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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89화 (89/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9화

헥토르가 마탑을 장악하는 과정은 너무도 손쉬웠다.

세상 모든 집단이 그렇겠지만 천둥마탑은 특히 더 갈등이 극심했다. 뇌흔을 만들기 위한 수행 방법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대 마탑주로부터 내려오던 전통. 그것을 바꾸기 싫어하는, 바꾼다는 발상조차 없는 종래의 마법사들에게 반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과도한 반발이 없던 것은 그 수행이 실제로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런 불만이 가득한 마법사들에게 보다 손쉽게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정제한 혈석의 가루, 마법사에게 있어 마약과 같은 그 약을 은밀히 건네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멍청한 놈들을 선동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뒤는 간단하다.

시기를 봐 노년층의 마법사들을 모두 제압한다.

메이지급이 대다수인 젊은 층과 달리 노년층은 하이메이지급이 대다수. 전력의 차이는 명백했지만 상관없었다.

[뇌력천주(雷靂天主)가 흡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주인의 힘이 담긴 혈석이 그 정도 차이쯤은 가볍게 넘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덕분에 헥토르에 대한 젊은 마법사들의 지지도는 압도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메이지급에 불과했던 스스로가 헥토르에게 받은 약을 복용하는 것만으로 하이메이지를 압도한다.

그 결과는 신앙에 가까운 환상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장해물이 마스터급의 마도사인 마탑주 클로드였다만.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제자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부터냐.”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스승의 중얼거림에 헥토르가 사뭇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 태도에 화낼 기력도 없이 클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변절했지?”

“변절이라…….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칠흑마탑의 일원이었으니까요.”

“원래부터?”

“스승님께 주워진 그 순간부터란 말입니다.”

클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20년 전. 당시 아직 10살 남짓하던 헥토르를 주웠을 때.

차가운 눈 속에서 벌벌 떨던 가녀린 아이를 기억한다. 못내 불쌍하여 탑으로 데려왔던 일도. 웬 거지새끼를 주웠냐며 아직 살아계셨던 사부님께서 역정을 내셨던 것도 기억한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칭찬해 주신 제 뇌기에 걸맞은 체질도 사실 당신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받아온 힘에 불과하답니다.”

어린 나이에 뇌기를 쑥쑥 받아들이는 아이의 모습에 무척 기뻐했었다.

비단 재능 있는 제자를 들일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아이가 홀로 세상을 헤쳐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러나 모두 거짓이란다.

그저 자신의 눈에 들기 위한 거짓말. 거짓된 재능.

“가끔 흑마법사에 대해 열변을 토로하실 때는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푸흡! 말로는 잘도 나불대시더군요.”

“어째서…….”

“예?”

“어째서 정체를 드러냈지? 몇 년만 더 기다렸다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 마탑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딱히 마탑을 먹는 게 목적은 아닙니다. 혹시 뻐꾸기의 습성을 아십니까?”

“……탁란 말이냐?”

“맞습니다. 제게 있어 이 마탑은 그냥 제 성장을 위한 둥지에 불과했습니다. 제 주인의 힘과 닮은 천둥마탑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구요.”

그리고 20년에 걸쳐 모든 것을 습득했다.

탑주의 재능 넘치는 제자로서 온갖 사랑과 정성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얻을 건 많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마침 탑 쪽에서 임무 하나가 날아와 이참에 둥지를 뜨기로 한 거죠. 아, 지금 말한 탑은 이곳이 아니라 칠흑마탑을 말하는 겁니다.”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라……. 오만하구나.”

“사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이미 스승님을 뛰어넘었으니까요.”

헥토르가 손가락으로 클로드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검은 보석검이 박혀 클로드가 발하는 뇌기를 모두 벽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그것을.

그건 그의 승리의 징표였다.

“어쨌든 아직 정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지금 바깥쪽 일이 심상치가 않아서 스승님도 패로 활용을 해야 하나 고민 중이거든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오죠.”

헥토르가 떠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감방 안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를 지워버리겠다는 듯 클로드가 낮게 한숨을 토해내었다.

“제자야. 그토록 얘기했건만 아직도 다 배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탐구 없는 힘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직! 파지직!

그의 가슴에 박혀 있는 보석검이 계속해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그는 계속 번개를 일으켰다.

열 번도, 백 번도, 천 번도 더.

그리고 마침내.

지직…… 지지직…….

변화가 나타났다. 보석검 자체는 멀쩡했다. 하지만 클로드의 앞에 작은 스파크가 무언가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연결이 좋지 않은 통신구처럼 흐릿하기만 했으나, 분명 무언가가 나타났다.

“다르칸…… 예전에 약속했던 부탁을 지금 쓰도록 하마…….”

다르칸. 초대 탑주의 동료로 천둥마탑을 세우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초대 탑주를 기리며 이 탑의 지하에 잠들어 있는 번개의 정령.

오로지 탑주에게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탑의 전설, 아니, 역사 중 하나였다.

“바깥에 내 얘기를 전해다오.”

그 흐릿한 형상을 향해 클로드가 얘기했다.

* * *

“도적 떼가 또 나타나지는 않았나?”

―아뇨, 아직까지는요. 상인들도 무사히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마법대의 상태는 어때?”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러네요. 얼핏 보기로는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탑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막사 안. 시안이 통신구를 통해 영주성의 체샤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헥토르가 무척 수상하긴 하나 아직 칠흑마탑과의 연관이 확실히 보여 온 것이 아니다. 때문에 영주성과의 긴밀한 연계는 필수였다.

“아즐렛에겐 물어봤어? 탑주가 어디 갔는지.”

―그것도 모른대요. 아, 근데 그런 말은 했어요. 영지를 벗어날 정도의 일이면 당연히 자신의 귀에도 들어왔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아즐렛과 탑주가 같은 배분이라고 했던가?”

―예. 본인 말로는 라이벌이었다고 하는데, 다른 마법사에게 듣기로는 우등생이랑 만년 열등생 사이였대요.

둘의 관계는 어찌 됐든, 탑주가 영지를 벗어날 일이 있을 때마다 연락이 들어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이번에는 그런 연락이 없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겠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둘 중 하나겠군.”

―둘 중 하나?

“제자에게만 알리고 남들 모를 이유로 영지를 나갔거나, 아니면 변고를 당했거나.”

―어떡하실 거예요?

“조금만 더 대기해 보지. 넌 계속해서 가주님한테서 물건이 오지 않나 확인해.”

―넵.

뚝.

그걸 끝으로 통신구가 끊어졌다.

시안이 천을 걷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여러 개의 모닥불과 그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병사들의 막사가 보였다.

별이 흐드러진 밤하늘 아래.

이미 늦은 밤이라 그런지 경계를 서고 있는 이들 외에는 모두 잠에 들어 있었다.

‘며칠이나 걸리려나.’

대장 복면의 일을 보면 놈들이 천둥마탑에 비밀리에 작업을 치고 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면서까지 이렇게 일을 벌일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가주가 강탈한 어떠한 물건이 소중하다는 뜻일까?

‘그게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놈들은 초조해하겠지.’

이쪽은 기다리면 된다. 저쪽에서 무언가 액션을 취할 때까지.

그리고 저쪽이 움직이는 그 순간, 이쪽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5대 마탑이라 하여도 영지의 사병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때, 별을 보던 시안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비쳤다.

반짝이는 별빛들 사이로 보이는 깜빡깜빡 점멸하는 미약한 빛.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던 그 빛이 시안의 머리 위로 오더니 그대로 멈추었다.

그러곤.

「너. 그 녀석의 냄새가 나는구나. 근처에 있는 건가?」

그 빛무리가 시안의 앞에 내려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녀석에게선 너무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령의 기운이었다.

“넌 뭐지? 그 녀석이라니?”

「다르칸이라고 한다. 그 녀석이란 꽁지깃에 불을 붙이고 다니는 그 새대가리를 말하는 것인데, 그 녀석의 지인인가?」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다르칸. 그 이름은 들어 알고 있다.

화염마탑에 타오르는 불새의 신수의 전설이 있는 것처럼 천둥마탑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었다.

하늘을 밟고 다니며 그 입을 벌려 번개구름을 삼키고 다닌다는 뇌운을 삼키는 늑대.

가만 보면 점등하는 빛무리의 형태가 늑대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꽁지깃에 불을 붙이고 다니는 새대가리란 건…….

“이거 말인가?”

시안이 품에서 불새의 깃털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게 알티마의 깃털이란 걸 안 이후로 신비함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정령의 기운이 깃들어 있으니 지니고 다니면 좋겠다 싶어 들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녀석의 깃털이 맞군. 그러고 보면 네게도 녀석과 별개로 정령의 향기가 나는구나. 너라면 믿을 수 있겠어.」

다르칸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시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파직.

순간이나마 녀석을 이루는 빛무리가 더욱 강해졌다.

마치 이 말 한마디를 위해 없는 힘을 애써 그러모으고 있는 것처럼.

「내 친우의 후손을 살려다오.」

그가 시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 *

새벽 밤이 깊었다.

시안은 빌프리트와 기사들을 막사로 불러들였다.

그들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 같자 마탑에서 농성 중이던 젊은 마법사들도 허겁지겁 일어나더니 긴장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작전 회의라도 하는 건가?”

“글쎄. 망나니가 돌아가고 싶다고 땡깡이라도 피우고 있지 않을까?”

“멍청아, 그럴 거면 애초에 포위를 했겠어?”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그 말 속에 깃든 긴장감을 채 숨기지는 못하였다.

“걱정 마라. 놈들이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탑에 강제로 들어오진 않을 거야.”

“헥토르!”

“어째서? 놈들도 시간을 끌긴 싫어하지 않을까?”

“그런 게 있어.”

젊은 마법사들은 이 일에 칠흑마탑이 얽혀 있단 것도, 그들의 신물(神物)이 이 영지로 오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애초에 칠흑마탑의 존재조차 모르는 놈들이다.

그렇기에 대치 상황이 길어지면 헥토르 쪽이 불리해진다는 것을 모른다.

반면 저쪽은 잘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일이 설명이 안 돼.’

놈들은 바깥에서 시간을 끌길 원할 것이다. 자신을 이 탑에 고립시켜놓고 신물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생각이겠지.

‘시안 아그리드!’

헥토르가 이를 갈았다. 대책 없는 망나니라 들었는데 정확히 자신이 싫어하는 수만 쏙쏙 내밀고 있다.

덕분에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어떡한다…….’

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무렵, 시안이 막사에서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어?”

“이쪽으로 오는데?”

“근데 왜 혼자 와?”

시안이 마탑의 정문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그 앞에 서서 창 아래로 구경 중인 젊은 마법사들을 보며 얘기했다.

“문을 열어라.”

시안의 말에 마법사들 사이로 실소가 퍼져 나갔다. 뭐야? 열라고 하면 열 줄 알았나? 영주 아들이라고 재는 거야 뭐야?

“순순히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겠다.”

다음으로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이다. 마탑의 정문은, 아니, 정문만이 아니라 모든 출입문은 세대를 걸쳐 쌓아온 방어마법이 겹겹이 걸려있다.

겉으로는 문 한 장 있을 뿐이지만 그 방어는 거대한 성문과도 비견될 정도였다.

“도련님! 탑주 대리에게 열어도 되는지 물어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하지만 강제로 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충차라도 가져와야 할 테니까!”

시안의 말에 대답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비웃는 말이었다.

차마 대놓고는 웃을 수 없는 젊은 마법사들이 창에서 떨어져 키득거렸다.

그러는 사이 시안은 움직이고 있었다.

품에서 검은 구슬 하나를 꺼내더니 마나를 불어넣었다.

구슬의 표면에 기이한 문양이 빼곡히 그려지며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순간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헥토르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엎드려!”

“응?”

“왜 그래?”

사태 파악을 못 하고 멍청히 있는 동료들을 헥토르가 강제로 잡아끌었다.

바깥에서는 막 시안이 빛나는 구슬을 정문으로 던져 넣은 직후였다.

일전에 염노에게서 받았던, 그의 불꽃이 담긴 폭뢰(爆雷).

탁.

마탑의 정문에 부딪힌 검은 구체에서 태양과 같은 섬광과 함께 붉은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콰과과과과과광―!

폭음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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