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7화
며칠에 걸쳐 경기장의 청소가 마무리되고 리자드맨과 와이번들의 사체들이 처분되었다.
그러고 난 후 시험이 다시 시작됐다.
시험 내용에 변경은 없었다.
이미 시험을 치르고 점수까지 매겨진 학생들이 있는데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었으니.
“오오오오!”
“5단계도 처치했어!”
그리고 시험은 성황리에 마쳐졌다.
점수는 아직 모르지만 1학년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골렘을 처치한 건 시안이었다.
아마 큰 변수가 없는 이상 그가 1등이리라.
“역시 시안 아그리드가…….”
“이번에 범인을 잡은 것도 쟤라는데.”
“선배들 상대로도 안 밀린다고 하지 않았나? 예전에 2학년 상위권을 잡았다는 소문도 있었던 거 같아.”
이제는 시안을 두고 이전과 같은 소문을 담는 이는 잘 없었다.
그 소문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시안의 행보들로 인해 일어난 새로운 소문들이 과거의 소문들을 조금씩 덮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1학년들이 시안에게 도전했다 정정당당하게 깨어진 것도 있었고, 모 마물학 교수의 불법 연구실을 찾아 틀어막은 것으로 표창장을 받은 것도 있다.
“내가 말했지? 그런 녀석 아니라니까.”
“그러게. 대단하네.”
거기에 같은 반인 1반의 학생들은 이미 예전부터 시안에 대한 인식을 바꾼 후였다.
수업 탓에 매일같이 봐오는데 사건사고는커녕 욕설이나 막말 한 번 하는 걸 본적이 없으니 바뀔 수밖에.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시험 기간이 정말로 끝이 났다.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의 일과는 평소처럼 돌아갔다.
평소처럼 늦게까지 수업을 듣고, 밤에는 스스로의 단련에 힘을 쓰고.
며칠이 지나자 시험 성적이 발표되었다.
“야, 너 몇 등이야.”
란이 시안의 책상을 짚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 손엔 란의 성적표가 있었는데, 종합 2등이란 성적이 찍혀 있었다.
시안이 성적표를 꺼내자 란이 탁 하고 낚아채더니 뚫어져라 그것을 확인했다.
“윽…….”
그러곤 울컥한 표정으로 그대로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성적표를 시안이 잘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시안, 가르쳐 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유급 안 당했어!”
에르제에게 감사 인사를 받기도 했다. 필기시험의 감사라면 이전에 이미 받았지만, 막상 성적표를 받아보니 감개무량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필기 성적은 152등으로 300등이던 입학 당시와는 천지 차이였다.
“……고마워.”
덧붙여 유설 역시 덕분에 유급을 당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보고해 왔다.
그 김에 시안이 그녀에게 그것에 대한 화제를 꺼내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천도맹이라고 알고 있어?”
“?”
그러나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
그 얼굴만 봐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네 속에 있는 그 프시케란 녀석은 대체 아는 게 뭐지?”
그리 얘기하자 시안의 말을 들은 프시케가 발끈했다.
[겨울의 뱀이 입술을 삐죽입니다.]
[지상에 온 게 설아를 통해서가 처음인데 그럼 어떡하냐고 꿍얼거립니다.]
“프시케는 여기 오기 전까진 나랑 가문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서, 이곳에 대한 건 별로 아는 게 없어.”
“그랬군.”
대신 변명을 해주는 유설의 말을 듣곤 시안이 천도맹의 설명을 마저 이었다.
간단히 말해 칠흑마탑을 적대하는 이들이 모인 모임.
그러나 단순한 모임이라고 무시하기엔 멤버가 너무 화려하다.
하이마스터가 무려 셋이나 들어 있다고 하고 마스터급이나 고위 귀족도 몇몇 있다고 하니까.
“……그게 왜? 난 칠흑마탑인가 뭔가 그게 뭔지 모르는데.”
“그야 그렇지만, 그 사정을 놈들이 이해해 줄지는 알 수 없으니까.”
칠흑마탑의 흑마법사의 가장 큰 특징은 지옥의 악마에게 힘을 받는다는 것.
그 특징은 그들 두 사람에게도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천도맹이란 자들이 칠흑마탑의 소속인가 아닌가까지 자세하게 확인하고 봐주는 자들이라면 괜찮겠지만, 반드시 그러리라곤 볼 수 없다.
그런 애매한 추측에 매달릴 바에는 아예 그들을 피하는 쪽이 안전할 것이다.
‘그래도 미리 알게 되어 다행이군.’
천도맹이란 이들의 존재. 미리 알고 있으니 대비도 할 수 있고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다.
이번 시험 기간 중에 얻은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또 다른 성과 한 가지.
“후우.”
유설과 헤어지고 난 후.
별이 수놓은 밤하늘 아래, 시안이 언제나처럼 홀로 나와 수련을 하고 있었다.
밤의 기운을 쌓는 겸 밤에 집중하여 수련을 하는 것이 이미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그만큼 잠시간이 부족해지긴 했지만 밤의 기운을 쌓고 나면 몇 시간 자지 않아도 숙면을 취한 것처럼 상쾌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화륵.
그가 피어올린 오러가 주변을 잠식해 간다.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마룡왕의 기운이 움직이던 것을 떠올리며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영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간을 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조금씩 느낌은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연습하는 게 맞는 건가?’
미혹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본래라면 심상세계의 발을 들일 정도가 되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그 후에나 자연스럽게 익히는 기술이다.
근데 그것을 마스터도 아닌 자신이 편법처럼 익히고 있다니, 이게 정말 올바른 성장 방향일까?
언제나 막힘없이 수련을 해가던 시안에게 있어선 거의 처음으로 겪는 미혹이었다.
이럴 바에 차라리 이런 일을 흉내 내지조차 못했다면 아무 걱정 없었을 텐데.
‘되는데 어떡해.’
하지만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옛날부터 그는 어지간한 것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습득을 해오던 아이였다.
염노가 한 번 가르쳐 준 것이나 한 번 시연을 보여준 것을 그대로 흡수하는 것은 그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14살이란 나이에 아그리드가에 있는 검술을 모두 ―비전은 빼고― 익힐 수 있던 것이 아닌가.
그 뒤로 3년간은 몸에 익힌 수많은 검술들을 깎고 깎아 단 세 개의 검술로 압축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런 그였기에, 이 ‘공간을 점하는 기술’ 역시 미약한 수준이나마 습득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안에게 그걸 보여준 것은 어디의 어설픈 마스터도 아니다.
지옥의 대군주라고 하는 마룡왕. 그 강대한 존재.
최고의 교보재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느껴보고, 죽음 직전 까지도 몰려보았다.
배움을 위한 최상의 환경이 아닌가.
다만 걱정인 것은 이런 편법 같은 성장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 하는 점이지만.
‘되는데 이 악물고 안 익히는 것도 말이 안 돼.’
그래도 일단은 익히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얼마 안 있으면 학기 말 무도회, 그게 끝나면 방학이다.
가문으로 돌아간 후에 때를 봐서 염노에게 물어보자. 그러면 뭐라도 답이 나오겠지.
“시안.”
그렇게 새벽 명상에 힘쓰고 있던 중, 시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굳은 표정의 알렌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 녀석도 공부 가르쳐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온 건가?
“웬일이야, 이 밤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나 알렌이 풍기는 분위기는 에르제나 유설 때와 같은 훈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딘가 날카로운, 그러나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시안이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총장과 같은 천도맹이라고 했었지.
총장한테 뭐라도 들은 건가?
“그때부터 계속 살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보는 걸론 도저히 확신이 안 서서.”
“무슨 소리지?”
“네가 그때 얘기했지. 시험 때 쳐들어왔던 흑마법사에겐 영혼을 갈아 끼워 몸을 빼앗는 능력이 있었다고.”
“그랬지.”
거기까지 듣고 시안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너 설마…….
“미안한데 한 번만 제대로 확인하게 해줘.”
화륵-! 두 사람의 주위로 푸른 불꽃이 피어올라 육면의 관을 만들었다.
알렌의 술법 중 하나, ‘쇄’.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두기 위한 그 술법이 시안을 향해 시전되고 있었다.
“너, 정말 시안 맞아?”
챙.
알렌이 검을 뽑아 시안을 겨눴다.
* * *
언젠간 놈의 불꽃을 맞아보는 날이 오리란 생각은 했었다.
같은 학교의 같은 학년생이 아닌가.
녀석이 반지 숫자에는 관심이 없어서 굳이 자신에게 대련을 걸어오진 않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수업이나 학교 행사 등에서 자신과 알렌이 맞부딪힐 날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터였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오히려 빠르게 확인할 수 있어서 좋다고 칠까…….’
시안이 나직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알티마의 불꽃은 평범한 육신을 해하지 않고 마의 기운만을 태운다.’
그레이트 힐에서 놈에게 당했던 고블린의 얘기를 기억한다.
다크 이터가 부분 강림을 했었던 데릭 교수가 그 불 세례를 퍼부어지고도 멀쩡했던 일도 잊지 않았다.
그 불이 유설이나, 혹은 자신을 향했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날 것인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내가 만약 진짜 시안이 아니라면 굳이 몸을 뺏느니 영혼을 갈아 끼우느니 그런 얘기를 했을까?”
“알아. 나도 머리로는 네가 시안이 맞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조차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응.”
그럼 어떻게 할까…….
도망치는 것은 생각할 것도 없이 기각이다. 스스로 수상하다 광고하는 꼴.
그런 짓을 했다간 알렌이 속해 있는 천도맹을 통해 단번에 정보가 퍼져 나가리라.
시안 아그리드는 흑마법사, 라는 정보가.
‘알티마의 불꽃에 아무 반응도 없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뭐라도 반응이 있다면?’
그때는 일이 많이 꼬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끝없는 도망 생활을 감수하면서 도주를 택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알렌을 보는 시안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쓰게 웃으며 시안을 바라보는 알렌은 시안의 그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알티마에게 내가 친구라고 했다지. 이런 일로 쉬이 의심을 품는 게 네가 말하는 친구라는 존잰가?”
“미안. 하지만 나도 믿고 싶어서 그래.”
“말은 잘하는군.”
“만약 아니라면…… 정말로 미안. 무릎 꿇고 사죄할게.”
녀석의 죄책감을 살살 긁어보려 얘기를 꺼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확인해 보겠다는 의지가, 쇠심줄처럼 굳건했다.
그만큼 녀석의 안에선 흑마법사의 존재가 최우선이라는 얘기겠지.
화륵.
「알렌! 깜장이는 네 친구잖아. 괜히 친구를 의심할 필요는…….」
녀석의 어깨에서 불꽃이 화륵 타오르더니 예의 작은 범새와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에 시안이 그녀를 다시 보았다.
평소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희희낙락하며 당장에 터뜨려 보자 그럴 것 같았는데.
“필요한 일이야.”
걱정스레 얘기하는 알티마의 말까지 일축해가며 알렌이 불꽃을 피어 올렸다.
시안의 발밑에서 두 개의 불의 구체가 나선으로 회전하며 시안의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 안에서 시안이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디 하려면 해보라는 듯이.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눈은, 만의 하나를 위해 냉정하게 알렌을 살피고 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알렌이 얘기했다.
“그럼 갈게.”
“해보든지.”
알렌이 뻗은 손으로 꽉, 주먹을 틀어쥔다.
나선을 그리며 시안의 주위를 돌던 불꽃이 그대로 터져 나가며 시안을 덮쳐왔다.
팔짱을 낀 시안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가 어떤지에 따라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수 있었으니.
그리고 결과는.
‘뜨겁…… 지 않군.’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안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스스로의 손을 펼쳐 보았다.
그는 사실, 내심 알렌에게 걸릴 확률이 꽤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알티마의 불꽃이 지옥의 악마들에게 유효한 건 다크 이터의 건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정황상 라비도 다크 이터와 같은 지옥의 악마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
사위를 모두 가릴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밀도 높은 불꽃 속에서, 시안은 옷깃 하나 타지 않고 멀쩡하기만 했다.
다크 이터가 타오르던 때와 같은 고통도 없고 정령 각인도 밤의 기운도 모두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모두 그냥 억측일 뿐이고, 사실 라비는 악마가 아니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