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9화
시간이 흘러 무도회 날.
시안이 방에서 전신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묶으며 그가 일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3황녀라면 헬레네 황녀 말입니까?
―그래. 그분이 화염마탑에서 수학 중이신 건 아느냐?
―예. 헬레네 황녀가 화염마탑주의 제자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이번에 일이 있어 마탑에서 나와 황도로 올라간다고 하시는구나. 그런데 도중에 무도회 얘기를 들으시더니 갑자기 이곳에 오신다고 하시는구나.
소메르 제국의 제3황녀 헬레네 울 비스마르크.
데미안의 약혼녀로 나이가 아마 22살일 것이다.
어릴 때 화염마탑에 들어가 그곳에서 수학한 뛰어난 화염마도사라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가 1황자와 함께 황실을 양분하고 있는 실력자라는 것.
1황자 아이작 폰 비스마르크와 3황녀 헬레네 울 비스마르크.
황제의 자식은 열 손가락으로 세도 모자랄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이 이 두 사람이다.
‘헬레네 황녀는 공식 석상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듣기로 그녀는 공식 석상이나 사사로운 파티엔 잘 참석하지 않는다 들었다.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심지어 화염마탑에서도 탑주나 장로들 정도를 제외하면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는 없었다.
황실에서도 아마 같은 황족들이나 고위 귀족들 말고는 잘 모르고 있겠지.
‘이번에는 가면무도회라고 해서 오는 건가?’
가면무도회라면 얼굴이 드러날 일은 없다.
뿐만 아니라 에버웨일에 들르는 것조차 암행이라고 하니 이중 삼중으로 본인을 감추고 있는 꼴이다.
얼핏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황녀라는 신분을 생각하면 오히려 조심성이 없을 정도다.
시안이 머리를 올리곤 화장용품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일전에 산 가면을 썼다.
입과 하관을 빼놓고 얼굴을 가리는 반쪽의 가면.
파티장의 음식을 먹기 쉽도록 고른 녀석이다. 뭘 먹을 때마다 가면을 벗어야 되거나 더러워지기라도 하면 귀찮으니까.
‘암행이라…….’
요 며칠 시안은 아카데미 내부는 물론이고 길거리를 다니며 처음 보는 얼굴을 수없이 목격했다.
누구는 일하는 인부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고 누구는 근처 주민인 것처럼 찻집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 밖에도 다양하게 분장을 하여 주민이나 여행객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그 눈에서 풍겨오는 기세까진 숨기지 못했다.
황녀의 호위대가 분명했다.
미리 안전을 확보해 놓기 위해 먼저 찾아온 것이겠지.
“진짜로 오긴 오나 보군.”
혹시 데미안이 헛소리라도 한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호위들이 미리 찾아온 것을 보면 그럴 리가 없다.
황녀가 방문한다는 말은 진짜였다.
“쯧.”
시안이 혀를 찼다.
무도회 때는 마음 편히 쉬었다가 가문으로 떠날 채비를 하려 했었다.
그런데 이런 골치 아픈 만남이 잡혀 버리다니.
1황자와 경합할 정도의 황녀가 단순 호기심으로 자신을 만나겠다 할 리가 없다.
분명 자신의 뒤에 있는 아그리드란 이름을 보고 오는 것이겠지.
시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방을 나서 회장으로 향했다.
다행인 것은 가면이 그의 표정을 가려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화려한 조명이 회장을 감싼다.
귓가에 울리는 클래식한 음악. 그에 맞춰 춤추는 아름다운 남녀들.
곳곳의 기다란 테이블에는 노릇노릇 김을 피어 올리는 음식들이 다소곳이 놓여 있고, 트레이를 든 시종들이 종종종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술과 음료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한 가지.
시종은 물론 참석자 전원이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
얼굴에 쓴 가면을 다시 고쳐 쓰며 시안이 회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가벼운 샴페인으로.”
“예. 여기 있습니다.”
도중에 시종에게 기다란 잔 한 잔을 받았다.
레몬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는 잔에 입술을 대며 시안이 회장을 살폈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는 하나 아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머리카락이나 체형, 걸음걸이의 습관 등은 가릴 수 없으니까.
‘저건…….’
아니나 다를까 춤을 추고 있는 이들 중에 아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안과 레이나가 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도 화염마탑에서 배웠던 적이 있다고 했었는데.’
3황녀가 수학하고 있다는 화염마탑.
그녀를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긴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황녀의 암행은 당연히 비밀이다. 그걸 쪼르르 달려가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의 일을 생각하면 잡담인 척 물어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물어야 할 것도 아니었고.
“악! 레이나! 그만 좀 밟아!”
“아하하, 미안 미안. 뭔가 영 익숙하지가 않네. 평민인 내가 어디서 이런 춤을 춰봤겠어.”
“으휴. 아카데미 졸업하면 이런 곳 다닐 일 많을 테니까 미리미리 연습해 놔.”
“알았어, 알았어. 어? 지금 생각난 건데, 조금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지켜주고 싶어 보이지 않을까?”
“너 인마……. 그러다 예의 없는 애라 소문난다.”
그 외에는 잘 놀고 있는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두 사람을 두곤 시안이 자리를 떴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이 들어왔다.
‘교복?’
모두가 드레스나 정장을 입고 최대한 꾸미고 온 이 자리에서, 제복만 입고 온 사람이 있었다.
평소 입는 제복에 장식 하나 없는 밋밋한 가면을 쓰고 온 그 학생은, 란 아슬라였다.
어떤 의미론 정말 대단했다.
자신조차도 분위기를 생각해서 파티용 정장을 입고 왔는데 그런 거 싹 무시하고 제복을 입고 오다니.
“레이디, 한 곡 추시겠습니까?”
“…….”
“아하하, 음식이 꽤 맛있나 봅니다. 어디서 가져오신 것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괜찮으면 안내라도…….”
“…….”
“음, 그러니까…… 그게…….”
“…….”
“으아악! 항복! 내가 졌다 졌어!”
“흐흐, 내가 안 될 거라 그랬지?”
“나도 못 꼬셨는데 너라고 되겠냐?”
“빨리 이리 와라, 너도.”
제복을 입고 온 것도 일종의 가장이라 생각했는지 몇몇 남자들이 댄스 신청을 해왔으나, 그녀는 싹 무시한 채 식사만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까인 남학생들이 한 곳에 도란거리면서, 다음번 까일 희생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참고로 그녀의 접시를 힐끔 보니 야채 하나 없이 고기만 한가득했다.
‘…….’
그녀를 두곤 시안이 다시 자리를 옮겼다.
오늘 그의 플랜은 이렇게 적당히 돌아다니며 식사나 하다가, 데미안과 헬레네 황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 후에는 적당히 시간을 봐서 방으로 돌아가야지.
딱히 다른 학생들처럼 춤을 추거나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넌 여기서 뭐 하냐.”
그러던 그가 똑같이 춤출 생각이 일절 없어 보이는 학생을 발견했다.
유설이 구석에 있는 테이블 뒤에 숨듯이 앉아 있었다.
혼자 샴페인을 홀짝이며 청승을 떨면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서.”
그녀는 빙하백령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품이 넓고 소매가 큰 하늘하늘한 옷차림.
옛 요정의 복장에서 변형되어 발전한 옷이었다.
“가서 한 곡 추지 그래. 너라면 당장 댄스 신청할 애들이 한 부대는 될 텐데.”
“싫어. 귀찮아.”
그녀가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감싼 팔에 입을 묻었다.
옆에 나와 있는 손이 설렁설렁 흔들리며 잔 속에 든 샴페인을 찰랑거렸다.
시안은 알지 못했지만, 유설은 무도회에선 항상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숨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참석했던 가문에서의 무도회 때문에.
그 때문에 아무리 흥겨운 무도회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항상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나는 프시케만 있으면 되니까, 너도 가서 즐기고 와.”
[겨울의 뱀이 휙휙 손을 젓습니다.]
[설이한텐 내가 있으니까 너 같은 거 필요 없다며 등을 떠밉니다.]
“그러지.”
프시케의 사념은 그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는 프시케가 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 빨리 꺼지라거나 뭐 그런 소리나 하고 있겠지.
라비와의 일 이후에 녀석은 라비와 자신을 극도로 피하고 있었으니.
“시안!”
그리고 프시케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더 자주 다가오게 된 아이가 있다.
에르제가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더니 눈앞에서 가면을 벗었다.
“시안 맞지?”
“어, 맞아. 용케 찾았네.”
“그야 머리카락이나 체형이나 걸음걸이 같은 건 가리지 못하잖아?”
뭔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다.
그녀는 본인의 검은 머리와 꼭 닮은 색의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드레스에 대비되어 그녀의 하얀 피부가 더욱 선명하게 돋보였다.
“시안. 여기 오고 누구랑 춤췄어?”
“아니. 아무하고도.”
“그, 그래? 그럼 괜찮으면…… 나랑 한 번만 춰줄래?”
그녀가 시안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능력 탓에 존재감이 매우 옅다. 어쩌면 그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아무에게도 춤 신청을 받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만.
“미안. 별로 생각이 없어서.”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녀가 춤을 추든 못 추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얘기다.
지금 그는 황녀와의 만남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골치 아픈 일정을 앞두고 다른 일로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괜히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함이었으니.
“이만 가볼게.”
“응…….”
시무룩해지는 그녀를 두고 시안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제 슬슬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가 지나가던 시종을 부탁해 손거울을 빌리고는 옷이 흐트러지진 않았나 점검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그가 마음을 다잡았다.
황녀와의 만남. 어찌 보면 큰 기회로 볼 수도 있다.
고위 귀족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는 정말로 흔치 않은 것이다.
심지어 황녀, 그것도 차기 황제로 유력한 장본인과의 독대쯤 되면 정말로 얻기 힘든 기회다.
하지만.
‘한 걸음만 삐끗해도 떨어진다.’
동시에 그건 독이기도 했다.
단 한 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빠질만한 맹독.
시안이 차갑게 머리를 식혔다.
조금이라도 정신줄을 놓고 있다간 그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버리는 것이 정치판이라는 곳이다.
그 정치판의 꼭대기에 앉아 1황자와 목숨을 건 힘 싸움을 벌이고 있는 3황녀.
거기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이다.
한 번 간을 보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한 냄새가 풍긴다면 그 순간 발을 빼도록 하자.
「깜장아!」
그때, 그의 앞주머니에서 알티마가 불쑥 튀어나왔다.
시안이 깜짝 놀랐다.
언제 들어가 있었던 거야 이거?
“너 대체 거기서 뭐 해?”
「아직 알렌 못 봤지?」
여전히 대답보다 본인이 말하는 것에 집중하는 녀석이다.
시안이 끄덕였다.
“어. 오늘은 아직 못 본 거 같은데.”
「다시 한번 사과하고 싶다고 널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아직 못 만났구나. 내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
“그놈의 사과는. 이제 그만하라니까.”
「발차기 한 번으로는 납득이 안 되나 봐.」
“한 번 더 차달라는 거야 뭐야?”
「너무 난폭한 짓은 하지 마!」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다.
「어쨌든 알렌 있는 곳으로 안내할게. 잠깐만 만나줘.」
“하아. 그러든가.”
앞주머니에 작은 범새를 넣은 채 시안이 회장을 가로질러 알렌이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어이, 너! 이게 무슨 짓이야!
근방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뭔가 어디서 들어본 적은 있는데 잘 기억나지 않은 목소리에, 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