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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86화 (86/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6화

조금 전.

“대장님, 또 오고 있습니다. 이번엔 두 명입니다.”

“두 명? 그냥 여행객 아니냐?”

“말 뒤에 짐을 잔뜩 실어놨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사내가 품에서 작은 망원경을 꺼내 대로를 살폈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말 두 필이 아그리드 영지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동안인지 아니면 아직 어린 애송이인지 모를 상인이 한 명.

다른 한 명은 호랑이와 닮은 귀와 꼬리를 가진 수인이었다. 척 봐도 용병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어린놈이 운송하고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뭐 어차피 임무는 영지로 향하는 상인 놈들을 죄다 약탈하는 것이니. 좋다, 시작하자.”

“예!”

사내와 함께 10명의 부하들이 복면을 두르곤 말에 올라탔다.

검은 로브에 복면을 쓴 수상쩍은 사내들이 11명.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로 했던 두 상인을 뒤에서 감싸듯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쏴라!”

대장의 지시와 동시에 일제히 품에서 작은 지팡이를 꺼내 들더니, 매직 애로우를 발사했다.

파파파파팟!

수십 발의 마법화살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두 상인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반응도 못 하는군.’

대장이 웃었다.

간혹 실력 있는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놈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이렇다.

갑자기 말을 타고 접근해 다짜고짜 마법을 날리면 열에 아홉은 얼을 타게 마련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렇게 생각한 순간.

“……!”

대장의 눈이 찢어져라 커져왔다.

상인 중 한 놈이 팔을 뻗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검은색의 검이 솟아 나왔다.

그것뿐이라면 놀랄 일도 없었겠지.

“오러!?”

그 검에서 아낌없이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오러가 분명했다.

차차차차창!

남자가 검을 휘둘러 쏟아지는 매직 애로우를 모두 쳐냈다.

아무리 수십 발씩 된다고는 하나 기초 중의 기초에 불과한 마법.

검의 극치라고 불리는 오러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함정이다! 산개!”

그 즉시 대장이 소리를 질렀다.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말 머리를 돌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다시 앞을 보았을 때.

“네가 대장이로군.”

“……!”

어느새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검은 머리의 상인을 보며, 대장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 * *

“란, 부하들 쪽을 쫓아!”

“응!”

평소라면 명령하지 말라느니 한마디 했을 란이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는 부하 복면들을 쫓았다.

그녀의 눈은 완전히 사냥감을 쫓는 맹수와 같은 눈이 되어 산개하는 놈들을 뒤쫓았다.

그사이 시안은 한 손엔 검을, 반대 손엔 고삐를 쥐고 대장 복면과 함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네 녀석! 아그리드의 기사냐!”

“글쎄.”

대답 대신 시안은 검을 휘둘러 주었다.

대장 복면이 기겁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더니 말의 한쪽 옆구리를 찼다.

그러자 그를 태운 말이 고개를 돌려 반대편으로 거리를 벌렸다.

‘거리만 벌리면 질 수가 없지.’

당황한 와중에도 나름 침착하게 대장 복면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곳에서 쏘아진 마력이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시안의 발밑을 쏘았다.

쿠궁! 그곳의 땅이 불룩 솟아올라 순간적으로 시안이 탄 말을 겁주었다.

‘말 탄 기사보다 말 탄 마법사가 월등히 강하다!’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금 마법을 준비했다.

오히려 두 발로 땅을 딛고 있다면 기사 쪽이 승산이 있겠지만, 말을 타고 있다면 마법사 쪽이 강하단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왜냐하면 달리는 말은 사람의 발처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기사들 입장에선 당연히 반발이 심할 지론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은 그럭저럭 들어맞는 것 같았다.

실제로 시안이 말을 조종해 접근하려 하고 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으니.

“끝이다!”

대장 복면이 눈을 빛내며 지팡이를 시안이 탄 말에 겨누었다.

그 지팡이 끝에서 빛무리가 서리며 날카로운 얼음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말의 두개골 따위는 단번에 뚫어낼 얼음의 화살.

“라비.”

그에 비해 시안은 단 한 마디 뱉을 뿐이었다.

동시에 검을 놓았다.

갑작스럽게 무기를 버리는 모습에 대장 복면이 의아해하였지만 뭘 하든 이미 늦었다.

자신의 마법은 이제 곧 완성…….

그 순간, 놈이 놓았던 검이 쏘아지듯 날아왔다.

서걱!

“악!”

그 검이 대장 복면의 손바닥을 스치며 지나갔다.

손바닥은 스친 상처로 끝났으나 지팡이는 두 동강이 났다. 준비하던 마법과 함께.

‘뭐야 이게!’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듣도 보도 못한 검을 보며 대장 복면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동시에 허공을 유영하는 검이 그의 허벅지를 찔러 들어갔다.

“끄윽……!”

그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였으나 말에 탄 채로 라비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벅지를 파고 들어가는 비검.

그가 이를 악물곤 허벅지의 고통을 참아냈다.

견뎌야 한다.

말만 지킨다면 상처 몇 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시안은 그가 견딜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다.

“라비. 잘라.”

시안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대장 복면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서걱!

“끄아아아아―!”

허벅지에 꽂혀 있던 검이 빙글 돌더니 단숨에 그 다리를 잘라내었다.

퉁!

대장 복면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낙마했다. 한쪽 다리가 날아간 채로 균형을 유지할 만큼 그가 재주 좋은 남자는 아니었기에.

빠르게 달리던 중 떨어지다 보니 그의 몸이 몇 차례나 땅에 굴러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전신의 뼈가 부러질 것만 같은 둔통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도 잘린 다리보다는 덜했다.

“란을 도와줘.”

“웅!”

비검.

이게 시안이 빌프리트에게 얘기한 복안이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비검은 온갖 제약된 상황에서 그 빛을 발한다.

예를 들어 상대나 자신이나 빠르게 말을 타고 공수를 나누는 이 상황이라든지.

다그닥.

시안이 말머리를 돌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비검이 부하들을 향해 쏘아지는 걸 대장 복면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복면 안쪽에서 그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허벅지에 손을 대고 통증 완화와 재생의 마법을 시전했다.

‘저딴…… 저딴 괴상망측한 아티팩트만 없었다면……!’

그의 눈에 비검은 아티팩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 적을 공격하는 검이라니. 필히 A급 이상의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물건 따위에 허를 찔려 억울하게 당했음을 한탄하는 대장 복면.

그러나 시안은 그의 억울함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말을 탄 시안이 대장 복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엔 빈틈없이 검륜이 들려 있었다.

“네놈들이 요새 영지 주변에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이구나.”

“……아그리드 영지에 이런 어린 기사가 있었을 줄은.”

대장 복면이 이를 갈았다.

분명 빌프리트를 포함해 이름 있는 기사들은 모두 체크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젊은 놈 중에 오러를 쓰는 놈이 있었을 줄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사태였다.

한편 그때, 란이 밧줄로 묶은 10명의 사내들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시안. 다 잡아 왔어.”

덩치 큰 성인 남성이 10명. 상당한 무게일 텐데도 그걸 끌고 있는 란은 그다지 힘든 기색이 없었다.

한편 란의 말을 듣고는 대장 복면의 눈이 경악으로 커져왔다.

“시안 아그리드!”

“잘 아는군.”

시안 아그리드.

베르페드 아그리드의 아들. 영지의 후계자.

대장 복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놈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도, 그리고 망나니로 유명한 놈이 오러를 발하는 검사라는 것도.

그 무엇도 그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놓친 녀석은?”

놈을 빈틈없이 감시하며 시안이 란에게 물었다.

“없어. 네 정령 대단하더라.”

“우웅!”

비검의 모습인 라비가 자랑이라도 하듯 시안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았다.

역시. 하늘을 나는 비검의 활용도는 독보적이었다.

흑검이나 창해처럼 메인으로 사용할 능력은 아니지만 보조로는 이보다 뛰어날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일반 검사는 결코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컸다.

허공의 상대도 자유자재로 공격할 수 있고, 말 위와 같이 몸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도 아랑곳 않고 적을 노릴 수 있다.

“돌아와.”

시안이 복사된 검륜을 각인에 집어넣고는 다시 라비를 잡았다.

화아!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오러가 펼쳐져 복면 놈들을 모두 그 영역 안에 넣었다.

사위를 잠식하는 밤의 기운을 보며 복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전신이 알 수 없는 긴장으로 굳어져 왔다.

‘라비.’

‘웅.’

시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놈들에게서 흑마법사의 기운을 탐색해 보는 일이었다.

시안이 펼친 밤의 기운 속에서 라비가 놈들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상세히 살폈다.

복면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짐승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며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감정은 시안이 마룡왕의 공간에서 느꼈던 것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강도는 훨씬 낮았지만.

‘우웅.’

그 무렵 라비가 시안에게 고개를 저었다.

놈들 중에 악마와 연결된 놈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진짜로 그냥 실력 좀 좋은 도적이었단 말인가.

“우리…… 우리한테서 뭘 캐낼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대장 복면이 숨을 가쁘게 쉬며 얘기했다.

아까부터 계속 잘린 허벅지에 치유 마법을 걸고 있는 그였으나 이런 장소에선 지혈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

서걱!

“끄아아아악!”

“아아악!”

시안이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복면 놈들의 발목의 힘줄을 모조리 잘라내었다.

제 발론 도저히 도망치지 못하도록.

흑마법사는 아니었다곤 하나 죄를 지은 놈들이다.

연행은 해야겠지.

“소용없다! 이런 짓을 한들…… 읍! 으읍!”

시안이 천을 꺼내 놈들의 입을 모조리 틀어막았다.

그러곤 놈들을 묶은 밧줄을 말의 뒤에 매달았다.

한 필당 2~3명씩.

시안과 란이 타고 있는 말의 뒤에, 그리고 놈들이 타고 온 말을 한 필씩 챙겨 그 뒤에도 매달았다.

“으읍!”

“읍!”

뒤에 있을 일을 상상한 것인지 복면 놈들이 펄쩍 뛰었으나 밧줄에 묶인 놈들이 뛰어봤자 꿈틀거리는 애벌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문은 영지에 가서 하도록 하지.”

복면들이 식겁한 눈빛을 띠더니 시안이 아닌 란 쪽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자비를 베풀지 않을까 해서.

“끄으으응~”

하지만 란에게서 돌아온 것은 무관심뿐이었다.

이미 붙잡은 사냥감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고양이처럼 그녀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평소와 같은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꼬리는 기분 좋게 살랑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상쾌한 모양이군.’

표정은 항상 많이 찌푸리거나 덜 찌푸리거나 둘 중 하나인 녀석이지만 귀랑 꼬리는 꽤 다양하게 움직이곤 하는 그녀였다.

요 근래 계속 같이 있다 보니 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상황을 마무리를 짓고, 잠시 후.

“으으으으으읍!”

“으어어어어!”

평야를 울리는 비명 소리와 함께 사람을 매달고 있는 말들이 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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