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0화
콰과과과과광―!
폭음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염노의 불꽃이 꽉꽉 들어차 있던 아티팩트다.
성문과 비견될 정도의 방어력을 가졌다던 마탑의 정문이 넝마가 되었다.
때는 이때라 빌프리트가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돌입해라!”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그 앞에선 기사들이 앞장서서 병사들을 이끌며 훤히 문이 뚫린 마탑으로 돌입했다.
“탑주가 유폐되어 있다! 배신자들을 처치하고 탑주를 찾아 보호해라!”
어젯밤 시안이 다르칸에게 들었던 얘기.
천둥마탑주 클로드 데 칸이 탑 지하에 유폐되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기존의 계획대로 포위만 한 채 시간을 끌지 아니면 돌입하여 클로드의 신병을 보호할지 고민한 결과,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마탑 전체가 배신했을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굳이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그게 마탑주에게 은을 팔아둘 기회라면야.
“뭐야!”
“자, 잠깐!”
마법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몇 놈은 다급히 손을 들어 마법을 자아내기도 하였으나 끝끝내 그 손에서 마법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영주군을 향해 공격을 행한다면 그건 반란이 되니까.
“길을 열어라.”
그들은 마탑을 흙발로 짓밟고 들어오는 시안과 병사들을 무방비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헥토르에게 맡기고 무작정 일을 일으켰던 그들은, 헥토르의 지시가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크윽……!”
“어, 어이!”
뒤쪽에 있던 한 마법사의 상태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에서, 일전의 대장 복면의 때와 같은 붉은 보석이 튀어나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장 복면은 스스로 가슴을 찔러 보석을 끄집어내었다면, 이 마법사의 경우 보석이 억지로 비집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는 것.
“아악!”
“크악!”
그와 같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괴이한 현상을 보며 병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슴에 빛나는 붉은 보석이 박힌 채 충혈된 눈으로 일어서는 마법사들.
병사들 입장에선 끔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쏴라! 위험한 실험으로 제정신을 잃고 마탑을 점거한 무뢰배들이다!”
빌프리트의 외침에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며 활을 꺼내 당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쏘는 단궁의 화살이 마법사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 대부분은 마법사들이 펼친 실드에 막혀 떨어졌지만 일부는 사이를 파고들어 마법사들의 몸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한두 대 맞은 정도로 그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콜 라이트닝.”
그들이 화살을 쏴대고 있는 병사들 무리로 손가락을 튕겼다.
“!”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곤 빌프리트가 당장에 앞에 나섰다.
파지지지직!
곳곳에서 쏟아지는 벼락을 그가 오러에 싸인 검을 휘둘러 쳐내었다.
빌프리트가 신음을 삼켰다. 분명히 제대로 쳐냈음에도 손목까지 짜릿하게 올라오는 전격.
그러는 순간에도 놈들은 계속해서 벼락을 쏘아대고 있었다.
‘화살론 힘들다.’
쏟아지는 마법과 놈들을 지키는 실드를 보곤 빌프리트가 눈을 찌푸렸다.
1층의 천장은 훤히 뚫려 있었고, 마법사들은 저 위쪽에 보이는 2층에 대부분 포진해 있는 구조.
안 그래도 고저 차의 불리함이 있는데 이쪽의 유일한 공격수단인 화살은 놈들의 단단한 쉴드를 뚫을 수 없었다.
‘2층을 뚫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지금 자신은 사방에서 짓쳐오는 벼락을 쳐내느라 여념이 없다. 그 하나하나는 어렵지 않게 쳐낼 수 있지만, 문제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 따로 빠져나와 2층을 돌파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리라.
그 무렵.
‘라비.’
‘웅!’
빌프리트가 안전하게 막아주는 그 뒤쪽에서, 시안이 든 검이 기다란 검신을 가진 연녹빛의 검으로 바뀌었다.
‘2층 정도야 창해도 닿긴 하겠지만.’
창해는 물줄기를 동반하는 검이다. 낙뢰가 수도 없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창해를 꺼내 드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빌프리트.”
“예! 무슨 일입니까!”
“놈들의 실드를 깰 테니 움직이도록.”
“예?”
시안이 팔을 뒤로 당겼다. 이윽고 그 팔이 힘껏 휘둘러지며.
[ 비검(飛劍) ]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마법사를 향해 검을 던졌다.
카카카카카캉!
검이 빠르게 회전하며 마법사들을 지키던 실드를 일거에 휩쓸었다. 오러가 담긴 검을 실드 같은 기본 마법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한편으론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는 라비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안하다고 한마디 사죄를 던지며 시안이 소리쳤다.
“빌프리트!”
“예!”
실드가 벗겨진 마법사들 사이로 화살비가 쏟아진다. 놈들이 당황하는 그사이 빌프리트와 기사들이 계단을 날 듯이 뛰어올라 2층을 제압해갔다.
위층에서 계속해서 마법사들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한 번 2층을 뚫었으니 이젠 시간문제이리라.
‘다르칸.’
「이쪽. 따라와라.」
가장 고비가 될 수 있는 부분만 풀어주곤 시안은 다르칸과 함께 탑의 지하로 가는 길을 찾았다.
“도련님!”
병사들과 멀어져 혼자 지하로 향하는 시안을 보며 2층의 빌프리트가 뒷목을 잡았다.
일전에 미끼를 자처했을 때부터 든 느낌이었지만, 도련님의 위험을 자처하는 경향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실력에 자신이 붙어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위태위태한 느낌이었다.
“앤디 경! 도련님을 따라가게!”
“예!”
그가 당장 옆의 기사 하나를 붙잡고는 도련님을 따라가라 지시했다.
앤디가 시안을 뒤쫓아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가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어느새 붉은 눈을 한 마법사들의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말로 무슨 위험한 실험을 한 게 맞구나.’
일단 돌아가자고 했던 자신의 진언을 듣지 않고 마탑을 압박했던 도련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대체 이걸 어찌 알고 행동을 취하신 것일까.
그러나 의문은 나중이었다.
“헙!”
아직 전투 중이다.
콰과과과과광!
그가 떨어지는 벼락들을 오러로 모두 쳐내었다.
* * *
“도련님! 앤디입니다! 모시겠습니다!”
시안이 뒤따라온 기사를 슬쩍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대동하곤 시안이 다르칸의 안내를 따라 지하로 향했다.
“붙잡아!”
도중에 그를 막는 마법사들이 나타났지만.
“영주의 아들에게 손을 댈 생각인가?”
“그, 그건…… 헉!”
푸슉!
일순간 움찔하는 놈들을 모두 베어 넘기며 시안이 막힘없이 내려갔다.
‘전원이 칠흑마탑의 주구들은 아니군.’
한 번 찔러본 것으로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놈들이 칠흑마탑에 적을 둔 이들이었다면 영주 아들을 들먹이는 자신의 말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위에서 싸우고 있는 마법사들도 모두 어딘가 자아를 잃은 것처럼 보이고.
‘관계자는 헥토르 하나인가? 아니면 그놈도 적당히 매수된 놈?’
그건 클로드를 찾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간간이 나타나는 마법사들을 모조리 베어가며 시안이 지하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들어가자 촛불 몇 개에만 의지하는 음산한 분위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마탑의 징벌방…… 단적으로 말해 감옥이 늘어서 있는 감옥 구역이었다.
“누, 누군가!”
“우리 좀 꺼내주게!”
시안과 앤디가 들어오자 사방에서 풀어달란 소리가 들려왔다.
본디 탑을 지키고 있던 장년 혹은 노년의 마법사들이었다.
“앤디 경, 다 풀어주고 가세하게 시켜.”
“예.”
시안과 앤디가 그들을 해방시켰다. 동시에 구하러 왔다는 것을 알리고, 위쪽에서 싸움이 일고 있다는 것도 얘기했다.
“내 이놈들을 죄다!”
“다 조져버리겠다!”
풀려난 마법사들이 씩씩거리며 위쪽으로 향했다.
말이 늙은 마법사들이지 죄다 근육질에 매우 건장한 모습이었다. 천둥마탑의 무식한 훈련을 수십 년이나 받은 이들이었기에 몸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혈석만 아니었다면 수련이 부족한 젊은 마법사들에게 제압당할 일도 없었으리라.
“다 풀어줬습니다, 도련님! 하지만 탑주는 여기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알아. 따라와.”
텅 비어버린 을싼한 감옥 구역을 뒤로하곤 시안이 더욱 아래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감옥 구역보다 더욱 어두운 곳이었다.
벽에 나 있는 자그마한 촛불만이 빛의 전부.
그 작은 빛에 의지하여 시안이 앞을 바라보았다.
클로드 데 칸.
일전에 봤던 호탕한 모습은 다 어디 가고 초췌한 몰골의 그가 앉아있었다.
「도와줄 이를 데려왔다.」
파직.
다르칸이 스파크를 튀기며 얘기했다.
“고맙군, 다르칸. 탑의 신수씩이나 되는 존재한테 잔심부름을 시켜서 미안하구만…….”
「딱히.」
다르칸이 그리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가버린 것인지 아니면 힘을 아끼기 위해 영체로 돌아간 것인지, 이쪽에선 알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위쪽이 시끌시끌한 것 같더니만. 어느 은인께서 오신 건가? 혹시 후작이 직접?”
“납니다, 탑주.”
“응?”
클로드가 어둠 속을 꿰뚫고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놀라움과 그리고 다소의 흥분이 깃들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후작의 아들내미가 아닌가?”
일전에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말을 건네며 그가 키득거렸다.
그러나 이내 콜록거리며 기침을 내뱉었다.
보석검이 박혀 있는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올라와 목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당신 정도 되는 분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서걱.
시안이 창살을 자르며 물었다.
클로드의 경지는 마스터급이었으나 그저 그런 마스터가 아니다. 염노의 말에 의하면 하이마스터에 근접해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엔 들지 않아도 스무 손가락 안에는 능히 들 만하다는 얘기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무력하게 갇혀 버렸는지.
“무식하게 힘만 세가지고, 미처 제자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네.”
제자라…….
시안이 지금 시점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질문했다.
“헥토르는 칠흑마탑 놈입니까?”
클로드가 팔과 다리의 사슬을 끊어주는 그를 바라보았다.
후작의 아들, 시안 아그리드.
그가 칠흑마탑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이 딱히 신기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왜냐면 천도맹의 정보를 통해 이미 들었으니까.
클로드 역시 제레흐와 같은 천도맹의 일원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하더군.”
역시 그랬군.
시안이 납득하며 클로드의 사지를 구속하던 사슬을 모두 쳐내었다.
그러곤 마지막 구속에 손을 뻗었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가슴께에 박혀 있는 보석검.
“조심하십시오, 공자. 적당히 쑥 빼도 되는 그런 물건이 아니거든요.”
그때, 뒤쪽에서 다가오는 인영이 있었다.
“도련님!”
앤디가 시안의 앞을 막으며 검을 겨눴다.
그 뒤에서 시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헥토르.”
“대단하십니다. 스승님이 여기에 갇혀 있는 건 어떻게 안 겁니까?”
“…….”
헥토르는 다르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탑주가 아니었기에 당연한 일.
시안은 친절하게 그의 질문에 답해주거나 하진 않았다.
말없이 검을 겨눴을 뿐.
“이렇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군요. 차라리 계획을 바꿔야겠습니다.”
[뇌력천주가 지상을 주시합니다.]
파직! 파지직!
그의 몸에 뇌기가 치닫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하늘의 번개와도 같은 거대한 힘.
문득 시안은 예전 마룡왕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공간이 팽창하며 오로지 적과 자신 둘밖에 없는 것과 같은 느낌.
그러나 안드라스가 영혼을 잃고 껍데기가 되었던 것에 비해 헥토르는 오롯한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신을 납치하고 신물과의 교환을 요구해야겠습니다. 아무리 검왕이라도 제 아들을 모른 척하진 않겠죠.”
[뇌력천주가 누워 배를 긁적입니다.]
[뭐가 됐든 좋으니 알아서 하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공자, 도망치게! 자네가 상대할 만한 놈이 아니네!”
클로드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시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망칠 거였으면 애초에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안이 헥토르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흑마법사가 강하면 강할수록 역으로 그에겐 기회였다.
한층 더 성장할 기회.
‘라비, 목줄 준비해.’
놈을 베고 흡수할 기운의 양과 새로운 검을 생각하면 도망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