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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83화 (83/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3화

“잠시만요, 도련님. 부디 진정해 주십시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잔뜩 흥분한 아즐렛이 언성을 높이려고 할 때, 잽싸게 앞으로 나와 시안에게 숙이는 젊은 마법사가 있었다.

시안이 눈만 움직여 그를 보았다.

“너는?”

“마법대 소속의 레일입니다.”

같은 마법대 소속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가 서슴없이 고개를 숙여왔다.

눈치가 빠르고 처세도 빠른 자였다.

그러나 안 된다. 그의 사죄로 아즐렛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레일! 사죄는 무슨 사죄냐! 공자, 당신이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걸 가주가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아나? 내 가주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친절하게 쫓아주려고 한 것이거늘 쯧쯧!”

정작 장본인은 저리 펄펄 뛰고 있는데 다른 놈이 대신 사죄한다 해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즐렛 님…….”

괜히 가운데에 낀 레일만 낭패였다. 그로선 자신의 상관이 가문의 후계자와 얼굴 붉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선 것이었는데.

“그래. 공자, 분명 아카데미의 1학기를 수료하고 온 것이렷다? 영지의 후계자가 반년 동안 얼마나 잘 배워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이 늙은이가 해야 할 일이겠지.”

“요점만 말해.”

“이익! 결투란 말을 못 알아듣느냐!”

“그거 좋지.”

시안이 옳다구나 앞으로 나섰다. 괜히 입씨름만 반복하는 것보다야 깔끔하게 주먹 한번 나누는 것이 그의 취향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즐렛이 이죽거렸다.

그는 과거 시안의 모습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수련 따윈 내팽개치고 싸돌아만 다니던 모습.

그런 놈이 아카데미에 갔다고 성실히 단련했으리란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다.

아즐렛이 자신 있게 소리쳤다.

“가라, 레일! 가서 공자의 경지가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해 보거라!”

“예? 제, 제가 말입니까?”

“그럼 당연하지. 이 노구에 내가 직접 뛰랴?”

“아, 알겠습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대리 결투까지 하게 된 것에 레일의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죽어갔다.

자신은 영지의 후계자에게 밉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적당히 싸우다 져주면 되려나?’

그런 생각에 그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무렵, 시안에게도 비슷한 요청을 하는 이가 있었다.

“제가 대신할게요, 스승님.”

샨이었다.

평소에 헤실거리고만 다니던 것과 달리 녀석은 지금 날카롭게 조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안이 물었다.

“네가?”

“제 누나가 모욕당했어요. 제가 싸워야 옳다고 생각해요.”

“난 딱히 신경 안 쓰는데.”

란이 옆에서 그렇게 한마디 하였으나 샨은 듣지 않았다. 누나와 달리 그는 매우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화를 내도 얘가 내는 것이 맞겠지.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아즐렛과 시안의, 각자 대리인을 내세운 대리 결투가 시작되었다.

사용인들이 멀찍이서 원을 그리며 앉아 있고, 공증인으로 빌프리트가 섰다.

그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레일과 샨이 가운데서 대치했다.

‘도련님이 상대면 대충 하려고 생각했지만.’

레일이 생각했다.

상대도 대리인이라면 굳이 봐줄 필요는 없겠지.

‘아즐렛 님이 네 누님을 모욕한 것이 잘못임을 알지만…… 세상이 잘잘못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더구나.’

그가 속으로 샨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가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샨은 수인족이다. 힘과 강함을 동경하는 종족.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긴다.’

옳은 쪽이 아니라 이기는 쪽이 정의라는 것을.

“가마.”

“오세요!”

레일이 두 손을 들었다. 그 사이에서 벼락이 모이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순식간에 완성된 마법을 그가 쏘아 보냈다.

그 직후.

“허억!”

레일은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샨을 보며 크게 놀랐다.

단 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 샨이 땅을 크게 밟고는 상체를 돌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곳엔 방금 막 완성된 번개 구체가 쏘아지고 있었지만 샨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손과 팔이 타들어 가고 있는 와중에도 샨의 주먹은 착실히 레일과의 거리를 좁혔고.

“큭!”

레일이 다급히 몸을 비틀어 주먹을 피해냈다.

어떻게든 피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빗나가진 않았다. 샨의 주먹이 레일의 옆구리를 찢으며 나아갔다.

뚜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레일이 다시금 벼락을 자아냈다.

갈비뼈 몇 대를 대가로 한 방 먹일 시간을 벌었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크앙!”

그러나 당연히 빼야 할 시점인데도 샨은 전혀 빼지 않았다.

그가 뻗었던 주먹으로 그대로 레일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뛰어오르며 다리로 레일의 머리를 감쌌다.

“어? 어어?”

물 흐르는 듯이 정신없이 연계되는 공격에 레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에게 결투라는 것은 서로의 공격을 한 방씩 교환하는 그런 형태였다.

딱히 암묵의 룰이나 그런 얘기가 아니라, 한 번 뻗고 나면 회수의 동작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검사라면 검을 회수해 다음 공격을 위한 자세를 잡아야 하고, 마법사라면 잔존 마나를 갈무리해 다시금 마법을 자아내야 하고.

그런데 샨은 그 간극이 극히 짧았다.

시안 정도라면 몰라도 레일의 경지로는 간극 자체가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준이었다.

“흐럅!”

샨이 레일의 목에 다리를 걸고 그 몸을 넘어가며 땅에 크게 패대기쳤다.

“커헉!”

등을 거세게 부딪친 레일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순간적으로 폐가 쪼그라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그의 목엔 어느새 샨의 손톱이 자리해 있었다.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폭호의 지속시간인 5분 중에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와아…….”

“꼬마 아이가 대단한데?”

“보통 애가 아닌가 봐.”

결투를 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웅성거린다.

레일이 참담한 표정으로 패배를 시인했다.

그로선, 아즐렛의 일과는 관계없이, 정체 모를 꼬마에게 패배한 것이 치욕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수인족이 대단하다지만 그래도 나이 차가 있는데.

그렇게 모두가 웅성거리는 와중.

“크윽…….”

레일이 패배하는 것을 본 아즐렛이 식은땀을 흘리며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결투에서 졌으니 사과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정말 싫었다.

이 나이씩이나 먹어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고개를 숙이란 말인가!

그나마 정신 똑바로 박힌 후계자였다면 못 이기는 척 숙일 수도 있지만, 시안 같은 망나니한테는 죽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슬쩍 몸을 빼 도망갈 생각이었다만.

“어딜 도망가려고?”

어느새 나타난 건지 시안이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공자, 가주에게 내 모두 얘기하겠다! 방학 때 돌아온 공자가 정신 못 차리고 또 어디서 굴러먹던 여자를 끼고 나타났다고 말이다! 더구나 친절하게 훈계를 준 나까지 핍박했다고!”

아즐렛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시안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때, 빌프리트가 찌푸린 얼굴로 아즐렛을 향해 고성을 질렀다.

“말조심하시오, 아즐렛 경! 그녀는 산군의 딸이란 말이오!”

“뭣……!?”

산군이란 단어를 들은 아즐렛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는 저 망나니 공자가 데려온 여성이 대단한 신분일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산군? 그게 누구야?”

“그 있잖아. 자카르타에서 제일 세다는 사람. 가주님이랑 동급인.”

“말도 안 돼! 가주님이랑 동급이라고?”

“그런 사람의 딸을 데려왔단 말이야?”

그 한마디로 란과 샨, 그리고 시안을 보는 눈빛이 일순간에 달라졌다.

예전처럼 어디 업소 같은 데서 데려온 애인이 아니라 높은 신분의 영애였다는 사실.

설령 진짜 애인이라고 해도 그들 입장에선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 데려왔던 그런 여자들과 달리 이 정도 신분의 영애라면, 어쩌면 가문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렇게 질릴 필요 없다. 본인도 딱히 신경 안 쓴다고 하니까, 이거 한 방으로 용서해 주마.”

시안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샨이 냉큼 달려와 아즐렛을 그대로 발로 까버렸다.

퍽!

“꺽!”

착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아즐렛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다 늙은 노인이었지만 용서가 없었다.

물론 기절만 하고 끝난 것 자체가 사실 봐준 것이었지만, 잘 모르는 사용인들에게는 용서 없이 보였다.

“이 둘은 내 손님들이니, 날 대하듯 모시도록.”

말을 잃은 사용인들에게 시안이 당부하고는, 두 사람을 데리고 성으로 들어갔다.

* * *

시안이 돌아온 직후의 사건은 성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 늙은 사람을 그렇게 차는 건 좀 그렇다…… 라는 의견이 소수 있긴 하였으나 그것뿐.

나머지는 모두 거품 문 아즐렛의 모습이 쌤통이었다는 얘기와 겐 아슬라의 자식들을 손님으로 데려온 도련님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저택이 그렇게 술렁이는 와중, 시안은 란과 샨에게 하나씩 방을 내주고 있었다.

“집구석이 엉망이라 미안하군.”

“상관없다니까, 그 정도쯤이야. 용병 아저씨들 보다 보면 그런 건 욕도 아냐.”

“그렇게 말해주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너 집에서 취급이 안 좋구나?”

“뭐 그렇지.”

본래의 시안이 죽은 이후로 본성에 왔던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베리엄을 잡은 후에 가주를 보러 왔던 일.

성의 사람들에게 있어선 자신은 아직 과거의 시안과 똑같이 보이리라.

“짐은 얼추 다 풀었나?”

“응.”

“네!”

“그럼 나가지. 모처럼이니 연무장으로 안내하마.”

영주성 안에는 몇 개나 되는 연무장이 있었다.

그중엔 외부인 출입금지인 장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시안이 두 사람을 안내한 곳은 그렇지 않은 쪽의 연무장이었다.

“오…….”

“기사들이 많네요.”

연무장에서 단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란과 샨이 눈을 빛냈다.

성의 다른 곳보다도 이곳을 제일 먼저 안내한 보람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이라면 이곳에 제일 흥미를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도련님. 그쪽 분들이 혹시 그……?”

“소문의 그 산군의 자제분들입니까?”

“꼭 좀 소개시켜 주십쇼!”

한편으로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은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안에 도는 소문을 들은 그들은 산군의 딸과 아들이란 존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특히 직접 실력을 증명하였던 샨에게는 더더욱.

“누나는 더 세요!”

그러나 샨의 발언에 그 관심은 곧 란에게 집중되었다.

“한 수 부탁드려도 되겠소?”

“좋아요.”

란도 그런 관심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녀가 양손을 부딪치곤 적당히 몸을 풀었다. 그러곤 처음으로 도전한 기사를 시작으로 대련을 시작했다.

1:1 대련. 진 사람은 빠지고 이긴 사람이 남아 다음 사람과 대련하는 방식의 승자전.

기사들이 점점 모이더니 대련에 참가하는 숫자가 어느새 한 손으론 셀 수 없어지고 있었다.

저 먼 자카르타의 최강자의 딸과 아들. 그런 이들과 대련할 수 있는 기회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시안은 연무장 한구석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빌프리트가 서 있었다.

“…….”

그가 가끔 곁눈질로 시안을 엿보았으나, 그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했다.

딱히 성격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업무 중에는 되도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그에게 시안이 먼저 말을 건넸다.

“아까 하려던 얘기는 뭐였지?”

“무슨 얘기 말입니까?”

“마중은 기사 하나 보내면 충분할 텐데 왜 마스터씩이나 되는 경이 직접 왔냐고.”

“아아.”

아까 성에 막 도착했을 때 하던 얘기 말인가.

빌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염 할아범이 도련님을 꼭 좀 부탁한다고 이르고 떠났거든요.”

“염노가?”

“할아범이 도련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예전에 봤을 땐 데면데면했던 거 같은데.”

“응 뭐…… 그보다 떠났다니, 어디 갔나?”

“그 왜 가끔 가주님이랑 둘이 외유를 나가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둘이서 떠났습니다.”

아.

시안이 납득했다.

염노가 가끔 가주와 외유를 다니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외유는 겉으로 말하는 것일 뿐이고 실상은 다르다.

‘칠흑마탑의 정보를 얻어서 나갔나 보군.’

다른 가신들에게는 비밀로 칠흑마탑을 치러 가는 일.

과연 어떤 정보를 물었길래 영지를 비우고 떠난 것일까.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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