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81화 (81/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1화

데미안 오르커스가 황녀의 약혼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재상인 오르커스 공작은 황녀 진영의 사람이다.

약혼이란 끈으로 이어진 사이.

다만 1황자의 뒷배도 여간 만만치가 않다.

이 제국에서 재상만큼이나 영향력이 큰 인물인 대장군이 그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재상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황녀를 지원하고 있다곤 하나 대장군이 이끄는 군부의 세력도 그에 못지않다.

오히려 여차할 경우를 생각하면, 실질적인 무력이라는 점에서 대장군 쪽이 더욱 위험한 면이 있었다.

‘3황녀가 화염마탑에 투신한 것도 대장군 때문이라고 했었지.’

헬레네가 일찍부터 화염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간 것의 이면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대장군과 군부를 견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미리 화염마탑을 끌어들인 것.

화염마탑은 5대 마탑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전장과 전투에 대해 빠삭하다.

군부에 대항할 카드론 이곳보다 좋은 카드는 없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가주는 중앙 정치엔 관심을 끄고 있으니.’

정말로 관심이 없는지는 본인 말곤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 겉으로 아그리드 후작은 정계에 발을 들이고 있지 않았다.

1황자와 3황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 그저 관망만.

덕분에 황자와 황녀만 몸이 단 것이 현 상황이었다.

‘특히 아그리드 가문에서 잠깐이라도 검을 수학한 기사들이 결코 적지 않으니.’

제국제일검. 검왕 베르페드 아그리드.

그를 선망하는 기사들은 결코 적지 않다. 그것은 다시 말해 군부에의 영향력 역시 적지 않다는 뜻.

그런 가주가 황녀의 손을 들어준다면?

하이마스터를 편입했다는 실질적인 이득과 함께 1황자 쪽의 군부 세력을 뒤흔들 수 있는 카드가 된다.

반대로 1황자의 손을 들어준다면, 군부는 더더욱 결집하여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철옹성으로 변모하겠지.

즉 가주가 손을 들어주는 인물이 차기 황제가 된다.

과장도 뭣도 없는 현 제국 정계의 현실이었다.

‘…….’

새삼 피부로 다가왔다.

자신이 어떤 이를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누구의 손아귀에서 ‘나’를 되찾으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전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강자임과 동시에 제국의 차기 황제를 골라잡을 수 있을 수준의 권력자였다.

“어떠냐 시안. 듣자 하니 그대도 꽤나 놀았다고 하지 않더냐. 그대라면 최근 데미안의 행보 정도는 꿰고 있겠지?”

헬레네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시안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 깊은 곳에 반짝이는 음험한 빛을 모를 시안이 아니었다.

약혼자의 행실을 추궁하는 것이야 누구라도 당연히 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현 제국의 상황, 그리고 아그리드 후작의 위치가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본다면.

절대 ‘그냥’ 묻는 것이 아니었다.

“송구합니다만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제는 철이 들어서, 그런 것보단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뭐야, 그런가?”

“예.”

시안이 힐긋 데미안을 보곤 대답했다.

언제나 제 잘난 맛에 사는 데미안이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초조해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약혼녀에게, 그것도 자기보다 신분도 높은 황녀에게 이런 추궁을 당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보다 정말 과거뿐이라면 좀 더 당당하게 있을 텐데, 저 모습을 보니 최근에 찔릴 만한 일을 하긴 했나 보다.

‘어쩌면 그 정보를 입수하고 황녀가 행동에 나선 걸지도 모르지.’

갑작스러운 헬레네의 행보를 나름대로 추정해 가며 시안이 상황을 정리해 갔다.

“흐음~”

한편 헬레네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모든 카드가 자신에 손에 들어 있어, 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 모습.

“생각해 보니 데미안이 여기 있어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구나.”

“이미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무래도 둘이서 따로 얘기를 해봐야 되겠어. 마침 무도회기도 하니 춤이나 한 곡 추지 않겠느냐?”

황녀의 춤 신청을 거절할 수 있을 리도 없다.

다만 헬레네는 시안이 아니라 데미안에게 먼저 손을 올렸다.

데미안이 눈을 깜빡였다.

“황녀님?”

“뭐 하느냐, 데미안. 우리가 먼저 춰야 시안과도 자리를 가질 것이 아니냐.”

“아, 예. 죄송합니다.”

“약혼자를 내버려 두고 외간 남자와 먼저 출 정도로 나는 헤픈 여자가 아니란다.”

“끄응…….”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데미안에겐 비수나 다름이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표정을 짓는 데미안을 끌고 헬레네가 안쪽 회장으로 향했다.

“후우.”

테라스에 혼자 남은 시안이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며 미간을 문질렀다.

‘약혼.’

예로부터 결혼은 가문과 가문, 국가와 국가를 잇는 가장 확실한 동맹 카드로 쓰여 왔다.

그리고 헬레네는 훌륭히 그 카드를 사용하여 오르커스 공작을 포섭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여기에서 끝일 것이다.

약혼이란 카드는 한 번 쓰면 끝이 나는 카드가 아니던가.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 본다면.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발상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약혼이란 카드를 사용했다면 그다음은 파혼이란 카드가 손에 들어온다고.

‘당연히 황녀 본인의 책임으로 파혼에 이르게 두진 않겠지.’

하지만 상대방의 허물로, 그것도 정사 관계라는 추문으로 인해 파혼이 성사된다면.

오르커스 공작가의 체면은 밑바닥에 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황녀 진영을 벗어날 수 없다.

파혼의 이유가 이쪽에서 나왔는데 정작 본인은 1황자 진영으로 갈아탄다?

그의 체면은 바닥 정도가 아니라 지하로 처박히게 될 것이며 명분 또한 잃게 된다.

반대로 황녀 본인은 흔들리는 재상의 세력을 흡수하며 동시에 다시금 얻게 된 약혼이라는 카드를 활용하려 하겠지.

이를테면, 재상과 맞먹는 또 다른 주요인물을 포섭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한다든가.

‘말이 쉽지.’

구도 자체는 얼추 짜인다.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정도의 수모를 당하고 오르커스 공작이 과연 가만히 있을 인물일까?

겉으론 ‘책임을 통감하여 후계 구도에선 손을 떼겠다’, 이런 식으로 얘기한 뒤에 뒤에서 1황자 세력에 도움을 준다거나, 아니면 상상도 못 할 어떤 수를 써올지도 모른다.

제국의 재상쯤 되는 이라면 그 정도 암약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같은 이유로 황녀 진영의 이 엄청난 스캔들을 두고 1황자 측도 뒷짐이나 지고 가만있진 않을 터.

현실적인 장애물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이 애로사항이 가득한 수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재상을 포함해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자신이 있는 건가?’

황녀에게 그만큼의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겠지.

그 자신감의 이면에 뭐가 있을까.

그저 본인의 실력에 대한 과신뿐인가? 아니면 화염마탑주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자신감?

혹시,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가주가 이미 뒤를 봐주기로 약조한 것일 가능성조차 있었다.

“후우-! 다녀왔다 시안. 마음의 준비는 다 해두었느냐?”

“시안. 솔직하게만 말하면 된다. 솔직하게!”

솔직을 강조하는 데미안의 당부를 들으며 그가 헬레네의 손을 잡았다.

“영광입니다, 황녀님.”

시안이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회장으로 향했다.

마침 타이밍도 좋게 새로운 곡이 시작하려던 순간.

황녀는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회장의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이곳이 나의 자리라는 듯이.

이내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고, 두 사람이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시안. 나와 데미안의 사이가 어때 보이느냐?”

아까 말했던 것과 달리 황녀가 묻는 것은 데미안의 추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뭐 예상했던 일이다.

시안이 차분하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듯 시치미를 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합니다. 100명의 점술가에게 물으면 100명 모두 최고의 궁합이라 얘기할 테죠.”

“말은. 정말로 그리 여기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아니면 곤란하다.

시안에게 있어 이 상황이 최악인 이유는, 가주라면 기꺼이 황녀의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아직 자신이 가문의 후계이나 실제론 다음 가주는 체샤로 낙점돼 있다.

그녀야말로 가주의 피를 이은 유일한 혈육이며, 자신은 언제 어느 때든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고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버림패가 기특하게도 황녀의 부군(夫君)이라는 최고의 먹이를 물어 온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를 이유로 자연스레 자신을 가문에서 내보내 황실에 앉히고, 차기 가주는 남아 있는 체샤를 올리고.

아무런 잡음 없이 둘째로 후계를 교체하면서 황실과의 튼튼한 연결 고리까지 잇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수가 아닌가.

“후후, 그럼 다르게 물어볼까. 네가 보기에 나는 어떻지?”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하는 헬레네의 모습에 시안이 아까 보았던 무도회장의 폭발을 떠올렸다.

백금화 4개를 던져주곤 그대로 리위의 옷을 몽땅 태워버렸던.

“참된 성군의 자질을 가진 황녀님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얘기했다.

그러자 헬레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안을 바라보았다.

춤을 추느라 붙잡고 있는 시안의 팔뚝을 그녀가,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모습은 많은 커플들의 춤과 음악에 묻혀 아무에게도 눈치 채이지 않았다.

당사자들 외에는.

“그런 뜻이 아닌 걸 알 텐데? 여자로서 내가 어때 보이냐는 의미가 아니더냐.”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형수님.”

“호오, 지금 상황에 그리 부르는 것이냐?”

황녀와의 정분 따위 결코 바라던 것이 아니다.

만약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자신은 아그리드 대공으로서 평생을 아그리드와 황실이라는 이름에 억눌려 살아가게 되리라.

평민에서 대공으로.

신분은 미칠 듯이 상승하는 셈이다.

하지만 내 이름을 되찾겠다는 각오와는 영영 멀어지게 되겠지.

그렇게, 어떠한 종류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자신이라는 존재는 조금도 남지 않으리라.

“…….”

“흠.”

헬레네가 잠시 입을 다물고는 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센 결의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어찌 보면 무척 도덕적인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헬레네의 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눈에 살짝 의아함이 깃드는 그 순간.

“재상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시안이 얘기했다.

헬레네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뭐야, 그런 것을 걱정하고 있느냐? 걱정 말거라. 우리 둘만 조용하면 그 누가 우리 관계를 눈치채겠느냐.”

“그냥 불장난일 뿐이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내 약혼자는 데미안이 아니더냐.”

“단순히 상대가 필요한 것이라면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저보다 비밀스럽고 안전한 사람으로 구할 수 있을 텐데요.”

“…….”

헬레네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살짝 어려 있던 의문 역시 사라졌다.

동시에 떠오른 것은 놀라움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있었으니.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듣던 것과 많이 다르구나. 소문대로의 그대라면 생각 없이 좋다고 헬렐레하거나 기껏해야 데미안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철이 들었다고.”

“소문 속의 그대와 내 눈으로 보는 그대의 차이가 고작 철이 들고 안 들고의 차이란 말이냐?”

그녀는 지금까지 소문과 데미안의 얘기를 통해서만 시안 아그리드란 사내를 알아왔다.

그 속의 시안과 지금의 시안은 결코 같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의 명민한 머리가 곧바로 한 가지 가능성을 유추해 내었다.

‘소문은 만들어진 것인가?’

망나니라는 소문은 조작된 것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가.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다. 시안 본인이겠지.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 때문인가.

‘아그리드 가문에 뭔가 문제가 있나?’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따라 아그리드 포섭 계획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것은 한참 빗나간 착각이었지만 시안이 본래의 시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됐건, 제 쪽에서 황녀님의 제안에 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밀고 나가시겠다면 아버님부터 공략하고 오시죠.”

“후작부터 먼저라……. 후후, 그대를 유혹하는 정도야 간단할 거라 생각했는데 참으로 어려운 사내로구나. 그 무서운 사내부터 뛰어넘고 오라니.”

헬레네가 반짝거리며 눈을 빛냈다.

그녀가 시안을 끌어들이기 위해 방문한 것은 사실이나,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냥 가볍게 흔들어 놓은 다음 아그리드 후작을 끌어들이기 위한 발판 정도로 써먹으려 생각했었는데.

근데 그 의중이 이미 간파당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았지?’

춤을 추던 중에?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에?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이들이나, 혹은 오라버니를 상대할 때나 느껴지는 긴장감이 올라왔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 있는 건 그런 노괴들이 아니라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사내.

그 괴리감이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머리에 뜨거운 피가 올라온다.

근래 들어 가장 기분이 고양되었다.

“하지만 생각이 너무 많구나.”

“생각이 많다?”

“그대가 단순히 불장난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데미안이 정말로 추문을 만들었을 때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더냐.”

시안이 눈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야 당연한 가정이다.

왜냐면 그녀의 계획대로 자신이 포섭되었을 경우, 그 추문을 퍼뜨리거나 날조하는 역할은 바로 자신에게 부여될 테니까.

예전부터 데미안과 온갖 여자놀음을 일삼았던 망나니 시안에게 말이다.

“이런,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그대는 나를 너무 오해하고 있어.”

“뭐가 오해란 것이죠?”

“나는 데미안의 미래의 아내가 아니더냐. 그저 낭군님의 나쁜 손버릇을 일찍부터 교정해 놓고 싶을 뿐이란다. 결혼 전이라고 가만히 뒀다가 이후에도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

“그러니 데미안이 제 아랫도리만 조심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지. 후후후.”

그 뻔뻔스러운 말에 시안이 할 말을 잃었다.

빠져나갈 길도 제대로 마련해 놓았군.

딱 그 무렵 음악의 템포가 느려지며 춤도 마무리 동작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시안과 헬레네의 대담도 멈추었다.

이윽고 음악이 멈추고, 일순간이나마 회장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내 춤을 다 춘 학생들이 흩어지며 사방에서 갖가지 소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안은 헬레네를 에스코트하며 데미안에게 인계했다.

“데미안, 이만 가자꾸나. 얘기는 모두 마쳤단다.”

“큼……. 시안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글쎄?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후후, 즐거운 듯이 웃으며 그녀가 데미안의 팔짱을 끼고 회장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그녀가 데미안 몰래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움직였다.

―또 보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의 움직임만으로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시안도 입술만 움직여 화답했다.

―운명.

―!

아까 첫 만남 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져 왔다.

저렇게 부끄러워할 거면서 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이나 한 것인지.

무슨 연극이나 오페라 같은 것에 감명이라도 받은 것일까.

여하튼 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고.

시안이 생각에 잠겼다.

‘3황녀 헬레네 울 비스마르크. 가주 베르페드 아그리드.’

둘의 관계성은 그에게 있어 새로운 위협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건 강해진다고 해결되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본디 결혼은 가문의 주인이 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쯧. 쉬운 일 하나 없군.”

아직 마룡왕과 칠흑마탑의 일조차 일단락된 것 하나 없거늘.

세상일 쉬운 것 하나 없다는 말이 오늘만큼 절절할 수가 없었다.

‘웅우!’

‘고맙다.’

자신의 감정이 각인을 통해 전달되었는지 라비가 걱정이 담긴 말을 건네 왔다.

위로를 해주는 라비의 말에 ―알아듣진 못하지만― 시안이 피식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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