다만 정보 공유 정도는 괜찮다’, ‘잘 알겠다, 그 조건으로 충분하다’. 이런 의미였다.

“다만 샤밀라는 영지에 남아주십시오. 혹시 모르니까요.”

“예에? 왜요! 벤델 영지의 유적은 어차피 텅 빈 유적이 아닌가요? 그냥 관광 느낌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란 게 있지 않습니까.”

“공자의 말이 맞아요. 샤밀라는 이곳에 남으세요. 저랑 사제 몇 명만 함께 갔다 올 테니까.”

“우우…….”

시안은 물론이고 언니인 파멜라마저 이리 단정적으로 얘기하니 샤밀라는 더 칭얼댈 수가 없었다.

결코 데려가지 않겠다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도 잘 전해져왔다.

“그럼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내일까지는 푹 쉬십시오. 출발은 내일 오전입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휴우…… 알겠어요. 저는 그냥 영지에 남아 있을게요. 그나저나 아그리드 후작께는 귀여운 영애분도 있다고 들었는데 만나러 가봐도 되나요?”

“그러시죠. 지금 시간이면 아마 수련장에 있겠군요.”

시안의 손짓에 사용인들이 다가와 샤밀라와 파멜라를 안내해 주었다. 샤밀라는 체샤가 있는 수련장으로, 파멜라는 손님용 객실로.

하인의 수행을 받으며 파멜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조금도 눈치 못 채는군. 하긴 그렇게 쉽게 들킬 거였으면 정화교단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거다.’

시안 아그리드. 마룡왕이 지켜본다고 하여 얼마나 대단한 놈인가 했더니, 일단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혹시라도 첫눈에 자신이 마룡왕의 사도란 것을 눈치채거나 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딱히 해코지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쉽게 흑탑의 정보를 건네줄 순 없지.’

애초에 순례를 떠날 때는 시안의 얼굴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룡왕이 선택한 남자가 어떤가 하는 호기심, 그리고 질투심에.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목적이 추가되었다. 그가 벤델 영지의 칠흑마탑에서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게 하는 것.

‘뭐 이미 철수 명령은 내려갔으니까 단서 같은 것은 남아 있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봐야겠지.

의심 하나 없는 시안의 모습을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그녀가 하인의 뒤를 따랐다.

* * *

“웬일이야 또.”

샤밀라와 파멜라를 내보내고 시안이 향한 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헥토르가 묶여 있는 감방 앞.

짤랑.

그가 감옥 열쇠를 흔들자 헥토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그래, 이제 풀어주려 왔다. 벤델 영지의 흑탑을 뒤지는 데 네 동행이 필요하니까.”

“으랴아아아! 만세! 드디어 이 칙칙한 지하에서 벗어나는구나!”

단 며칠이라곤 하나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헥토르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물론 진짜 미칠 지경인 것은 아니고 조금 엄살이 들어간 것이지만, 어쨌든 정말 괴로운 일이긴 했다.

지옥의 상급 악마로서 하고 싶은 일은 다 해오던 그였는데.

철컥!

시안이 감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헥토르가 이것도 빨리 풀라며 사슬에 메인 손과 발을 들이대었다.

그것을 풀어주기 전, 시안이 잠시 말을 보태었다.

“네 입장과 임무는 잘 알고 있겠지?”

“당근 외워놨지. 일단 나는 너한테 지고 완전히 굴복해서 자진으로 노예 목걸이를 찬 얼간이 놈이란 설정이고, 임무는 벤델 영지의 흑탑에 안내하는 거잖아? 거기서 발견하는 단서도 모조리 모으고.”

“잘 아는군.”

“그러니까 빨리 좀 풀어봐. 바깥 공기 좀 쐬어보자 빨리.”

“한 가지만 더.”

“또 뭔데!”

시안이 자꾸 뜸을 들이니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는지 헥토르가 버럭 소리쳤다.

시안이 놈의 팔목을 묶은 자물쇠에 열쇠를 넣었다.

그리고.

“일행 중에 키가 큰 여자가 있을 건데. 그 녀석을 감시해.”

철컥, 시안이 열쇠를 돌렸다.

“뭐? 왜? 뭔 일인데.”

자물쇠가 끌러져 헥토르의 팔에 자유가 생겼다.

시안이 몸을 일으키며 헥토르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시안은 아까, 일순간 스치듯 보았던 파멜라의 시선을 떠올렸다.

샤밀라의 너스레에 얼렁뚱땅 지나가긴 했지만 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모종의 감정을 품고 있는 눈빛.

분명 그녀와 자신은 처음 보는 사이다. 본래의 시안도 그녀와 접점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낌새가 이상했다.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구는 거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거라면 그냥 네가 좀 귀찮고 끝날 일이니까.”

“쳇. 내가 힘든 건 아주 신경도 안 쓰인다 이거지?”

“꼬우면 잡히지 말았어야지.”

시안이 그에게 열쇠를 던져주었다.

그걸 캐치한 헥토르가 구시렁구시렁거리며 발에 매인 자물쇠를 끌러내었다.

물론 그에게 매인 라비의 보이지 않는 족쇄는 열쇠 같은 걸론 끌러낼 수 없는 것이었다.

* * *

다음 날 유적탐사를 위한 ―실제론 칠흑마탑을 치기 위한― 일행이 영지를 출발했다.

우선 탐사대의 리더인 시안과 그 보좌인 염노. 그리고 염노가 선별한 믿을만한 기사들 5명.

그 뒤쪽으로 파멜라와 3명의 사제가 일행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길잡이랍시고 데려온, 노예 목걸이를 차고 있는 남자.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놈을 데려가도?”

헥토르를 보며 일행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그날 시안과 헥토르의 전투를 직접 보았던 기사 앤디는 시안에게 직접 다가와 물어볼 정도였다.

그런 기사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헥토르는 말 위에서 볕을 쬐며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하지만 저놈이 또 배신이라도 하면…….”

“그랬다간 먼저 목이 날아갈 테니까 문제없어.”

시안이 헥토르의 목에 걸어놓은 노예 목걸이를 가리켰다. 주인의 명령 하나에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을 분사해 목을 잘라내는 무서운 물건이었다.

요즘 시대에는 잘 쓰이지 않는 물건이었으나, 과거에는 심심치 않게 쓰였던 아티팩트였기에 가문에도 물건이 남아 있었다.

“도련님께서 괜찮다 하신다면…….”

시안이 염려 말라 얘기하자 앤디가 포기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눈은 남몰래 빛나고 있었다.

‘헥토르! 무슨 꿍꿍이지?’

저놈이 배신의 기미를 보이나 안 보이나 내가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는 앤디를 보며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쓸데없는 것에 정신 팔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그렇다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기사에게 뭐라 하기도 그랬다.

한편 앤디의 열렬한 시선을 받는 그 헥토르는,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며 드넓은 하늘을 만끽했다.

“끄응~”

그리고 물론, 그런 와중에도 시안의 지시는 잊지 않았다.

일행과 함께 말을 타고 걷고 있는 큰 키의 여자. 온몸을 감싼 갑옷을 입고 등엔 커다란 투 핸디드 소드를 매고 있는.

‘아직까진 뭐 이상한 건 못 느끼겠는데.’

시안의 말대로 몰래 그녀를 감시하며 헥토르가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보기엔 시안이 왜 그녀를 신경 썼는지 모르겠다.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다만 한 가지 의뭉스러운 점이 있다면.

‘왜 이렇게 저놈을 신경 쓰고 있지?’

헥토르의 시선을 받는 파멜라는 정작 시안에게만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본인은 티를 내지 않으려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만 폭풍산의 천둥오우거인 자신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안을 신경 쓰는 모습.

저걸 보면 확실히 시안이 왜 자신에게 그녀를 감시하라 했는지 납득은 되었다.

그렇게, 일행들의 물고 물리는 묘한 느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앤디 경이나 기사들한테 언제쯤 얘길 해줘야 하나……. 염노가 데려온 걸 보면 칠흑마탑에 대해 얘기해도 무방하단 말이겠지.’

‘시안 아그리드……. 확실히 나이에 비해 유능한 느낌이긴 하지만 왕의 눈에 들 정도는 아니라 보이는데.’

‘쳇. 알고 봤더니 저 여자가 뭐 한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쓰잘데기없는 이유인 거 아냐?’

‘도련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 번 배신한 놈은 두 번도 배신할 가능성이 높아요!’

벤델 남작의 영지까지 남은 기간은 빠르게 달려 일주일.

“허허허.”

아무것도 모르는 염노만이 그 사이에서 태평하게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