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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85화 (85/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5화

도적 떼가 출몰하는 것은 다른 영지에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아그리드 영지에 있어선 웬만해선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도적이라도 하이마스터의 이름쯤은 들어보게 마련이었으니까.

이 흔치 않은 사건에 현재 영주성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세 사람이 모였다.

“보고부터 들어보지.”

“예.”

“나까지 부를 필요가 있던 건가?”

영지의 후계인 시안과 기사단장 빌프리트, 그리고 마법대의 대주인 아즐렛이었다.

일을 싫어하는 아즐렛이 귀를 파면서 틱틱대었으나 그는 무시하고 빌프리트가 보고를 올렸다.

“마법을 썼다고?”

“예. 습격당한 상인과 용병들에게 들은 바론 그렇습니다. 마법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졌다고…….”

마법을 썼다니 평범한 도적 떼는 아니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아그리드 영지를 건드릴 만한가.

그렇다 해도 의문이었다.

그런 실력이 있다면 굳이 아그리드가 아니라 다른 영지에서 도적질을 하는 게 훨씬 간단하고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그보다 하늘을 덮을 정도라는 건…….”

“헹. 과장해서 한 얘기겠지. 본래 습격을 당한 사람들 눈에는 다 커다랗게 보이게 마련이 아니냐.”

“말투는 좀 그렇지만 저도 동감입니다. 그 정도의 실력이면 도적질이나 하고 있을 리 없으니까 말이죠.”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탕을 해야겠군.”

“안 그래도 토벌대의 인선을 꾸리는 중입니다.”

“…….”

괜히 일을 떠맡지 않으려고 조용히 존재감을 지우는 아즐렛에 비해 빌프리트는 의욕적으로 대답했다.

애초부터 그는 아즐렛의 도움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도련님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나?”

“도적 떼라고는 하나 그래도 공적을 쌓을 만한 일입니다. 일을 잘 해결한다면 영주님께서 상을 내리실지도 모릅니다.”

“됐다. 군의 경험도 지식도 없는 내가 나서면 괜히 혼선만 주겠지. 이번 일은 전적으로 맡기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내는 당연히 영지의 일에 깊게 관련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떠날 곳이니까.

빌프리트가 그런 시안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마중을 나갈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많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닫힌 영지에서 벗어나 또래와 공동생활을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크게 성숙한 것일까?

이번에 데려온 란과 샨도, 일전에 어울리던 친구들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털털하고 솔직한 좋은 이들이다. 지금까지 도련님의 친구 중에 이런 이들이 없었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토벌대를 꾸리러 가보겠습니다.”

좋은 일이다.

달라진 도련님의 모습을 보니 빌프리트도 절로 의욕이 샘솟았다.

이전의 도련님은 솔직히 구제 불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도련님이라면 후일 영지를 맡게 될 후계자로 충분해 보인다.

그가 그리는 아그리드 영지의 미래가 조금 더 밝아졌다.

“나도 가보지. 별것도 아닌 일로 시간만 날렸군.”

빌프리트가 뚜벅뚜벅 군화 뒷굽 소리를 내며 떠나갔고, 아즐렛은 슬렁슬렁 떠나갔다.

시안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찻잔을 들었다.

‘별일도 다 있군.’

도적 떼의 습격이라…….

자신이 도적이었다면 아그리드 영지 같은 리스크만 크고 리턴도 딱히 크지 않은 영지는 절대 노리지 않을 텐데.

뭐 본디 살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 종종 일어나는 법이다.

작년까지의 자신만 하더라도 본래의 시안이 죽고 이렇게 바깥에 나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도적 떼의 생각이 궁금하긴 하다. 빌프리트가 놈들을 잡아 오면 뭔가 알게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였으나.

“……죄송합니다.”

열흘이 지나도 빌프리트는 놈들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그사이에도 상인들의 습격은 꾸준히 있었다.

덕분에 빌프리트는 지금 심기가 매우 곤두서있었다.

“무슨 일이지?”

시안이 묻자 그가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일할 땐 항상 무표정을 고수하던 그였는데.

“놈들이 눈치가 귀신같습니다. 병사나 기사들이 움직일라 치면 그 장소엔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근거지를 찾아내면 끝나는 일 아닌가?”

“그럴 생각에 말을 달린 흔적을 쫓아보았으나, 어느 것이나 중간에 끊겨 있었습니다. 사람 손으로 지울 수 있을 만한 흔적은 아닌데, 아무래도 놈들의 마법 실력이 꽤 뛰어난가 봅니다. 보다 못한 제가 직접 출정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하였는데?”

“제가 성문을 밟는 날은 놈들의 머리칼 하나도 보이지 않더군요.”

이쪽의 동향은 제대로 살피고 있단 말인가?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놈들의 일원 중에 하나가 성문 근처에서 매일같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모양이다.

성문을 감시하며 통신 마법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것쯤이야 마법사라면 어렵지 않으니까.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더 이상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 일주일간 놈들의 패악질은 심해지고만 있었다.

그동안 약탈당한 상인들에게 들은 증언을 합치면, 놈들은 총 11기의 군마와 그 말을 타고 다니는 도적들이다.

11명 전원이 실력 있는 마법사이며, 처음 증언으로 들었던 하늘을 뒤덮는 마법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비록 매직 애로우라는 하급 마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하늘을 덮을 듯한 기세였다고 한다.

“그냥 뒤만 쫓는 걸로는 해결하기 힘들어 보이는군.”

“예. 모종의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안은 나와 있습니다만…….”

“미끼를 쓰는 건 어때?”

“그것도 고려 중입니다.”

상인인 척 분장을 하여 놈들을 끌어들인 후 현장에서 붙잡는다.

다만 주변에 기사들을 매복시키거나 하는 건 안 된다. 매복은 지금까지도 많이 해봤으나 항상 놈들에게 들켰기 때문이다.

매복이 있다면 미끼란 것을 눈치채고 다가오지 않으리라.

“분장한 인원들만으로 놈들을 잡아야겠군.”

“인원과 인선을 짜보겠습니다.”

“놈들의 방심을 유도하려면 가능한 적은 인원이 좋을 테고, 그 마법 세례에서도 밀리지 않을 강한 이여야 할 테지.”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저희 기사단에는 강한 이가 아주 많습니다. 여차하면 제가 얼굴을 가리고…….”

“나는 어때.”

“……예?”

달그락. 시안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라면 놈들도 방심하겠지. 17살밖에 안 되었으니까. 조금만 변장해도 속이기 쉬울 거야.”

“아니, 그…….”

“놈들은 나가는 상인이 아니라 들어오는 상인만 노린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워프로 일단 근처 영지로 향한 후에 말을 타고 돌아와야겠군. 나가는 순간을 보이면 미끼란 게 들킬 수도 있으니.”

“안 됩니다!”

쾅! 빌프리트가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위험합니다, 도련님!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 사이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최소한 오러를 쓸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렇게 일어선 빌프리트에게 시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그 손에 오러를 피어 보였다.

화르륵.

낮이라 기세가 조금 약하긴 했으나 다른 하이나이트들에 비해서는 결코 밀리는 기운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대로도 웬만한 이들보다 훨씬 강대했다.

이 반년간의 수련의 성과.

“이, 이건…….”

빌프리트가 몸이 굳은 채 시안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흐르고 있는 밤의 오러를.

지금 그가 받은 충격은, 과거 이자크가 시안의 오러를 봤을 때와는 비할 수 없이 컸다.

이자크는 결국 남이고 빌프리트는 영지의 가신이다.

더욱이 어릴 때부터 좋으나 싫으나 시안을 봐왔던 그.

그렇기에 그 시안이 오러를 쓴다는 사실에 더없는 충격을 받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나름 복안이 있으니까.”

시안이 손을 거둬 오러를 회수했다.

그러곤 아직도 멍하니 있는 빌프리트에게 얘기했다.

“놈들은 말을 타고 매직 애로우를 쏘는 것이 특기라고 했었지? 그렇기에 까다롭다고.”

“예, 예에. 그래서 평범한 기사나 병사들로는 대응이 어렵습니다. 말을 타며 활을 쏠 수 있는 병사를 데려가거나 아니면 이쪽도 말을 타고 마법을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빌프리트가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다시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그가 진지하게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이 오러를 쓴다는 것은 확실히 경악할 일이었으나, 역시 이번은 안 된다.

이번 일은 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역시 안 됩니다, 도련님. 오러 하나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시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복안이 있다고 얘기했잖아. 걱정 마라.”

* * *

시안이 괜한 오지랖이나 공명심으로 미끼를 자처한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말이지만, 사실 영지가 도적의 습격을 받든 말든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있었다.

‘시기가 묘하다.’

하필 가주가 없을 때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

뭐 생각해 보면 하이마스터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곳에 시비를 걸 이는 없긴 하다. 당연히 자리를 비웠을 때 수작을 부리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시안은 다른 가능성 쪽에 생각이 미쳤다.

가주가 칠흑마탑을 치러 나간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에.

‘놈들의 근거지를 치면 전리품을 보내온다고 했었지.’

그 전리품을 가져오는 것은 대부분 상인들이다.

전문 파발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 귀중품이다. 파발꾼보다는 믿을 만한 상회에 웃돈을 주고 맡기는 쪽이 염노 입장에선 마음이 편하리라.

실제로 지금까지 왔던 물건들도 대형 상회에 속한 상인들의 손을 통해 도착했다고 한다.

‘만약에 놈들이 뺏긴 물건 중에 중요한 물건이 있다면?’

그런 것이라면 아그리드로 오는 상인들을 습격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최근 가주가 칠흑마탑의 근거지 한 곳을 털었고, 마침 그곳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고.

염노가 그것을 모른 채 가문으로 그냥 보냈다면.

지금 어디에선가 오고 있을 물건을 찾기 위해 놈들이 무차별 약탈에 나서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영지에서 떠나는 상인들은 무사한데 들어오는 상인들만 습격받는다는 사실이 이 추측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0은 아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직접 나설 이유가 되었다.

준비를 마친 시안이 옆 영지로 가기 위해 워프 관리소로 향했다.

“너는 영지의 후계란 애가 미끼를 자처해도 되는 거냐?”

그런 그의 옆을 란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본인이 따라오겠다고 하여 시안이 흔쾌히 허락했다.

실력이 안 되는 이라면 발목만 잡겠지만 란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다 용병업으로 유명한 수인이 아닌가.

호위를 위한 용병으로 분장하기 딱 좋은 인재다.

“너도 지금 여기 있잖아.”

“나야 원래 수련하러 온 거니까. 너희 기사들이랑 대련하는 것도 좋긴 한데 성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더라.”

“나도 비슷해.”

칠흑마탑의 일은 빼놓고 시안이 적당히 대꾸했다.

“한 사람씩 천천히 들어가 주세요~”

두 사람이 영지의 워프 관리소에서 워프를 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페일룬 영지에 도착해 있었다.

아그리드의 옆에 있는 영지. 그러나 바로 옆은 또 아니다.

말을 타고 넉넉히 나흘은 달려야 하는 곳으로 아그리드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워프 게이트가 있는 장소였다.

두 사람이 영지를 돌면서 분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안은 상인. 란은 용병.

란이야 원래 귀와 꼬리가 보이는 수인족이었기에 조금만 꾸며도 확 용병처럼 보였다.

원래 대륙에서 수인이라고 하면 일단 용병부터 떠올리고 보니까.

적당히 칼 한 자루 사서 채워주면 이미 훌륭한 용병이다.

문제는 시안 쪽이었는데.

“오…… 꽤 그럴싸한데?”

상인처럼 꾸민 시안을 보곤 란이 제법 놀랐다.

누가 봐도 귀족 아들이 아닌 행상에 찌들 대로 찌든 상인처럼 보였다.

“뭔 후작 아들이란 놈이 분장을 이렇게 잘해? 어디 극단에서 연극이라도 배웠어?”

“그냥 하니까 되는데.”

“…….”

뭐 사실 그냥 한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다.

시안은 그림자였다. 본래 후작가의 도련님을 대신하기 위한 그림자.

본래의 시안이 죽기 전에는 항상 하던 것이 그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도련님에서 상인으로.

“말이랑 적당한 짐수레만 사면 끝이군.”

“작은 놈이면 되겠지?”

“말 두 필이 끌 만한 크기면 돼. 아직 젊으니까 작은 수레여도 그냥 애송이 상인이구나 생각하겠지.”

그로부터 잠시 후, 두 사람이 페일룬의 성문을 통과해 아그리드로 향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그저 달리기만 했다.

습격자는 아그리드에 가까워져야 나타난다. 그때까지는 말의 체력 배분에 주의하며 꾸준히 달렸다.

그렇게 사흘 후.

예정됐었던 나흘보다 하루가 빨리 아그리드 영지 근처에 도착했다.

앞으로 몇 시간만 더 달리면 영지에 도착하는 그때.

―다그닥다그닥.

시안과 란은, 두 사람의 것이 아닌 다른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피잉―!

들려오는 소리에 시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수십, 수백의 매직 애로우가 하늘을 덮으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란!”

시안의 신호에 란이 변장용으로 들고 있던 칼을 뽑아 말과 수레를 연결하는 끈을 끊어냈다.

부피만 크지 무게는 없는 짐만 싣고 있던 마차라 크게 무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짐을 덜어내자 둘을 태운 말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동시에 시안이.

쌔애애액―!

오러를 가득 품은 흑검을 뽑아 떨어지는 화살 비를 향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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