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8화
“미안!”
시안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미리 얘기했던 것처럼 알렌은 무릎부터 꿇었다.
땅에 머리를 박으며 사죄하는 그의 모습을 시안이 다리를 꼬며 내려다보았다.
「까, 깜장아. 이제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나도 이렇게 빌게.」
그 옆에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알티마도 함께 빌고 있었다.
그러나 시안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에 알티마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죽어갔다.
‘하지 말라니까…….’
알티마가 어깨를 축 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알렌이 처음 시안에게 의심을 가졌을 때, 알티마는 말렸다.
그녀가 보기엔 사건 이후로도 시안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렌은 흑마법사가 연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0이 아니라고 그랬었지만, 알티마가 보기엔 아니었다.
시안은 뭐라고 해야 할까. 다른 인간들하곤 어딘가가 달랐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기에 관심 없는 인간의 얼굴은 잘 구별하지 못한다. 무리 짓는 인간들을 보면 다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시안은 처음 봤을 때부터 달라 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정령인 그녀의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한 무리의 인간들 속에서 혼자 달라 보였다.
그런 시안의 존재감을 다른 인간이 연기로라도 흉내 낼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억을 읽어 언동을 비슷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영혼이 띄고 있는 독특한 색채는 연기 따위로 재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깜장이가 알렌을 용서해 줄까?’
알티마는 알렌이 좋은 친구를 잃지 않기를 바랐다.
알렌은 인간들 사이에서 굉장히 잘 생겼고 인상이 좋은 모양이다. 덕분에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다. 친구라 부를 이도 많다.
하지만 알티마가 보기에 진정으로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시안밖에 없었다. 적어도 아카데미에서는.
때문에 잃지 않기를 바랐다.
때론 자신을 뒷전으로 생각하는 모습에 질투심이 나기도 하지만, 그건 별일도 아니다.
―부디 이 아이를 지켜주십시오.
―네가 사랑하고 너를 사랑해 주는 이를 만나 다시 가족을 만들거라. 행여나 복수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말고.
그녀는 알렌이 과거 일족의 마을에서 도망치던 때를 기억한다.
그때 일족의 족장이 자신에게 했던 부탁도, 알렌의 아버지가 알렌에게 했던 당부도 기억한다.
그녀는 알렌이 좋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기를 원했다.
복수에 목매기보다는.
“…….”
사과하는 알렌과 복잡한 심정의 알티마를 시안이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겉으로 보면 무척이나 화가 난 모습이었지만 사실 딱히 그렇진 않았다.
알렌의 의심이 근거 없는 악의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사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결과가 좋으면 어느 정도는 좋게 흘러가는 법이니.
‘라비.’
그보다도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알렌의 일이 아니라 라비에 대해서였다.
‘라비는 프시케 같은 악마가 아니었던 건가?’
자신이 어째서 라비를 지옥의 악마라고 생각했던가.
그 이유는 다양하게 있다.
정화교단의 구울 퇴치 의뢰에서 해령궁주의 기운을 접했을 때, 친숙한 기운이라고 했던 일.
데릭 교수의 지하 연구실에서 다크 이터와 조우했을 때 놈이 동포였냐고 소리쳤던 일.
프시케가 서열 정리를 하겠답시고 강림하였을 때 역으로 라비가 그녀에게 목줄을 채웠던 일.
그리고 바로 얼마 전, 안드라스의 껍데기에 강림한 마룡왕의 공간의 난입하여 자신을 구해줬던 일.
그 모든 게 라비가 지옥의 존재라는 것을 가리키는 근거들이었다.
‘하지만 알티마의 힘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알티마의 불꽃 속에서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라비는 악마가 아닌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라비의 정체는 대체 뭐지?
지옥과 관련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지옥과 관련이 있는 존재면서 악마는 아닌 존재…….
‘모르겠군.’
알 수가 없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가본 적도 없는데 뭘 알겠는가.
「으으…….」
시안이 알렌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알티마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라비 쪽이 아니라 알티마 쪽이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물어보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의 꺼림칙함을 고백하는 것이니까.
“의심해서 미안!”
“……후우.”
시안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화는 나지 않았다. 자신이 알렌의 입장이었어도 비슷한 의심을 품었을 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물론 자신이었다면 이렇게 다짜고짜 기습을 거는 식으로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좀 더 관찰해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부터 확보하려 했겠지.
그런 의미론 참으로 성급한 녀석이었다. 흑마법사를 상대한다고 한다면 조금 더 신중하고 확실하게 접근하는 편이 좋을 텐데.
뭐 나이를 생각하면 성급해도 어쩔 수 없나.
“알렌.”
“응?”
딱히 화가 난 것이 아니기에 용서고 뭐고 없지만.
그런 말로 녀석이 납득하진 않으리라.
퍽!
“커헉!”
그래서 한 번 걷어찼다.
일전에 감옥에 있는 데릭 교수를 걷어찼던 녀석이 떠올라 한 행동이었다.
“그걸로 용서해 주지.”
“시, 시안…….”
녀석이 배를 움켜잡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있는 것이 어지간히 고통을 참고 있는 모양새였다.
……너무 세게 때렸나?
“흥.”
뭐 어찌되든 상관없다. 녀석을 두곤 시안이 기숙사로 돌아왔다.
더 이상 수련을 지속할 분위기도 아니었으니.
「알렌, 아파?」
“아니…… 괜찮아. 이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그리고 내 착각이어서 또 다행이었고.”
떠나는 시안의 등 뒤로, 알렌과 알티마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작게 울렸다.
* * *
“사, 사장님! 주문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요!”
“적당히 받다가 컷 해! 다 받으면 소화 못 해!”
“사장님! 벨림 남작 영애의 주문이 완성됐습니다!”
“좋아! 좀 이따 확인할 테니까 3번 테이블에 갖다 놔!”
해가 높게 뜨고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는 요즘.
에버웨일 의상점 거리에 위치한 가게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1년에 두 번 있는 대목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아카데미의 학기 말 무도회!
“입고 갈 드레스는 정했니?”
“아니 아직. 가문에서 몇 벌 가져오고 여기서도 몇 벌 더 맞춰보긴 했는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네.”
사실 의상의 주문이 늘어난 건 한 달도 더 전부터지만, 무도회가 가까워진 요즘은 특히 더 손님이 많았다.
지체가 높은 귀족가의 자제일수록 의상을 한 벌만 만들고 끝내는 경우는 없다.
몇 벌씩이나 주문해서는 당일까지 뭘 입을까 고민하다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덕분에 의상점 거리엔 쇼핑을 하러 나온 영애들이나 영식들, 혹은 그들의 명을 받은 하인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귀찮군.’
시안도 있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를 적당히 걷고 있었다.
사실 딱히 옷을 사러 나온 것은 아니다. 그가 사려고 하는 것은 가면이었다. 무도회에 쓰고 갈 용도의.
‘옷은 가문에서 보내 온 게 있으니 그걸 입으면 되는데.’
시안의 경우는 품위유지의 명목으로 매달 얼마간의 지원이 들어온다.
거기에는 돈뿐만 아니라 여러 벌의 의복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의 사교계에서 최신 유행하는 옷이니 뭐니 하면서 다 입지도 못할 만큼 많은 옷들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많이 입지도 않으므로 마음 같아선 한두 벌만 빼놓고 죄 팔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단박에 횡령으로 불려갈 게 뻔하기에 그러지도 못하고 결국 방의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은 그 악성 재고들 중에서 적당히 고르면 된다. 그래서 아무 문제 없는데.
문제는 가면이었다.
아카데미의 1학기 무도회는 매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가면무도회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뭐 가면을 쓰는 쪽이 당일 날은 덜 귀찮을 테니까 상관없나.’
아카데미의 학기 말 무도회는 매년 두 번씩 있다. 1학기가 끝날 때와 2학기가 끝날 때.
2학기 무도회는 보통 3학년의 졸업을 축하하는 송별회 느낌이라고 한다.
때문에 드레스 코드도 회장의 분위기도 꽤나 점잖다고.
그러나 1학기 무도회는 그 정반대로 무척 자유로웠다.
가면을 쓰기만 하면 복식도 자유, 와서 뭘 하고 즐겨도 자유다.
물론 교칙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가면을 쓰는 것은 기존의 인간관계라든지 신분이라든지 선후배라든지 그런 것을 넘어 순수하게 즐기자는 취지라고 한다.
심지어 과거 어떤 선배는 털깃으로 장식한 투구를 눌러쓰고 빨간 팬티만 입고 모조창과 방패와 함께 참석한 이조차 있다고 한다.
딴엔 검투사 분장을 하고 온 것이라고.
누가 봐도 교칙에 걸리는 복장이라 얼마 안 가 주의를 받고 옷을 껴입긴 하였으나, 그 임팩트만큼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문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뭐 요는 그 정도로 자유분방한 느낌의 파티라는 것이다.
“아우야!”
가면을 사러 적당한 가게를 물색하던 중,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안의 눈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뒤를 돌았다.
“살롱엔 왜 안 오는 것이냐? 네가 이리도 안 오니 조금 섭섭해지려 하는구나.”
“큭, 시안 아그리드…….”
그곳엔 데미안 오르커스, 그리고 종이상자를 잔뜩 든 채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줄리오가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살롱의 건은 죄송합니다. 그간 일이 바빠서…….”
“그랬느냐. 하긴 그 얘기는 들었다. 쿠르간 그놈이 주최한 이벤트에서 당당히 1등을 하였다지? 그리고 이번 시험도 제법 잘 치렀다 하지 않느냐?”
녀석이 기분 좋은 듯 싱글거리며 시안의 등을 탁탁 쳤다.
“예. 운이 좋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운은 무슨! 다 네 실력이 아니더냐. 크크, 그때 쿠르간 녀석이 내 앞에서 얼마나 표정이 썩었었는지 보여주고 싶구나. 초상화라도 그려놨어야 했는데.”
“그새 또 자랑하러 가셨던 겁니까?”
“당연하지. 이기고 조용히 있을 거라면 뭐 하러 승부를 내고 내기를 하겠느냐. 하하하!”
승부에서 이기면 당연히 상대를 놀려주러 가야 한다는 얘긴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왜 자신이 이긴 걸 가지고 유세를 부리는 것인지…….
“그나저나 요즘 도는 소문을 들었단다.”
“소문 말입니까? 무슨?”
“뭐 이것저것. 예전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좋은 소문들이더구나. 그걸 보니 시안 너…….”
데미안이 가늘게 뜬 눈으로 시안을 쳐다보았다.
혹시 자신이 진짜 시안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건가?
뭐 그렇다 해도 변명할 거리는 있다.
이전에 이자크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사고를 계기로 정신을 차렸다고 하면 될 테지.
“드디어 뒤처리도 깔끔하게 하게 되었구나. 잘했다. 원래 그런 건 뒤끝이 안 남게 하는 게 제일이야.”
“…….”
그러나 데미안은 다른 쪽으로 대차게 착각을 하고 있었다.
소문이 안 나는 것이 자신이 술이나 여자놀음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소문이 안 나게끔 잘 처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의 안에서 시안이란 존재는 결코 그런 것을 끊을 수 없는 이미지인가.
“아 맞다, 그렇지. 시안. 무도회 당일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느냐?”
“시간이요?”
“그래. 네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단다.”
“소개라니……. 왜 지금이 아니라 무도회 당일입니까?”
“이건 비밀로 해주면 좋겠다만, 학생이 아니거든. 바깥에서 오는 손님이란다.”
“……교칙 위반 아닙니까?”
“뭐 어떠냐. 다들 가면도 쓰고 있을 테고 아무도 모를 텐데.”
대체 어떤 이상한 사람이 튀어나올 것인지.
시안이 살짝 찡그리며, 그래도 일단 고개는 끄덕였다.
바쁠 시기도 아니고 무도회 같은 날에 잠깐 시간을 내달라는 요청까지 거절한다면 그건 대놓고 오르커스 공작가를 무시하는 꼴이니.
“누가 오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시안의 질문에 데미안이 살짝 주위를 살피고는 시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안의 어깨를 짚고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귓가에 속삭였다.
“내 약혼녀인 3황녀께서 찾아오신다 한다.”
널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라는 말을 덧붙이며 데미안이 웃었다.
시안은 전혀 웃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