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2화
황녀가 돌아간 후에도 무도회는 계속되었다.
애초에 그녀가 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데미안과 시안뿐이었으니까.
데미안은 헬레네와 함께 떠나갔고 시안은 시종에게 얼음을 탄 차가운 냉수를 부탁해 받았다.
그걸 마시며 그가 열이 올랐던 머리를 식혔다.
‘가주와 황녀가 어느 정도로 연결되어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해.’
헬레네의 자신감 넘치는 행동의 근원이 가주의 언약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 방학 중에 가주에게서 얘기가 나오겠지. 헬레네를 도와 데미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그녀의 약혼자 자리를 가로채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 가주와 헬레네 사이엔 아무런 얘기가 오가지 않을 가능성도 적지는 않았다.
‘가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후자가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미리 헬레네와 얘기가 오갔다면 방학이니 뭐니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지시를 보냈을 것이다.
그게 없다는 건 아직 그 단계는 아니라는 건데…….
물론 안심할 수는 없었다.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닌 그저 가주의 성향만으로 판단한 것에 불과하니까.
어찌 됐든 가주의 의향을 파악해 보는 것은 필수 불가결인 일이다.
‘마침 무도회만 끝나면 방학이니까.’
모든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기.
자신 역시 아그리드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그동안 염노와 둘이서 살아왔던 구석의 작은 저택이 아닌 가주가 웅크리고 있는 본성에.
가주를 떠볼 기회는 충분히…… 아니 충분하진 않겠지만 몇 번은 있으리라.
‘피곤하군.’
시안이 얼음 잔을 이마에 대었다.
그가 딱히 머리가 나쁘거나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따지자면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쪽이 취향이었다.
도서관에서 펜대를 굴리는 것보단 운동장을 달리고 검을 휘두르는 쪽을 좋아한다.
특히 그것이 복잡하고 골치만 아프고 보람 따윈 전혀 없는 정치 얘기라고 한다면 더더욱 취향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헬레네 황녀와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시안.”
“응?”
그때, 불쑥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시안이 돌아보았다.
그곳엔 초점이 흐려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에르제가 있었다.
어쩐지 설산 그류페인에서 처음 눈이 붉어졌던 그녀를 봤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방금 그 여자 누구야?”
황녀를 본 건가?
잠깐 뜨끔하긴 하였으나 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녀나 데미안이나 둘 다 제대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음…… 좀 알게 된 선밴데.”
“선배? 몇 학년? 몇 반?”
“그거까진 못 들었어. 방금 만난 사이라.”
“흐응-”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 에르제였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헬레네의 방문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뤄진 것이었으니.
한편, 그때쯤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전 곡과는 달리 시작부터 굉장히 활기찬 곡.
마침 잘됐다.
헬레네의 화제가 계속 나오는 것도 불편하였기에, 그가 대충 얼버무릴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모처럼인데 한 곡 출래?”
“응!?”
그러자 에르제의 눈에 초점이 확 돌아오더니, 그녀가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안의 손을 잡았다.
“으, 으응. 부탁해요.”
“잘 부탁해.”
헬레네 때와는 달리 곡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와 대화는 없었다.
에르제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이고 시안도 딱히 말을 걸 만한 화제도 없었고.
그래도 나름 즐거웠다.
아무런 생각 없이, 복잡한 정치를 고려하는 일도 상대의 의중을 살피며 말을 고르는 일도 없이, 그저 몸을 움직이기만 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헬레네와 출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이다.
그 에르제와의 춤이 그가 무도회에서 했던 마지막 일이었다.
약간의 기분전환이 된 시안은 에르제에게 인사를 남기고 미련 없이 기숙사로 돌아왔다.
무도회장의 불빛은 그가 돌아간 이후에도 밤늦게까지 켜져 있는 채였다.
* * *
무도회도 끝나고 이젠 정말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수업도 시험도 없다.
여름 방학이었다.
“편지 보내고, 다음에 보자!”
“그래! 너도 가는 길 조심하고!”
“바이 바이!”
아카데미의, 특히 기숙사 앞은 아침부터 마차들로 바글바글했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성길에 오르는 마차들이다.
누구는 가다가 워프 게이트로 갈아탈 것이고 누구는 그대로 마차로 고향의 영지까지 향하겠지.
시안도 방에서 적당히 짐을 싸고 나왔다.
그는 워프 게이트를 타고 귀성하는 쪽이다.
워프를 타는 가격이 적지 않게 비싸다곤 하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경비는 가문에서 나오니까.
“스승님!”
그리고 기숙사를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란과 샨, 두 호월족 남매였다.
이쪽을 보며 크게 손을 흔드는 샨과 그 옆에서 평소처럼 찡그리고 있는 란.
시안이 의아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야. 인사라도 하러 온 건가?”
“인사보단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
“스승님 집에 가보면 안 되나요!”
뜬금없는 부탁에 시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샨의 뒤에 있는 란을 쳐다보니 그녀가 살짝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너흰 집에 안 가?”
“아버님이 방학이라고 집에 붙어 있을 생각 말고 수련 여행이라도 떠나라고 하셔서요!”
겐 아슬라가?
의아해하는 시안에게 란이 덧붙였다.
“원래 우리 수인족은 집에 붙어 있기보다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는 일이 많거든.”
수인왕국 자카르타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한 번쯤 용병 생활에 발을 담그는 용병국가다.
그런 만큼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정착한 집이 있다고 하더라도 집에 있는 날보다 돌아다니는 날이 더 많은 경우도 적지 않았고.
종족으로서의 문화 자체가 집을 떠나 외유를 하는 것에 전혀 부담을 갖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랬군. 근데 왜 하필 우리 가문에?”
“소메르에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이유도 있고, 나 혼자라면 몰라도 샨이랑 같이 가는 거니까.”
“기왕이면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건가.”
“뭐 그렇지. 거기에 검왕의 가문이라면 수련 여행의 장소론 더할 나위 없잖아?”
이치는 맞다.
아그리드 가문은 본래도 수련을 위해 자유 기사들이나 용병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다.
아그리드 가문의 기사들이나 병사들의 질이 높은 것엔 가주가 검왕이라는 것 외에도 이런 이유도 있었다.
뭐 애초에 수련 여행의 장소로 몰리는 이유가 검왕의 존재 때문이니 결국 올라가 보면 가주 때문이 맞긴 하지만.
‘흠.’
시안이 잠시 고민했다.
둘을 초대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과연 자신이 서슴없이 가문에 사람을 초청해도 되는 것일까?
만에 하나의 경우란 것도 있는 법인데…….
그러던 중 그의 머릿속에 예전의 염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행입니다. 도련님이 사람 사귀는 것에 서툴러서 항상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정화교단의 구울 퇴치 의뢰에서 구속한 베리엄을 건네줄 때.
이안과 레이나, 드론드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곤 그리 얘기하며 기뻐했었지.
그때의 광경이 떠오르자 시안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 와라. 식객 좀 데려간다고 휘청거릴 집도 아니니까.”
“와아! 감사합니다!”
“신세 좀 질게.”
흔쾌히 수락하자 란의 찌푸린 표정이 조금은 풀려왔다.
수련 여행에 다소의 걱정은 있었다. 여행 도중에 샨의 상태가 안 좋아진다면 그보다 큰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시안의 가문이라면 그렇게까지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메르에 있는 정화교단의 신성마법은 샨의 상태에도 크게 도움이 되니까.
“영지까지 직행하는 워프가 있어. 그걸 타고 갈 건데, 너희 돈은 있어?”
“그 정도는 있어.”
“충분해요!”
“그럼 출발하지.”
그렇게 시안이 두 사람을 데리고 에버웨일의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대륙의 중앙에 있는 도시인 만큼 이곳엔 수많은 워프 게이트가 몰려 있다.
그 워프를 관리하는 관리소 또한 대륙에서 최대의 규모였다.
“아그리드 영지 말씀이시죠? 이쪽입니다.”
마법사의 안내에 따라 세 사람이 아그리드와 연결된 워프로 향했다.
마법사가 패널을 조작하고 이윽고 워프가 활성화되었다.
“위험하니까 한 사람씩 천천히 들어가 주세요.”
한꺼번에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러면 워프가 흔들리며 매우 불안정해진다.
한 사람씩 들어가는 것이 안전하게 워프를 타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차례차례 푸르게 빛나는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고.
“와아!”
“여기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아그리드 영지에 도착해 있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련님.”
“빌프리트 경?”
워프 관리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영지의 기사단장인 빌프리트 경이었다.
가주에게 사사한 수제자로 이자크과 같은 마스터급의 기사였다.
영지의 기사들 중 가장 강한 ―가주를 제외하고― 기사.
“옆에 분들은?”
따라온 란과 샨을 보곤 그가 질문했다.
시안이 대충 그들을 소개했다. 아카데미에서 알게 된 지인이고, 자카르타의 아슬라가의 아들과 딸이라고.
그러자 무표정을 고수하던 빌프리트의 얼굴에 미미한 요동이 있었다.
“아슬라가라면…… 호월족의 당주인 겐 아슬라의 자제분들이란 말입니까?”
“샨이에요!”
“반갑습니다. 란 아슬라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란이 툴툴대지 않고 정상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니, 오히려 더없이 정중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평소의 찡그린 얼굴도 풀고 있었고 입가는 희미한 호를 그리고 있기까지.
반대로 샨은 평소와 똑같이 씩씩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어른들한텐 공손한 타입인가?’
아니면 샨의 보호자로서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끼고 있다거나 그런 것일 수도.
“아그리드의 기사단장인 빌프리트입니다. 아그리드 영지에 잘 오셨습니다.”
빌프리트가 공손히 얘기하고는 세 사람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바깥엔 이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셋이 그곳에 올라탔다.
영주성까지 향하는 내내 샨은 바깥을 보며 신기해했다.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것은 자카르타의 도시와 에버웨일 단둘뿐이다. 처음 보는 소메르의 도시는 그에게 신기하게만 다가왔다.
“그래도 비슷한 점도 있네요! 길에 칼 든 사람들이 많이 보여요!”
“검왕의 도시니까.”
“역시 스승님은 아버지도 대단한 분을 두고 있군요!”
“너희 아버지도 비슷한 사람이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죠, 하하.”
바깥을 구경하며 떠들썩한 샨의 말에 적당히 대답을 해주다 보니 성까진 금방 도착하였다.
성에 들어가 세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방학을 맞아 돌아온 도련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용인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부담스럽게도.
시안이 빌프리트에게 얘기했다.
“다음부턴 이런 건 하지 말도록.”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문의 후계가 돌아오는 것인데 이걸로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데요.”
“기사단장이 직접 맞이하러 나와 주는 걸로도 차고 넘쳐.”
그리 얘기하자 빌프리트가 눈을 크게 뜨며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이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왜?”
“아뇨…… 아닙니다. 도련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지라.”
“……됐고. 그보다 관리소에도 대충 호위기사 한 명 보내면 되지 왜 경이 직접 온 건가? 그렇게 한가한가?”
“아 그건…….”
빌프리트가 대답하려던 때, 성 안쪽의 문을 열고 웬 노인 하나가 영지의 마법사들을 이끌며 바깥으로 나왔다.
지팡이를 짚고 나오던 그가 잔뜩 늘어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사용인들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러다 떠올랐다는 듯이 이마를 쳤다.
“아차차, 오늘 공자가 돌아온다고 했던 날인가.”
시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빌프리트와 같은 아그리드의 가신 중에 하나. 가신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전전대 영주 때부터 가문에 봉사하던 노인.
영지의 마법대(隊)를 책임지는 마법대주 아즐렛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아즐렛 경.”
본래라면 지위가 낮은 아즐렛이 먼저 말을 걸어야 맞지만 아즐렛은 후계자 신분으로는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는 전전대 가주, 즉 지금 가주의 아버지 대부터 가문을 모셔오던 이였으니까.
막말로 가주가 갓 태어나 탯줄을 자르던 모습까지 봤던 것이 그였다.
그 노인이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옆에 있는 란을 보고는 흥, 하고 코를 울렸다.
“하이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옆에 여자를 끼고 나타났구나.”
그의 말투에 사용인들 사이에서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모시는 상관 둘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죽어 나가는 것은 아랫사람들뿐이었으니.
그러나 한편으론, 그들 역시 아즐렛에게 동조하는 면이 있었다.
‘그건 그렇지.’
‘역시 아카데미에 간다고 사람이 변하진 않나 봐.’
‘아즐렛 경이 꼰대에다 사람 부리는 것도 험하고 까탈스럽고 짜증 나고 사고방식도 구식이고 답답한 상관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맞는 말을 한 것 같아.’
한 명은 이 기회에 실컷 사심 섞인 욕을 쏟아내고 있었으나, 어쨌든 전체적으로 아즐렛의 말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사용인들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있는 시안.
자신의 엄포가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아즐렛이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이번에는 수인 여자냐?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뼈다귀인지 몰라도 아주 국제적으로 노는구나.”
그 말에는 빌프리트 역시 표정을 굳혔다.
그가 아즐렛에게 한마디 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그 앞을 막는 손이 있었다.
“아즐렛.”
시안이, 더 이상 경이란 호칭도 붙이지 않은 채 아즐렛을 바라봤다.
“지금의 무례는 듣고 넘기기 힘들군. 정식으로 사죄하길 바란다.”
차마 말대답을 들을 줄을 몰랐는지 아즐렛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가주보다도 훨씬 더 오래 이 영지에 있었던 고참으로, 말했던 대로 아직 후계자인 신분으로는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심지어 천둥마탑 출신으로 그쪽의 배분도 상당히 높다.
덕분에 존재만으로도 아그리드 가와 천둥마탑의 관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는 그였지만.
그런 것들은 후계 따위에 미련이 없는 시안에겐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사죄 방법은 발차기 한 방이면 되려나.”
“이익……!”
알렌을 걷어찼던 것을 떠올리며 그리 얘기하자 아즐렛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