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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93화 (93/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3화

사건이 끝나고 시안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클로드가 마법사들을 이끌고 직접 성으로 방문했다.

자리를 비운 영주의 대리로서, 그리고 사건을 해결한 당사자로서 시안이 그들을 맞았다.

“정말 고맙네. 공자 덕분에 탑이 살았어.”

클로드가 주저 없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였다. 뒤쪽에 있는 마법사들 역시.

그들 대부분이 생경한 표정으로 시안을 보았다.

‘영주성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그것도 그 망나니가…….’

‘어렸을 때 탑에서 그 난리를 피우던 것이 아직까지 기억나는데, 생각보다도 의젓하게 자랐군.’

그들 중 적지 않은 자들이 시안의, 본래의 시안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소문은 물론 아즐렛에게 전해 들은 것도 있고 오며 가며 직접 마주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때마다 마탑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돌던 말이 있었다.

차기 영주는 대책이 없다고.

그런데 지금 보니 완전히 오판이 아닌가?

“이번 일에 대한 보답으로 약소하지만 몇 개 준비했다네. 당장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만…….”

클로드가 손짓을 하자 마법사들 중 몇 명이 가지고 온 짐들을 풀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금화가 들어 있는 궤짝. 그 외에도 수십 점의 아티팩트에 값비싼 원단에 순도 높은 질 좋은 철괴 따위도 있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재화들을 보며 뒤쪽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조차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시안의 눈은 침착하기만 했다.

‘가주의 성향이라면 저 중 일부는 내게 줄 수도 있겠지만.’

시안이 잠시 마음속 저울을 매달아보았다.

이걸 받는다면 아마 일부는 자신에게 하사될 것이다. 금화는 물론이고 쓸 만한 아티팩트 몇 점만 받아도 보수로선 썩 나쁘진 않다.

하지만.

“됐습니다. 이럴 여력이 있으면 탑의 재건에 힘쓰세요. 그게 영지를 위한 일입니다.”

시안은 거절했다.

설마 거절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던지 클로드나 다른 마법사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 말해주면 우리야 감사하다만…… 그래도 받게나. 덕담 몇 마디로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큰 빚을 지지 않았는가.”

클로드가 조심스레 얘기했다. 그러나 당연히 시안은 그냥 넘어가려고 거절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받을 것은 받을 생각이다.

“괜찮습니다. 정 그렇게 마음에 걸리신다면 앞으로도 저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앞으로도?”

“예. 앞으로도.”

“허어.”

마법사들이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시안의 말은 그들에게 있어 한 가지 뜻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후일 내가 영주가 된 후에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는 의미.

클로드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좋네. 적어도 내가 탑주로 있는 동안은 공자와 좋은 관계를 이어가겠다고 마나에 걸고 맹세를 하겠네. 아, 물론 공자가 우리를 핍박하거나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다만.”

“충분합니다.”

마나에 건 맹세. 딱히 지키지 않을 경우 마나를 잃는다거나 하는 구속력이 있는 맹세는 아니다.

그러나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문구였다.

스스로가 쌓아 올린 모든 명예를 걸겠단 말과 같은 말이었으니.

클로드나 다른 마법사들은 지금의 대화를 천둥마탑과 차기 영주와의 새로운 동맹 계약을 체결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상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시안은 결코 영주가 될 수 없는 이였음에도.

‘뭐 딱히 사기 계약 같은 것도 아니지. 영지 병력을 데려가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헥토르를 잡은 건 나니까.’

자신이 영주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숨기긴 하였으나, 그래도 헥토르의 손에서 탑주를 구해낸 것은 영지의 병력이 아니라 시안 개인이다.

그런 의미로 그렇게 양심에 찔리는 일도 아니다.

“하하, 이거 다행입니다. 이번 일로 후계가 우리 천둥마탑을 얕보거나 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 사람아, 시안 공자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근래 들어 이렇게 의젓한 젊은이를 본 적이 없네. 우리 젊은것들도 공자의 반만이라도 닮았다면 이번 일은 없었을 터인데…….”

“수행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니……. 조금은 개선할 수 있나 알아보도록 하세.”

“뭐, 그건 탑에 돌아가서 생각하도록 하고. 지금은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아닌가.”

흡족한 표정의 마법사들과 시안과의 대화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딱히 중요한 얘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대화가 몇 차례 지나가고 사건의 수습에 대한 얘기나 영지와 마탑의 관계에 대해 원론적인 이야기나 조금 오가고.

회담이 모두 끝나고 마법사들이 영주성을 떠나기 시작했다.

다른 마법사들이 모두 문밖으로 나가고 마지막, 클로드가 잠시 남아 시안을 돌아보았다.

“공자. 헥토르는 어찌할 생각인가?”

“일단 가둬놨습니다. 심문을 통해 정보를 캐내고…….”

“캐내고?”

시안이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저희 쪽 사람이 되도록 포섭해 볼 생각입니다.”

“뭣? 그게 무슨 말인가? 흑마법사들에게 얘기가 통할 리가 없지 않나?”

“괜찮습니다. 정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노예 목걸이라도 채울 생각이니까.”

사실 목걸이는 이미 채웠다. 어설픈 마법사가 제작한 것보다 훨씬 확실한 지옥계의 족쇄 말이다.

“허어…… 뭐 공자가 할 일에 내가 이래라저래라할 입장은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항상 신중을 기울이게나. 여차할 땐 그냥 목을 쳐!”

클로드가 차가운 강철과 같은 눈빛으로 재차 당부했다.

20년 동안 제자로 보살폈다곤 하나 그의 마음은 요 몇 달 사이 이미 모두 떠나갔다.

사실 그건 헥토르가 처음부터 첩자였다는 말 때문이었다.

만약 중간에 무슨 사연이 있어 배신을 하게 된 것이라면 클로드 역시 생각하는 바가 많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가면을 쓴 거짓된 사이.

클로드는 그런 것에 언제까지고 연연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5대 마탑의 탑주라는 높은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던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그의 당부에 시안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 *

영주성의 깊은 지하에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다.

일전에 잡아 왔던 베리엄도 이곳에 갇혀 있고 ―퀭한 눈에 수염도 덥수룩한 것이 거의 폐인 상태였다― 그 외에도 영지에서 크고 작은 죄를 짓고 갇혀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시안이 그중 한 곳으로 향했다.

앞을 감시하고 있는 간수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고 ‘그 죄수’가 들어 있는 감옥에 홀로 들어갔다.

“지상 구경 시켜준다며! 시켜준다며!”

들어가자 대번에 창살 너머에서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사슬에 꽁꽁 묶여 붙잡혀 있는 뇌력천주가 있었다.

“약속이랑 다르잖아! 지킬 것만 지키면 된다며! 근데 왜 가둬두는 건데!”

“좀만 기다려 봐, 헥토르. 그리고 소리가 너무 크다.”

“큭…….”

시안의 말에 뇌력천주, 헥토르의 입이 강제적으로 다물어졌다.

시안이 간수용의 의자를 끌어와 그곳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감옥 안에 주저앉아 부루퉁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헥토르가 보였다.

남들 앞에서 뇌력천주라 부를 수는 없기에 본래 몸의 이름인 헥토르로 부르기로 한 시안이었다.

“그런 일을 저지른 너를 그냥 풀어줄 수는 없잖아. 당분간 심문을 한다는 이유로 적당히 가둬둘 거다. 조만간 꺼내줄 테니까 지금은 얌전히 있어.”

“크윽…… 하늘도 안 보이는 이런 칙칙한 곳에…….”

“얼마 안 걸릴 테니까 걱정 마라. 너한텐 50년도 얼마 안 되는 시간이라며? 며칠 기다리는 게 그렇게 힘드나?”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 얘긴 됐으니 지난번에 하다만 얘기나 계속해 보지.”

“뭔 얘기?”

헥토르가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여전히 자기 할 말만 하는 시안의 모습에 불만이 가득한 모습.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칠흑마탑에 대한 얘기.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

“알고 있는 거라고 해도…… 난 딱히 그놈들하고 깊게 연관돼 있던 건 아니라서.”

“그래?”

“내가 화신으로 삼았던 건 헥토르뿐이야. 마침 산에서 뒹굴기만 하는 게 지루해지던 참에 지상에서 신호가 왔었거든.”

헥토르의 말에 따르면 칠흑마탑엔 지옥 너머로 연결을 할 수 있는 모종의 수단이 있는 모양이다.

그걸 통해 지옥의 악마와 접촉해 스스로를 바치고 힘을 얻는다고.

“근래 내가 손을 댄 건 헥토르밖에 없어. 다만 다른 놈들 중엔 꽤나 지상에 집착하는 놈들도 있긴 한 모양이야. 심한 놈은 몇 명이나 되는 화신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니까.”

“누구지, 그 집착하는 놈들이란?”

“일단 내가 알기론 마룡왕이랑 해령궁주가 그렇고…….”

허 참, 다 아는 이름들이군.

“그밖에 군주급 중에선 악몽의 주인 정도? 그 아랫급은 뭐 셀 수도 없고.”

“악몽의 주인이라…….”

마룡왕과 해령궁주, 그리고 프시케와 동급인 군주급의 악마. 새로 나타난 이름을 시안이 머릿속에 잘 새겨 넣었다.

“다른 쪽으로 물어보지. 칠흑마탑의 본거지가 어딘지 알고 있나?”

“몰라. 내가 알기로 칠흑마탑은 점조직 같은 걸로 아는데 소속원은 자기 조직의 위치밖에 모를걸. 적어도 헥토르는 그랬어.”

“본단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지시는 어떻게 받지?”

“뭐 대충 아티팩트 같은 거라도 쓰고 있겠지. 아니면 의외로 비둘기를 날리고 있다던가?”

“모른다는 말이군.”

“어.”

헥토르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다고 대답할 때만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녀석이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자신을 골탕 먹이는 게 그렇게 좋은 모양이다.

뭐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점조직이라…….”

가주가 저렇게 뻔질나게 나다니고 있는 데다 천도맹이란 조직까지 있는데도 놈들이 아직 박멸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 곳을 찾아내 쳐부숴도 다른 곳에 몇 개나 되는 지부가 아직 남아 있어 그런 것이겠지.

지부 하나를 부숴도 그 시간에 대륙 반대편에선 몇 개나 되는 지부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걸 어떻게 죄다 찾아내 없애겠는가.

보통의 마탑과 달리 칠흑마탑은 인원보충이 크게 어렵지도 않을 테니까.

‘딱히 열심히 수련을 하지 않아도 강해진다는 건 그것만으로 큰 매력이니.’

이번 천둥마탑의 사태에서 많은 마법사들이 헥토르의 꼬임에 넘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수련은 고통스러워서 싫지만 힘은 누리고 싶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세상에 어디 한둘이겠는가.

역시 놈들을 모두 소탕하기 위해서는 본단의 위치나 놈들의 탑주를 찾아내 제거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다만.

‘뭐 그건 가주나 천도맹에서 알아서 하라 그러고.’

시안은 딱히 그들을 박멸하거나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가 칠흑마탑에 바라는 일은 하나뿐이다.

놈들이 품고 있는 지옥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해서 더더욱 강해지는 것.

그런 의미로 놈들이 빠르게 박멸되면 오히려 좋지 않다.

가주와 칠흑마탑이 적당히 밀고 당기며 대립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 중간에서 놈들의 기운만 쏙 빼먹어 계속해서 강해지는 것.

그게 자신에겐 베스트였다.

“그럼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겠군.”

그러자면 이번 일은 놓칠 수 없겠지.

“헥토르가 있던 마탑의 위치는 어디냐.”

헥토르가 있던 마탑의 위치. 시안이 그것에 대해 질문했다.

방학 중에 시간을 보낼 일론 더할 나위 없었다.

* * *

아그리드 영지의 성문 앞.

그 앞을 지키는 경비원이 잔뜩 군기가 든 자세로 직립 부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가슴에 손을 올려 군례를 취하며 크게 외쳤다.

“충! 돌아오셨습니까!”

영지의 주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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