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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84화 (8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4화

“아버님이 외유를 나간 지는 얼마나 되었지?”

“두 달쯤 된 것 같습니다.”

“두 달이라…….”

꽤 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소를 생각해 보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어떨 땐 열 달 이상 염노가 돌아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으니까.

사실 시안이 상천검을 만들 때 이렇게 염노가 없던 기간도 한몫했다.

염노가 없으니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순 없다. 그러다 보니 기존에 배운 검술을 연마하고 분석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연구를 해오다 14살이 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고.

‘어릴 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바깥일이 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황궁에 들어갈 일이 있다든가 다른 귀족을 보러 간다든가, 혹은 외국에 나갈 일이 있다든가 뭐 그런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안다.

베리엄을 처치하고 가주에게 금령을 가져다줬을 때 가주가 얘기했다. 가문에서 칠흑마탑의 존재를 아는 것은 자신이랑 염노뿐이라고.

염노와 가주가 단둘이 떠나는 것은 칠흑마탑에 관계된 일일 때다.

시안이 기사들과 어울리고 있는 란과 샨을 보았다.

돌아가는 것을 보니 당분간은 자신이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빌프리트 경. 란과 샨을 부탁한다.”

“다른 볼일이 있으십니까?”

“잠시 체샤를 보러 다녀오지.”

“알겠습니다. 손님은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마스터한테 부탁해 놓은 거니 란도 샨도 불만은 없겠지.

시안이 연무장을 벗어나 체샤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그가 체샤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다행히 안에 있는지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

“오라버니?”

그녀가 문을 열고 시안을 맞았다.

“잘 오셨어요. 듣자 하니 오자마자 일 하나 저지르셨다면서요?”

“일은 무슨.”

“아까 돌아다니다 아즐렛 할배랑 마주쳤는데 저한테 온갖 한탄은 다 하던데요?”

“너한테?”

“공녀님은 저런 막돼먹은 놈처럼 자라시면 안 됩니다, 뭐 그런 얘기요.”

허 참. 제 손녀뻘 되는 애한테 와서 손자뻘 되는 아이의 뒷담이나 까다니.

어지간히 추하게 나이를 먹었다.

“가주님과 염노가 자리를 비웠단 얘기를 들었는데.”

“네. 두 달 정도 됐겠네요. 말없이 훌쩍 떠났어요.”

“어디 갔는지는 아나?”

“음, 아버님 성격에 느긋하게 여행이나 다닐 리는 없고. 염 할배를 데리고 간 거라면 칠흑마탑인가 뭔가 하는 놈들을 치러 간 거 아니에요?”

역시 체샤도 눈치는 채고 있었나 보다.

자신이 가주에게 칠흑마탑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바깥에서 체샤도 엿듣고 있었다.

가문에선 가주 본인과 염노만이 칠흑마탑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말도 그때 같이 들었겠지.

‘그럼 이제 우리 둘까지 총 네 명이 알고 있는 건가.’

다른 가신들에게도 얘기해 놔도 좋을 텐데. 왜 굳이 비밀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딜 갔는지까지는 모른다는 거군.”

“네. 아 맞다. 잠깐 와보실래요?”

“?”

의아해하는 시안을 데리고 체샤가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가 시안을 안내한 곳은 성 지하에 있는 가문의 비고였다.

“아버님이 이렇게 나가면 잊을 만할 때마다 한 번씩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도착하거든요. 창고 구석에 박아두라는 염노의 편지랑 함께요.”

“흠.”

체샤가 안내한 비고의 구석에는 여러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었다.

낡고 헤진 책도 있었고 빛을 잃은 보석이나 깨진 컵 같은 것도 있었다. 기이한 형상이 그려진 촛대나 식기 따위도.

‘이것들은…….’

시안이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무너져 내린 폐허나 유적 따위에서 발견될 것만 같은 분위기의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가주가 칠흑마탑의 일 때문에 나갈 때마다 가끔 가문으로 보내오는 물건.

그렇다는 건 아마.

‘놈들의 근거지 같은 곳을 털 때마다 물건을 쓸어서 보내는가 보군.’

일종의 전리품이 아닐까.

가주가 얼마나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칠흑마탑과 놈들이 숭배하는 악마, 그리고 지옥에 대한 것을 모두 알고 있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라도 단서를 얻기 위해 놈들의 아지트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회수하는 것이 아닐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염노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딱히 전투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런 물건들을 부치는 잡일꾼이 필요해서일지도 모르지.

‘라비.’

‘웅.’

시안의 신호에 라비가 눈을 한껏 가늘게 뜨며 물건들을 살폈다.

그러나 모든 물건들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별다른 것은 없었다.

‘우웅.’

딱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는 라비. 이곳엔 특별한 물건은 없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진짜 잡동사니.

‘딱히 무슨 단서도 안 보이고.’

그래도 혹시 모를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어차피 방학이라 시간만은 넘쳐나니 하나씩 살펴볼까.

해진 책 한 권을 들고 시안이 털썩 걸터앉아 펼쳐보기 시작했다.

* * *

“좋아, 좀만 더 힘내자! 몇 시간 후면 아그리드 영지다!”

“예.”

아그리드 후작령을 향하는 길을 따라 네 마리 말이 끄는 짐마차 하나가 이동하고 있었다.

한곳에 정착한 가게를 갖지 않은, 영지와 영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파는 행상인이었다.

괜찮은 원단이나 혹은 향신료. 남쪽에서만 자라는 곡물 등 그의 수레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나도 마진 좋은 물건으로 하나 딱 정해서 잔뜩 채우고 싶은데 말야.”

“아직 그러기에는 이름값이 없지 않습니까, 형님. 저희 같은 피라미들이 수레 하나씩 실어봤자 다 사주는데도 없다구요.”

“그 이름값이란 게 언제쯤 생길 것 같냐?”

“몇 년은 더 박아야 하지 않을까요?”

“길구나, 길어.”

평소와 같이 세상살이 한탄이나 하며 그들이 아그리드로 향했다.

일행은 총 넷이었다. 그들 형제 상인과 호위를 위해 고용한 용병 둘.

말의 다그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창 저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던 중.

두두두두두―!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들이 돌아보았다.

뒤쪽에서 흙먼지를 흩날리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뭐지?”

“급한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알아서 피해 가리란 생각에 상인들이 느긋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상인을 따라잡은 일단의 무리는 상인을 지나쳐 가지 않았다.

약간의 거리를 두곤 나란히 속도를 맞추었다.

전신을 가리는 검은 망토를 두른 채 얼굴엔 복면까지 쓰고 말을 몰고 있는 무리.

“……응?”

“뭐요?”

상인들이 표정을 굳히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용병들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피잉―!

그들을 향해 수십 발의 매직 애로우가 쏟아졌다.

* * *

며칠 동안 느긋한 일상이 흘러갔다.

매일의 단련은 당연히 빼먹지 않았지만 그거야 항상 하는 일이고. 수업이 없는 만큼 여유가 꽤 많았다.

예전 같았으면 염노에게 교양 수업을 들었을 만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도 없었으니까.

덕분에 남은 시간은 란과 어울려 대련을 하거나 그녀에게 권술을 배우는 샨을 구경하거나, 혹은 갑자기 찾아와 잡담을 쏟아내는 체샤의 말을 들어주는 데 보내게 되었다.

간간이 비고에도 들어가 가주가 보내온 칠흑마탑의 물건들을 살펴보기도 하였지만, 그것들에게선 정말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도, 도련님. 다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정원에서 볕을 쬐며 책을 읽고 있던 그에게 메이드 하나가 살짝 떨면서 차를 가져다주었다.

성안에서 시안의 평판은 그렇게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겐 아슬라의 자식들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엔 모두가 놀랐으나, 그거 하나로 그간의 소문이 모두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카데미와는 달리 이 성에는 본래의 시안에게 직접 곤욕을 치른 피해자가 차고 넘친다.

소소한 사건 하나 가지고 평판이 좋아지는 것이 말도 안 된다.

거기에 시안에게 딱히 생각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이 가문에 미련이 없는 그는 성에서의 평판을 올린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일부러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진 않았지만 굳이 나서서 인식을 바꾸거나 할 생각도 없다.

그 시간에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르고 말지.

“오라버니. 저 정령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돼요?”

“스승님! 새 필살기를 한번 생각해 봤는데 봐주시겠어요?”

그때 양쪽에서 꼬맹이 두 명이 다다다 달려왔다.

모두가 자신을 기피하는 이 성에서 얼마 없는 친근한 태도의……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묘하게 앵기는 녀석들이다.

서로의 볼일을 외치며 달려온 두 사람이 시안을 가운데 두고 허공에서 시선이 맞았다.

“…….”

“…….”

잠시 말없이 눈만 마주하던 두 사람이 이윽고 행동을 시작했다.

샨은 경계라도 하듯 꼬리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체샤는 팔짱을 끼곤 턱을 치켜들었다.

“오라버니는 이제부터 나랑 정령 치유회를 가질 예정이라서. 그쪽 일은 다음으로 미루지?”

“정령 치유회? 뭐야 그게. 저번에 보니까 스승님 정령은 너 싫어하는 거 같던데 너만 치유하는 거 아냐?”

“싫어하다니! 그냥 조금 부끄럼을 탈 뿐이야!”

샨의 말은 사실이었다.

라비가 애초부터 낯을 가리는 성격인지 아니면 반요정이 아니면 잘 따르지 않는 정령의 특성 때문인지, 체샤에게서 도망쳐 시안의 품에 숨곤 했다.

에르제와 잘 지내던 것을 떠올려 체샤에게도 소개했던 것인데, 체샤의 짝사랑이 되었을 뿐이었다.

왜 에르제랑은 친한 걸까. 함께 쓰레기산의 죄수를 잡은 경험 때문인가?

“스승님은 나랑 같이 필살기 연구하러 가야 되니까 노는 건 나중에 해. 수련이 제일 중요한 거 몰라?”

“필살기라니 뭐야? 완전 유치해. 역시 겉보기처럼 아직도 꼬맹이네.”

“나도 15살이야! 내년이면 성인이라고!”

“나보다 키도 작으면서.”

“윽!”

실제로 샨의 키는 체샤보다 작았다.

보통 또래끼리 비교하면 남자 쪽이 키가 큰 편이고, 특히 수인족은 체격이 더욱 건장하단 것을 생각하면 비정상적이라 봐도 좋으리라.

란에게 듣기로는 어릴 때 아팠던 것 때문에 성장이 많이 늦어졌다고 한다.

이제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으니 성장도 빨라질 것이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앞으로의 일이고 당장은 체샤보다 작은 것이 사실이었다.

“좋아 그럼. 누가 먼전지 이걸로 정하자고.”

“바라던 바야.”

샨이 두 주먹을 맞대더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수왕기의 마나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거세게 진동했다.

한편으로 체샤가 등짝에서 목검을 꺼내었다.

대체 왜 거기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안쪽에 철심이 박혀 있는 제법 흉흉한 물건이었다.

당장에라도 싸움판이 벌어질 것 같은 살벌한 공기 속에서, 시안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둘 모두 생각이 없었다.

라비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체샤 앞에 불러낼 생각도 없고 샨의 필살기 어쩌고 하는 건 뭔 소린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반드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기술 같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칼이 박히면 죽는 거고 피하면 사는 거지.

한창 싸우기 시작한 두 녀석을 뒤로하곤 시안이 방으로 향했다. 읽던 책이나 마저 읽어야지.

그때, 그에게 헐레벌떡 달려오는 기사 하나가 있었다.

“도,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이 영지가 큰일 같은 게 나는 영지였나?

검왕이란 이름 덕분에 그 어떤 영지보다도 평화로운 곳이 이곳인데.

가끔 거친 용병들이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모두 경비대 선에서 정리되는 매우 평화로운 영지다.

경비대의 병사가 웬만한 용병보다 강하니까.

“도적 떼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영지로 오던 상인이 짐을 싹 다 털렸다며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도적 떼라는 말에 시안은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이마스터의 영지를 건드리다니, 대체 얼마나 간땡이가 부었기에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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