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7화
11명이나 되는 사람을 뒤에 매달고 영지로 들어오는 시안의 모습은 순식간에 이목을 끌었다.
영지의 경비대가 굳은 표정으로 달려왔으나 말들을 끌고 온 남자가 영주의 아들이란 사실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성으로 가서 내가 왔다고 알려라.”
“예, 예!”
갑작스러운 지시에 많이 당황한 그들이었으나 시안이 데리고 온 11명의 걸레짝들을 보고는 물어볼 생각을 싹 접었다.
“도련님!”
빌프리트가 단번에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누군가 영지 내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빌프리트를 포함해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평소의 일과를 보내던 중이었다.
“무사하셔서…… 헙!”
빌프리트가 말에 묶여 있는 복면들을 보며 숨을 삼켰다.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저런 꼴로 놈들을 붙잡아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프리트 경. 이놈들 연행해서 영주성에 갖다 놓고, 심문은 알아서 진행해.”
“아, 예. 알겠습니다.”
빌프리트의 지시하에 기사들과 경비들이 놈들을 연행했다.
그들과 함께 시안과 란이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이걸로 이제 이번 일은 해결이다.
한때는 칠흑마탑의 수작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역시 너무 나간 추측이었던 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
“도련님.”
가문의 감옥에 놈들을 가두고 심문을 하러 갔었던 빌프리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올라왔다.
벌써 심문이 끝난 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았는데.
의아해하는 시안에게 다가온 빌프리트가 방 밖에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얘기했다.
“놈들에게서 뇌흔이 발견되었습니다.”
“뇌흔이라고?”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뇌흔.
천둥마법사들이 행하는 수행 중 하나인, 벼락을 받아들여 뇌기를 쌓는 독특한 수행으로 나타나는 벼락 모양의 상흔.
“천둥마탑이 범인이란 말인가?”
“범인인지까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칠흑마탑이 아닌, 생각도 못 한 천둥마탑의 흔적이 발견된 것에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아즐렛을 불러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 * *
“또 무슨 일인가, 공자?”
아즐렛이 귀찮다는 얼굴로 찾아왔다.
“도적 떼를 잡았는데.”
“어쩐지 성이 소란스럽더니만 그런 거였나. 그래서 그게 왜?”
“놈들한테서 뇌흔이 발견되었다.”
“뭣?”
아즐렛이 눈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안이 그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지금부터 놈을 보러 갈 건데, 따라오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시안이 구시렁거리는 그와 빌프리트를 대동하곤 성의 지하에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이윽고 세 사람이 대장 복면이 갇혀 있는 감옥 앞에 도착했다.
전신에 타박상이 가득한 그는 복면도 웃통도 벗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놈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셋의 시선은 놈의 상체로 향했다.
상체를 가득 덮고 있는 벼락 모양의 상흔.
“마, 말도 안 돼!”
그제야 아즐렛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며 소리를 질렀다.
시안이 가늘게 뜬 눈으로 놈의 뇌흔을 살펴보았다.
뇌흔.
천둥마탑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다음 경지에 오르기 위한 수행의 증거.
과거 천둥마탑을 세웠던 초대 탑주가 벼락을 맞은 것을 계기로 천둥마법의 묘리를 깨우쳤다는 일화에 입각하여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수련법이었다.
다만 진짜 벼락을 맞으며 수행하는 이는 마스터 이상의 진짜 고위 마법사들뿐이고, 메이지급이나 하이메이지급의 마법사는 위력을 조절한 천둥마법으로 수행을 한다.
기사가 맷집의 단련을 위해 맞으면서 수행하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으로 무식한 수행법이었다.
‘천둥마탑이니까 이렇게 하는 거지.’
다른 마탑은 이 비슷한 흉내도 내지 않는다.
같은 마법사라고는 해도 마탑에 따라 성향이 천차만별로 갈리게 마련.
예를 들어 화염마탑은 오로지 전장에서의 단 한 번의 파괴력에 올인하는 화력에 미친 이들이며 강철마탑은 마법사보다 장인에 더 가까운 이들이다.
그리고 천둥마탑은 한 번의 화력보다는 전장에서의 다양하고 유연한 대응을 중시한다.
그렇기에 뇌기를 얻는 것과 동시에 강인한 정신과 육체도 얻기 위해 이런 가혹한 수련을 행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 그래, 이간질이야. 어떤 놈이 우리와 마탑을 이간질하기 위한 수작이 분명해!”
우리 마탑의 제자가 아그리드를 습격할 리가 없다, 뭐가 아쉬워서 이런 도적 흉내나 내겠냐, 애초에 이 녀석이 천둥마탑의 제자라는 증거도 없다.
천둥마탑의 무죄를 위해 이 일순간에 참으로 많은 변명을 생각해 내는 그였다.
“이간질이라고?”
“그래! 천둥마탑과 아그리드가는 전전대 가주 때부터 공생하던 관계가 아니냐! 그 힘든 시기를 도와준 아그리드가에 칼을 들이밀 리 없지 않으냐!”
본디 천둥마탑은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그 지역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자칫 휘청거릴 정도로 위기를 겪었던 천둥마탑.
그런 마탑을 도와준 것이 전전대 영주, 즉 베르페드 아그리드의 할아버지인 루이스 아그리드였다.
루이스 아그리드가 영지의 땅 일부를 내어주어 천둥마탑이 이주할 수 있게 하였고, 그 보답으로 마탑과 가문은 돈독한 동맹을 맺었다.
그 동맹은 전대 가주에 이르러선 더욱 강화되었고, 그 시기에 한창 마탑과 가문 사이를 뛰어다니며 일했던 것이 아즐렛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청춘과 일생을 걸쳐 일궈낸 업적이 부정당하는 것이었기에.
“아즐렛…… 명예 장로…….”
그러나 그의 부정도 무색하게 대장 복면이 아즐렛을 불렀다.
명예 장로라는 호칭은 마탑에서 아즐렛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뭐, 뭐냐, 네놈은! 대체 누구길래 천둥마탑을 음해하는 것이냐!”
“장로, 마법사란 무엇이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얘기했다. 말 뒤에 끌려오느라 이미 전신 곳곳이 부러지고 상처가 가득했다. 호흡도 잘되지 않았다.
“이상한 소리로 현혹할 생각 말고 내 말에 대답해라! 넌 누구지!?”
“마법사란…… 경지를 올리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지.”
“뭣이?”
“그래서 그런 것일 뿐이오. 이 임무를 완수한다면…… 그분의 은총으로 나는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될 테니까.”
녀석이 손을 들었다. 그러곤 손끝을 날카롭게 세워 스스로의 가슴을 찔렀다.
푹!
가슴에 구멍이 뚫리며 피가 솟아 나온다.
하지만 피가 흘러내리진 않았다.
상처가 난 구멍 주위로 붉은 핏물이 모이더니, 가슴 가운데서 반짝이며 굳어갔다.
시안의 표정이 굳었다.
강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스터의 벽을 뚫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일선에선 물러났다곤 하나 장로도 마법사 나부랭이라면 공감할 거라 생각하오만.”
대장 복면은 더 이상 말을 하며 헥헥대지 않았다.
전신에 기력이 돌아온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을 느낀다.
전신의 모세혈관에까지 피가 팽팽히 돌아가며 핏줄이 울긋불긋 도드라져 보였다. 눈에도 피가 쏠려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그의 내면에 있었다.
대기에 흩어져 있는 마나가 보인다. 마치 아주 자그마한 끈과 같이 생긴.
그것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이고 속삭이는 것이 들렸으며 닿는 것이 느껴진다.
전신의 오감으로 마나를 느낀다.
그것은 마법에 미친 마법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쾌락이었다.
“장로는 마나를 두 눈으로 본 적이 있소? 귀로 들은 적은? 손으로 만진 적은 있나?”
녀석이 킬킬거리며 마나를 모았다.
끈과 끈 사이를 돌아다니는 실낱같은 전자파가 모조리 눈에 보였다.
평소의 몸 상태론 결코 느껴보지 못했을, 무엇보다 섬세하고 세밀한 흐름.
“나는 있다!”
파지지지직―!
그가 벼락의 창을 쏘아내었다. 어느 때보다 순도 높게 쌓아 올린 벼락은 세상에 뚫지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마스터라도, 설령 하이마스터가 오더라도 모두 관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창이 시안에게 쏘아졌다.
아까부터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안의 심장을 향해.
‘꼴 보기 싫었단 말이지, 저 꼬마!’
그의 눈이 시안 아그리드를 단단히 포착했다. 그리고 그에게 쏘아진 벼락의 창도 똑똑히 들어왔다.
그 직후.
서걱!
시야가 사선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
그의 눈이 의문으로 물든다.
그러나 뛰어난 그의 두뇌는 일순간 비친 광경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시안이 각인에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의 검은 대장 복면이 목숨 걸고 자아올린 벼락의 창을 너무나 간단히 베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쇠창살도, 그리고 감옥 안쪽 죄수의 몸통조차도.
하이마스터조차 넘어섰단 자신감에 차올랐던 그였지만, 현실은 시안의 일검(一劍)조차 받아내지 못했다.
“천둥마탑, 못 본 사이에 문제가 생겼나 보군.”
시안이 차디찬 겨울 하늘과 같은 눈으로 반 토막 난 대장 복면을 내려다보았다.
‘웅!’
그의 머릿속에선 라비가 웅웅거리고 있었다.
시안이 대답했다.
‘그래, 알아.’
녀석의 가슴에 박혀 있는, 지금은 반으로 갈라져 빛을 잃은 거무튀튀한 보석.
데릭 교수가 가지고 있던 혈석과 똑 닮아 있었다.
* * *
데릭 교수와의 일이 일단락 나고 알렌이 융 교관과 함께 크라하 영지까지 다녀오고 나서.
그 이후에 시안은 알렌과 함께 혈석의 정체에 대해 논의해 본 적이 있었다.
‘알렌 본인도 정확한 정체는 모른다고 했었지.’
알렌도 이것의 정체는 모른다고 했었다. 다만 악마의 힘을 얻게 해주는 무언가라고만 알고 있다고.
그때는 몰랐지만 알렌은 천도맹 소속이다.
알렌이 모른다는 말은 천도맹도 모른다는 소리이리라.
지옥과 현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라든지, 아니면 악마의 힘이 응축된 보석이라든지 그런 식의 추측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 복면도 데릭 교수처럼 혈석을 주웠을 뿐인가?’
그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았으나, 이내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놈은 분명히 얘기했다.
자신은 마법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 도적질을 했다고. 이 임무를 완수하면 그분의 은총으로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를 것이라고.
‘임무를 내린 놈이 있다.’
그놈이 복면한테 혈석을 건넨 놈일 것이다.
그리고 혈석을 미끼로 아그리드로 오는 상인들을 습격하라고 한 장본인.
칠흑마탑의 흑마법사.
그가 비고에서 꺼내온 보검 한 자루를 패용하곤 바깥으로 나왔다.
성문의 앞에 병사들이 도열한 모습이 보였다.
“충!”
시안이 빌프리트에게 얘기했다.
“아즐렛은?”
“말씀하신 대로 일단 연금해 놓았습니다. 마법대 소속의 마법사들도 체샤 아가씨가 감시 중입니다.”
마탑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아즐렛을 포함해 영내에 있는 마법사들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체샤에게 얘기해 놓았다. 기사들을 대동하여 마법사들을 감시하라고.
그리고 시안 본인은 빌프리트에게 지시하여 병사와 기사들을 모았다.
“…….”
한쪽엔 창살이 설치된 죄수용 수레에 부하 복면 10명을 모두 묶어놓았다.
녀석들에게도 역시, 대장 복면보다는 가늘고 적었지만, 뇌흔이 존재하고 있었다.
시안이 빌프리트와 병사들에게 얘기했다.
“지금부터 천둥마탑과 ‘대화’를 하러 간다.”
시안이 병사들과 함께 10명의 포로를 데리고 천둥마탑이 위치한 마을로 향했다.
딱히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다. 대화를 하러 가는 것일 뿐.
물론 온건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