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0화
“어이,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소란이 이는 곳을 보니 두 남녀가 중심에 있었다.
소리를 지른 쪽은 남학생 쪽이었다.
보석이 박힌 하얀 가면을 쓰고 마찬가지로 하얀 정장을 빼입은 남성.
그런데 앞섬이 자줏빛 액체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뭔가 해서 봤더니, 앞에 있는 여학생의 손에 비어 있는 와인잔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미안하다고 하지 않느냐.”
“미안하다면 다야! 어떻게 책임질 건데? 오늘을 위해 두 달 걸려 주문 제작한 옷이란 말이다!”
여학생이 눈을 찡그렸다.
붉은 머리를 목덜미까지 틀어 올려 묶은, 굉장히 키가 큰 장신의 학생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만 드러나는 기묘한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드러난 한쪽 눈을 보니 화상 흉터로 덮여 있었다.
“하아. 정말 소란스러운 녀석이구나. 그래, 얼마나 하는 물건인데 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그녀가 한숨을 쉬며 얘기하자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남학생이 눈을 빛내며 턱을 치켜들었다.
“400금화.”
“사백?”
“그래. 이제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겠냐?”
“흥. 거짓말이로군. 그딴 촌스러운 옷이 400금화나 한다니, 파는 이는 둘째 치고 사는 이가 있을 리가 없지 않으냐. 눈이 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뭐야!?”
여학생의 거침없는 말투에 남학생의 목소리가 다시 튀어 올라갔다.
한편 시안은 이제야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그레이트 힐에서 덤볐던 그놈이군.’
리위 에르만.
그레이트 힐에서 사람을 모아 자신과 에르제를 습격했던 그 수인 놈이었다.
그때 한 번 큰코를 다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사람은 그 정도론 바뀌지 않나 보다.
굳이 엮이기는 싫은 마음에 시안이 근처에 있는 시종을 한 명 손짓해 불렀다.
“필요하신 일이라도…….”
“저쪽 분이 옷에 얼룩이 져 곤란한 모양이다. 데리고 가서 닦아주도록.”
시안이 그에게 은화 두 개를 건네며 얘기했다.
시종이 그걸 받으며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저 소란은 어떻게 해야 했는데, 시종 된 몸으론 함부로 끼어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같은 학생인 시안이 부탁함으로써 명분도 생긴 데다 팁까지 따로 받으니 그로선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리위에게 다가갔다.
“저…… 저쪽의 학생분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곤란하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닥쳐!”
“어억!”
그러나 리위가 한껏 눈을 찌푸리더니 공손히 접근한 시종을 걷어차 버렸다.
단련된 수인의 발길질을 시종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종이 트레이를 떨어뜨리며 그대로 엎어졌다.
그 일을 계기로 주변 공기가 한층 싸늘해졌다.
그전까지는 반쯤 재미로 구경하던 학생들도 눈을 찌푸리며 소곤대기 시작했다.
리위 본인도 순간 아차 했는지 잠시 움찔거렸으나.
놈은 절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 과격해졌다.
“지금 당장 변상하든가. 아니면 네가 닦든가.”
“뭐?”
“그래, 이거 괜찮네. 그 흉물스러운 얼굴로 아양을 받아주는 남자도 없었을 텐데 이번 기회에 한번 해보든지?”
녀석이 가면으로 가려져 있지 않은 화상 흉터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듣는 주변 사람들이 찡그릴 정도로 도를 넘은 발언이었으나, 여학생은 그냥 나직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더 이상 소란 피우는 것도 원치 않는데 깔끔하게 변상으로 끝내기로 하지.”
그녀가 품에서 백금화 네 개를 꺼내 던졌다. 하나가 금화 100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품에서 백금화를 꺼내는 여학생의 모습에 리위가 잠시 멈칫했다. 설마 생각보다 신분이 높은 녀석인가?
하지만 이내 날아오는 백금화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자신은 소메르가 아닌 자카르타의 사람이니 별문제 없겠지.
“쳇. 진작 그럴 것이지.”
백금화를 낚아채며 희희낙락하는 리위.
이겼다는 생각에 도취된 녀석을 보며 여학생이 얘기했다.
“변상했으니 이제 그 옷은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얘기렷다?”
“뭐?”
영문 모를 소리에 리위가 눈을 찌푸렸다.
그 직후.
딱-
콰아아앙!
리위의 몸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놈의 전신을 가득 덮은 불꽃이 리위의 옷을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다른 곳으로 확산되지도, 심지어 바닥에 깔린 카펫의 털 하나조차도 타지 않고, 오로지 놈만을 태우는 불꽃이었다.
“끄아아악!”
“꺄악!”
“뭐, 뭐야!?”
비명을 지르는 리위와 주변의 구경꾼들.
잠시 후 불꽃이 사그라들었을 때 보이는 것은, 타다 만 속옷 하나만을 걸친 채 발가벗고 기절한 리위의 모습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것이 묘하게 익숙했다.
“흥. 까불고 있어.”
여학생이 만족스레 중얼거리곤 손바닥의 불꽃을 후 불어 꺼뜨렸다.
갑자기 피어오른 불꽃에 주변을 경계하던 경비원들이 달려온다.
그걸 보며 시안이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미친 여자다.’
무도회에서 화염마법을 터뜨리다니, 아무리 조절에 자신이 있었다곤 해도 당연히 해선 안 될 행동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라.
무도회에 참석한 기사가 검을 뽑아 휘두르면서 ‘베지 않게 조절할 거니까 상관없다!’라고 말하면 순순히 납득하겠는가?
「휘유~ 화끈한데?」
“화끈한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갔다고 하는 거야.”
「뭐 어때. 깜장이도 시종만 보낼 게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서 구해주지 그랬어.」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시안이 소란의 장소에서 멀어진 후 시종에게 샴페인 한 잔을 더 받았다.
레이디를 구해주는 정의의 기사 같은 건 취향도 아닐뿐더러, 지금은 곧 만날 황녀와의 예상 대담을 짜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팠으니.
「암튼 재밌는 구경 하나 했다 치고. 빨리 알렌한테 가자.」
“그거 말인데. 당장은 힘들겠어. 방금 소란을 구경하다가 시간을 날려서.”
「왜? 약속이라도 있었어?」
“어. 그러니까 너도 일단 가봐.”
「어쩔 수 없나~」
알티마가 시안의 앞주머니에서 나와 쪼르르 어깨에 올라탔다.
그러곤 알렌에게 향하기 위해 날개를 펼친 그때.
“여기 있었군.”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알티마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시안의 앞주머니로 숨었다.
시안이 찾아온 여성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붉은 머리를 목덜미까지 올려 묶은, 한쪽 눈에 화상 흉터가 있는 장신의 여성.
아까 본 그 여자였다.
“시종을 보내줬던 게 그대가 맞느냐?”
시안도 꽤나 키가 큰 편인데 그녀는 그런 시안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컸다.
허공에서 눈을 마주치며 그녀가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진짜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만…….”
시안이 찡그리며 대답했다.
경비원이 달려오는 걸 분명 봤는데, 발 빠르게 도망치곤 자신을 쫓아온 건가?
“고맙다. 세심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내로구나.”
“그 말 하나 하려고 날 찾은 건가?”
“그래. 예부터 은과 원은 확실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배워와서 말이다.”
그거참…… 가정교육을 잘 받았군.
“이름이 뭐지? 1학년 애들 중에는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선배인가?”
“미안하지만 이름은 댈 수 없단다. 그렇지 않으면 가면을 쓰고 있는 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녀가 가면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가면무도회라곤 하지만 아는 사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인데 숨길 필요가 있나.
나름 신비주의를 표방하고 싶은 것인지, 그녀는 결국 자기소개를 하지는 않았다.
‘말투를 보면 지체가 높은 귀족인 것 같긴 한데.’
그리고 방금 봤던 상당한 레벨의 화염마법.
선배 중에 신분이 높으면서 화염마법의 조예도 상당한 사람이 누가 있더라…….
선배들을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붙어보고 싶은 강한 선배들은 체크해 뒀다.
다만 팟, 하고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감사 인사는 마쳤으니 이만 가보마. 일이 있어서. 다음에 언젠가 우리의 운명이 얽히게 된다면 보도록 하지.”
“……? 아, 그래.”
그녀가 후후 웃음을 흘리며 그 말만 남기고 떠나갔다.
뒤를 돌며 손을 흔드는 것이 꽤나 겉멋에 가득한 모습이었다. 폼을 잡는다고 해야 하나.
그때 문득, 시안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 설마…….’
그러나 그는 그 가정을 즉시 부정했다.
화염마법사가 한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리가.
그러나 잠시 후.
“시안, 잘 왔다! 황녀님, 이놈이 제가 그렇게 아낀다고 했던 아우 놈입니다.”
“…….”
“…….”
가운데 데미안이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시안과 헬레네 황녀가 가면을 벗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맨얼굴은 처음 보았지만 옷차림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운명이 얽히게 되었군요, 황녀님.”
“말하지 마!”
시안이 툭 얘기하자 헬레네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탕!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그렇게 폼 잡으면서 헤어져 놓고 바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
가운데서 아무것도 모르는 데미안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호오. 제가 없는 사이 그런 재미난 일이 있었군요.”
“딱히 재밌진 않았다만.”
“수인 주제에 그리 건방지다니. 만약 저였다면 팔다리 정도는 분지르고 보냈을 겁니다.”
데미안이 눈을 번뜩이며 얘기했다.
약혼녀 앞이라고 대충 허세를 부리며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이 풀풀 느껴졌다.
여전히 이종족을 끔찍이 싫어하는 녀석이다.
“시안 아그리드…… 그래, 네가 아그리드 후작의 아들이구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 공손하게 할 필요 없다. 그래, 데미안이 형님이라면 나는 형수가 아니더냐. 형수님이라 부르면 어떠냐.”
“황송하신 말씀이십니다만 안 될 말입니다.”
단칼에 거부하는 시안을 보며 헬레네가 피식 웃었다.
가면을 벗은 그 안쪽 얼굴은 흉터는커녕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였다.
화상 흉터가 나 있는 것은 가리지 않았던 한쪽 눈 부분뿐.
왜 굳이 말끔한 부분을 가리고 흉터가 난 부분만 드러내고 다녔던 건지…….
“뭐 서론은 이제 되었으니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지. 어쩌면 그대도 눈치채고 있겠지만.”
시안이 바짝 배를 조였다.
그녀가 자신을 찾을 이유야 하나밖에 없다.
헬레네가 계승 서열이 한참 밀리는 그저 그런 황족이었거나, 혹은 세력 하나 없는 허수아비 황족이었다면 다른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무도회를 한다기에 흥미가 생겨 놀러 왔다거나, 혹은 오랜만에 약혼자의 얼굴을 보러 왔다거나.
하지만 황실의 실제 중의 실세인 3황녀가 그런 허접한 이유로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다.
그녀의 목적은 자신을 통해 아그리드 가문에 접촉하는 것.
중립을 지키고 있는 아그리드 후작을 자신의 진영에 포섭하는 것이 목적이겠지.
‘어떤 카드를 가져왔지?’
가주를 포섭하려면 그에 맞는 대가가 필요한 법.
데미안에게 3황녀의 방문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그는 헬레네가 아그리드가에 내밀 수 있는 조건들을 추측해 보았다.
그녀가 가주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그걸 왜 직접 얘기 안 하고 굳이 자신을 통하려 하는지.
이내, 헬레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네가 잘 알 거라 생각해서 말이다. 내 약혼자 녀석,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여자놀음에 다시 빠지거나 그러진 않았느냐?”
“황녀님!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얼핏 아그리드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얘기였다.
“네 녀석은 전과가 충분하니 내가 의심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잘 알겠지만 추문 하나만 걸리더라도 파혼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라버니는 그런 빈틈은 절대 놓치지 않아.”
“저도 분별이 있습니다! 약혼한 이후로 그런 것은 일절 끊었습니다!”
“정말로?”
눈을 가늘게 뜨는 헬레네와 그런 그녀에게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데미안.
황녀와 공작 아들이란 신분만 특이할 뿐이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부부싸움같이 보이는 광경.
“…….”
하지만 시안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상정했던 여러 가정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