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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88화 (8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8화

철컥.

병사들의 군화발이 마을의 입구를 밟았다. 그들의 앞에는 병사를 이끄는 몇몇의 기사들과 빌프리트, 그리고 시안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집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창을 열어 밖을 보려 하기도 하였으나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뜯어말렸다.

불온한 공기가 퍼져 나가는 와중, 시안이 병사와 기사들을 이끌고 향한 곳은 마을 한쪽에 기세등등하게 솟아오른 하나의 탑이었다.

탑의 앞에 도착하니 그들을 맞이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니, 맞이한다기보단 더 이상 오지 말라며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한 모습. 천둥마탑의 문양이 새겨진 남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었다.

병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그들 역시 수십이 모여 마탑의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영주님의 아드님 아닙니까? 어인 일로 이렇게 찾아오셨습니까?”

그리고 그 가장 앞에 자리한 젊은 마법사.

천둥마탑주 클로드 데 칸의 수제자인 헥토르였다.

“조금 물어볼 일이 있어서 왔는데.”

시안이 헥토르를 힐긋 바라보고는 그 뒤쪽도 스윽 훑어보았다. 하지만 많은 마법사들 중 그가 찾는 이는 없었다.

“탑주는 어디 계시지?”

탑주는커녕 장년의 마법사들조차 보이지 않는다. 있는 이라곤 헥토르와 같이 비교적 젊은 세대의 마법사들뿐.

그들은 영주성에서 병사들이 찾아왔다는 사실에도 아랑곳없는 표정이었다.

헥토르 역시 마찬가지.

당혹은커녕 살짝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그가 대답했다.

“스승님께서는 잠시 일이 있어 영지를 떠나셨습니다.”

“일? 언제 오지?”

“글쎄요…… 딱히 언질을 들은 바가 없는지라. 그때까지는 부족하나마 제가 탑주 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볼일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된다고, 헥토르가 그리 얘기했다.

묘한 위화감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시안이 뒤쪽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부하 복면들을 실은 죄수용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왔다.

복면은 물론 상체까지 모두 벗겨진 채였다.

“근래 도적 떼가 극성이란 얘기는 들어봤겠지. 이번에 잡아들인 도적들이다.”

“…….”

“모르는 상흔이라 하진 않겠지.”

헥토르가 수레 안의 이들을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의 몸에 나 있는 가느다란 뇌흔. 한 명이라면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어도 10명 모두 저런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건 발뺌하기 힘든 일이었다.

“뇌흔이 맞군요.”

그렇기에 헥토르는 오히려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인정하는 건가?”

“예. 잘 보니 익숙한 얼굴이군요. 저희 마탑의 제자가 맞습니다. 다만.”

“다만?”

“예전에 규정을 어겨 파문시킨 이들입니다.”

헥토르가 옆에 있는 한 마법사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마법사가 마탑에 들어가더니 이내 서류 몇 장을 가지고 나왔다.

헥토르가 그것을 시안에게 넘겼다.

“…….”

파문 서류.

즉석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 날짜로 되어 있는 정식 서류였다.

날짜는 한 달 전.

‘가주가 떠나 있던 날짜로군.’

그 날짜에 주목하곤, 시안이 서류를 덮었다. 그런 그에게 헥토르가 웃으며 얘기했다.

“도적 떼의 정체가 이 녀석들일 줄이야……. 면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파문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도적 떼로 돌변한 모양입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는데요?”

계속해서 발뺌을 하는 모습에 빌프리트가 눈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그러곤 시안의 귀에 귓속말을 하였다.

“어찌하실 겁니까?”

“어쩌긴 뭘?”

“저렇게 나오는 이상 명분이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명분이 필요하다. 아무리 힘이 세도 세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는 법.

영지의 영주라 할지라도 명분 없이 폭정을 취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5대 마탑 중 하나인 천둥마탑이라면야 더더욱.

“여기선 일단 물러가고 조금 더 심문을 하고 오시지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빌프리트가 시안에게 진언했다.

가문과 마탑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것이 옳은 절차였다.

시안이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녀석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빌프리트도 헥토르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빌프리트 경.”

“예.”

“다 구속하도록.”

“……예?”

예상치 못한 지시에 빌프리트가 깜짝 놀랐다. 시안이 한번 째릿 쳐다보자 그가 그제야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병사들 역시 빌프리트처럼 당혹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관의 명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은 훌륭한 병사의 표본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병사들의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법사들의 여유로운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헥토르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싹 사라졌다.

“얘기는 감옥에서 듣지.”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시안은 가문과 마탑의 관계를 생각해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

* * *

“이런 경우 없는 망나니 같으니라고!”

헥토르가 붉어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더니 탑 내로 도망쳤다. 뒤에 있던 젊은 마법사들도 그를 따라 우르르 탑으로 들어갔다.

탑의 문을 열려는 병사들을 시안이 손짓으로 막았다.

“억지로 들어가진 말고, 주변을 포위해.”

“예!”

강제로 들어가려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저 안은 놈들의 성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빌프리트 경, 보급은 충분하겠지?”

“예, 예. 영주성과 그리 멀지도 않으니 충분합니다만…….”

“좋아. 이대로 당분간 대기한다.”

어차피 초조한 건 저쪽이다. 마탑 내에 물자가 떨어지면 놈들은 제 발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이유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결국 칠흑마탑이 관계 있는 것이 맞았어.’

즉 영지로 이송 중인 모종의 물건을 위해 칠흑마탑에서 움직였단 추측이 신빙성을 가지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놈들은 초조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모종의 물건은 영지로 다가오고 있을 테니까.

그 물건이 뭔진 몰라도 한 번 영주성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되찾는 것은 요원하다. 그러니까 놈들도 이송하는 상인들을 습격한다는 수단을 썼겠지.

그러니 이렇게 놈들을 틀어막고, 그리고 도적 떼가 또 나타나지 않는지만 주의한다면.

시간은 이쪽 편이었다.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빌프리트가 걱정스레 얘기했다.

그로선 가문과 마탑의 관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더욱이 이런 결정을 내린 후계자에 대해서도.

“감옥에서 그 복면 놈이 폭주하는 모습이 기억나지 않나? 그런 놈들이 저 안에 득시글거릴지도 모르는데 그냥 돌아가다니 말이 돼?”

“그건 그렇습니다만.”

“걱정 마라.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사실은 달랐다. 그는 마탑과 가문이 멀어지거나 소원해진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됨으로써 가주의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그보다 바랄 것이 없었다.

물론 가장 우선하는 것은 칠흑마탑의 단서였지만.

“알겠습니다.”

그런 시안의 속내를 일절 모르는 빌프리트는,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여기서 물러나서 조금 더 추이를 살피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참된 영주의 덕목일 것이다.

하지만 시안처럼 한 번 행동했을 때 몰아치는 것 역시 영주의 덕목이라 볼 수 있으리라.

그 행동의 기반은 영지민을 향한 온갖 위험을 배제하기 위함에 있었으니.

‘이제는 후계자의 태가 훤히 사는구나. 도련님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아카데미…… 괜히 명문이라 하는 게 아니었어.’

살짝 핀트가 어긋난 생각을 하며 그가 병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 * *

“젠장! 젠장! 이 망나니 자식이!”

마탑의 최상층, 탑주의 집무실에서 헥토르가 마구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러면 일이 곤란해진다.

본래는 이 자리는 적당히 돌려보낸 후에 다시 병력을 추려 몰래 내보낼 생각이었다. 신물(神物)을 강탈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렇게 탑 안에 갇혀 버리다니.

신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영지로 오고 있을 텐데.

“뭘 그렇게 화내고 있어? 좀 기다리다 보면 포기하고 떠나겠지.”

“뭐?”

“그건 그렇고 말야, 헥토르…… 슬슬 약이 떨어져 가는데…….”

헥토르를 따라 들어온 젊은 마법사들이 그에게 조심스레 얘기했다.

하아. 헥토르가 크게 한숨을 쉬더니 품속에서 작게 접은 약봉지 몇 개를 대충 집어서 던져주었다.

“약이다!”

“야야! 내 거야!”

“빨리 잡는 사람이 임자지!”

땅에 떨어진 약봉지를 젊은 마법사들이 미친 듯이 달려가 주웠다.

그 모습을 헥토르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약의 정체는 혈석을 갈아 넣은 붉은 가루에 불과하다. 자신의 주인의 힘이 아주 살짝 담겨 있는.

그러나 이놈들은 그걸 경지를 높여주는 비약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칠흑마탑의 존재도 지옥과 악마의 존재도 모르는 놈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늙은이들은 어쨌지?”

“제, 제대로 가둬두고 있어.”

“흥. 수행이란 명목으로 전기지짐이나 하던 그것들이 꽁꽁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

“이렇게 쉽게 강해질 수 있는데 그런 가혹한 수행을 어떻게 받으라는 거야?”

소중하다는 듯이 약봉지를 품에 넣는 젊은 마법사들을 보며 헥토르가 콧방귀를 뀌었다.

멍청한 놈들. 그 천둥마법을 몸으로 받아내는 그 수행은 가혹한 만큼이나 확실히 효과가 있는 수행이다.

자신 역시 혈석을 얻기 전에는 그 수행으로 꾸준히 경지를 올려오고 있었으니.

말로는 경지를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실제론 조금 가혹한 정도로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라니.

이게 어리석은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뭐 애초에 좀 똘똘한 놈은 애초에 계획에 포함하지도 않았으니.’

젊다고 해서 모두가 이렇게 멍청한 것은 아니다. 마탑에도 총기가 있고 유망한 젊은 마법사들이 있었다.

헥토르는 그들을 애초부터 계획에 포함하지 않았다. 유달리 멍청하고 마탑에 불만이 가득한 놈들 위주로 포섭하여 유능한 놈들은 가둬버렸다.

다소 급하게 입안하고 추진한 계획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검왕에 의해 신물이 강탈당하고 급히 그것을 되찾으란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어, 헥토르? 어디 가?”

“지하에. 따라오지 마.”

젊은 마법사들을 두고 헥토르가 집무실에서 나와 아래로 향했다.

지하 깊숙한 곳. 연구실보다도 더 아래쪽에 징벌을 위한 징벌방이 있었다.

말이 징벌방이지 사실상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

그 감옥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그가 갇혀 있었다.

다 해진 옷에 말라비틀어진 몸. 그러나 그 몸에 새겨진 수십 년의 상처는 노인이 살아온 생을 비추었다.

오랜 시간을 갇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음에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모습.

“…….”

그 가슴에는 검은 보석으로 된 단검이 그 가슴을 관통해 벽까지 박혀 있었다.

파지직.

뇌기를 일으켜 보지만 검은 보석검에 모이더니 벽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천둥마탑의 탑주만이 가지는 것이 허락된 천둥마법을 봉하기 위한 아티팩트.

“스승님, 기분은 어떠십니까.”

헥토르가 그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본디 이 탑의 정상에 군림하고 있어야 할 탑주, 클로드 데 칸.

그가 초췌한, 그러나 힘을 잃지 않은 눈으로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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