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5화
클로드의 말에 따르면 파멜라 드레이크와 그녀의 동생 샤밀라 드레이크가 온다고 한다. 순례 차 이곳저곳 돌던 와중에 이곳 아그리드 영지까지 오게 되었다고.
며칠 내로 온다는 얘기에 시안은 출발을 잠시 미뤘다.
샤밀라랑은 그래도 안면도 익힌 사이였고, 무엇보다 파멜라가 따라온다고 하면 토벌의 위험은 확실하게 줄어든다.
염노와 파멜라면 마스터만 둘이다. 이 정도면 이번 일행만으로도 블라텐 용병단보다 전력이 강해지는 셈이다.
거기에 사적인 이유도 있었다.
최연소로 마스터를 달성했다는 그녀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그리고 검을 맞대보고 싶다는 이유.
그런 이유로 그들이 올 때까지 며칠간은 빈 시간이 되었다.
“오오! 도련님의 친우분들이시군요.”
“친우라고 할 정돈 아닌데…….”
“제자예요!”
일전에 이안과 레이나, 드론드를 봤을 때처럼 염노가 란과 샨을 보며 눈을 빛냈다.
특히 란을 향해서는, 시안과 번갈아 가면서 은근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이토록 늠름한 여성분이라니, 과연 도련님과 무슨 관계일까…….
다행인 점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시안과 란에게 직접 묻진 않는 점이었다.
젊은이들의 연애사정에 늙은이가 괜히 끼어들어선 안 될 테니.
한편 염노가 품고 있는 생각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시안이 그를 따로 불러내었다.
“지난번에 줬던 폭뢰, 이번에 큰 도움이 됐어.”
“그러셨습니까?”
“마탑의 문을 부수는 데 썼거든. 그게 아니었다면 꽤 애먹었을 거야.”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한 땀 한 땀 만들었던 보람이 있군요.”
인자한 미소를 짓는 염노에게 시안이 얘기했다.
“그리고 영약도. 그게 아니었으면 헥토르를 이길 정도로 강해지진 못했을 테니.”
지난번에 그가 보약이라고 하며 몰래 챙겨주었던 영약.
그게 없었다면 지금 이만큼 강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시안이 아무리 흑마법사들을 잡고 지옥의 기운을 계속해서 흡수하고 있다지만, 영약 하나만큼 확실하게 강해지는 수단은 없었으니까.
“허허, 영약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약 몇 첩 챙겨드린 것밖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염노는 손사래를 치며 웃을 뿐이었다.
너스레를 떠는 그 모습에 시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알았다. 보약이라고 치지. 대신 다음에 그런 보약이 또 생기면 염노가 먹도록 해. 건강도 신경 써야지.”
“잘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이거 다음번에도 안 그러겠군.
껄껄 웃으며 대답하는 염노를 보며 시안이 쓰게 웃었다.
그러곤 이내, 시안이 손을 들며 얘기했다.
“그보다 오랜만에 한판 어때.”
그 손의 정령각인에서 검은 기운이 풀려나오며, 그의 손에 검 한 자루가 쥐어졌다.
잠시 놀란 듯 그걸 바라본 염노였으나, 이내 씨익 웃으며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천둥마탑의 탑주에게 들었습니다. 마스터를 잡았다고 하시던군요.”
“마스터라기엔 반푼이였지만.”
“그래도 마스터는 마스텁니다. 허허, 이렇게 일찍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무슨 날?”
“도련님이 제 몸에 칼을 댈 수 있을 가능성이 생긴 날 말입니다.”
그 말은 즉 지금까지의 대련은 그럴 가능성이 일절 없었다는 뜻이었다.
수백 번에 달하는 과거의 대련들을, 시안은 모두 이길 생각으로 진지하게 임했었음에도.
하지만 허탈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스스로가 성장했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으니.
“간다.”
“오십시오.”
염노가 손에 검은 장갑을 끼었다. 그 손가락 끝에서 핏빛처럼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시안이 땅을 박차, 염노를 향해 흑검을 휘둘렀다.
* * *
염노와 1:1로 시작된 대련이었으나 불꽃이 피어오르고 폭음이 들리는 소리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로 대련에 많은 관심을 가진 기사들. 도중엔 란과 샨도 참전하게 되어 종국에는 북적거리는 대련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엔 각자의 자유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시간.
시안은 평소처럼 밤의 기운을 연공하기 위해 뒷산에 올랐다. 이번에는 기숙사가 아닌 영지의 뒷산이었지만.
그런데 먼저 와 있는 선객이 있었다.
“후우…….”
작은 폭포가 있는 냇가 근처에서 란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등에 커다란 바위를 짊어지고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전신에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바위의 크기를 보며 시안이 혀를 내둘렀다.
파워 건틀릿을 끼고도 그녀와 같은 짓은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두어 번 드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
쿠웅!
시안을 힐긋 보고는 란이 천천히 바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땀을 닦으며 시안에게 물었다.
“웬일이야?”
“그냥 지나가다가.”
“그래?”
란이 대충 수건으로 땀을 닦나 싶더니, 그걸론 성에 차지 않는지 냇가로 뛰어들었다.
첨벙! 냇물에 반쯤 잠긴 채로 그녀가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았다. 냇가의 물이 그녀의 귀와 꼬리를 쓰다듬으며 땀을 씻어주고 있었다.
“호랑이는 수영을 좋아한다고 하더니.”
“난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그런가?”
“뭐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더울 때 가끔 몸을 담그는 정도?”
그녀가 거친 숨을 고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영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천둥마탑의 사건 같은 경우엔 그녀와 샨은 외부인이었기에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초반에 도적 떼를 잡는 정도라면 충분히 협력할 수 있겠지만 영주성과 마탑의 갈등으로 발전한 이후론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그렇기에 시안의 활약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듣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마스터에 발을 걸쳤다는 헥토르란 마법사를 단신으로 제압했다고.
“아까, 염노 할아버지 강하더라.”
“강하지. 한 번도 못 이겨봤다. 오늘도 졌고.”
오늘 아침의 일도 떠올랐다. 염노와 시안의 대련으로 시작되어 꽤나 규모가 커진 대련회.
거기서 시안과 염노의 대련을 목격했다.
진짜 마스터에게도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맹공을 가하던 그의 모습을.
분명 2년 전에는 자신보다 훨씬 아래였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반년 전 갓 입학했을 무렵엔, 자신은 어느새 추월당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 등이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수련을 2배 3배로 늘리면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데 학기말부터 조짐이 보이더니, 특히 최근에 와서는 차이가 극명히 벌어졌다.
거리가 조금 차이 날 뿐이지 그래도 같은 곳에서 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녀는 홀로 남아버렸다.
“시안.”
“왜.”
“영주님은 강하지?”
“당연한 소리를.”
“염노 할아버지도 강했고, 빌프리트 아저씨도 강하고.”
“우리 영지에서 가장 쎈 세 사람이니까.”
“헥토르란 놈도 강했나?”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지만…… 약하진 않았지.”
“나는?”
“…….”
시안이 웬일로 약한 소리를 하는 그녀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찬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평소보다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편안해 보이는 건 겉모습뿐이었지만.
“약해.”
시안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 중에는 가장 약했다.
유설에겐 프시케가 있고 알렌에겐 알티마가 있다. 프시케는 말할 것도 없고 다크 이터를 몰아붙이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알렌 역시 란보단 강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는 호월족인 란이야말로 최강이어야 맞을 텐데, 라비나 프시케나 알티마 같은 존재들 때문에 결국 그녀가 최하위가 되어버리다니.
‘에르제도 있긴 하지만.’
에르제의 경우는 조금 얘기가 달랐다
.
평범한 대련이라면 란이 이길 테지만, 만약 대련이 아니라 상대를 죽일 수 있냐 없냐로 내기를 한다면.
자신은 열에 아홉은 에르제 쪽에 걸 것이다.
“…….”
그녀가 잠시 말없이 시안의 대답을 곱씹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겉으로만 봐선 알 수가 없었다.
이내 그녀가, 촤악! 물보라를 일으키며 냇가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고마웠다. 신세 많이 졌어.”
“돌아갈 건가?”
“그래야지. 방학 내내 여기 있을 수도 없으니까.”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한 모양이다.
“자카르타에 오게 되면 아슬라 가에 들러. 잘 대접해 줄 테니까.”
“기억해 두지.”
산을 내려가는 그녀를 두곤 시안이 가던 길을 올랐다. 그의 수련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으니.
한편 란은 기운을 일으켜 젖은 옷과 머리를 말리며 영주성으로 내려왔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련을 빼먹은 일이 없었다. 아그리드로 수련 여행을 온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반복된 단련만이 강해질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반년 동안 자신은 물론 강해졌으나, 시안은 그 이상으로 강해졌다.
지금의 방법으론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다른 방도를 찾아볼 따름.
폐관(閉關)에 들든, 거인들의 무덤에 단신으로 여행을 떠나든, 아니면 아빠 밑에서 더더욱 많은 것을 흡수하든.
무엇이 됐든 변화가 필요했다.
“샨, 이만 돌아가자.”
영주성에 도착한 그녀는 곧바로 샨을 찾았다.
“응? 벌써?”
“꽤 오래 있었으니까. 더 이상 남의 집에 폐를 끼칠 수도 없잖아.”
“그래도…….”
샨이 가기 싫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문득 란의 눈을 보았다.
그가 불쑥 얘기했다.
“스승님한테 무슨 소리 들었어?”
아무것도, 라고 대답하려던 그녀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러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래?”
“약해 빠져서 팰 맛도 안 난다더라.”
“하하…….”
스승님이 그런 식으로 얘기했을 것 같진 않은데…….
뭐 농은 둘째 치고 샨은 란이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명쾌한 이유였다.
“그래서 자존심 상했구나?”
“……응.”
자신의 누나라서가 아니라, 그녀는 어릴 때부터 주변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였다.
자카르타에서, 적어도 아슬라가의 주위에선 란보다 뛰어난 아이는 없었다.
문무 양쪽으로 모두.
그러니 그만큼 충격이었을 것이다.
항상 독보적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보다 강한 또래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아버님이 좋아하시겠네.’
겐이 항상 샨에게 했던 말이 있다. 네 누나는 좀 져봐야 한다고. 가끔 한두 번 패배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로 패배하는 일 말이다.
질 줄 모르는 이는 결국 이길 줄도 모르게 된다는 것이 겐 아슬라의 무학이었으니.
“그래. 돌아가자.”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귀향할 때였다.
* * *
란과 샨이 영지를 떠나고 며칠이 흘렀다.
손님을 보낸 아그리드 영지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다.
파멜라와 샤밀라, 그리고 몇 명의 사제들이 더 붙은 순례단.
“시안 님! 오랜만이에요!”
샤밀라가 먼저 시안을 알아보곤 힘차게 말을 걸었다.
샨이 떠나니 이번엔 샤밀라인가……. 왠지 주변이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았다.
“샤밀라. 아는 사이인가요?”
“네! 저번에 말했던 그…….”
그녀가 파멜라에게 시안에 대해 설명했다. 일전에 대량의 구울이 발생했던 사건에서 해결을 했던 남자라고.
순간, 파멜라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구울 사건이라면…… 베리엄이 저질렀던 일이군.’
그것도 시안 아그리드의 짓이었나. 파멜라의 안에서 어두운 감정이 한 번 더 꿈틀거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안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안 아그리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파멜라.”
“…….”
[마룡왕이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며 조소를 보냅니다.]
마룡왕의 사념을 들으며 잠시 시안의 손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건틀릿을 낀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파멜라 드레이크입니다.”
익숙하게 속내를 숨기며, 그녀가 웃는 낯으로 악수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