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6화
시안과 제레흐는 의무실에서 나와 본관의 최상층 총장실에 도착했다.
“몸은 괜찮나? 나는 그냥 의무실이었어도 상관없네만.”
“괜찮습니다. 다치거나 한 것도 아니니.”
제레흐가 시안의 몸을 걱정해 주었지만 괜찮았다. 안드라스의 수작에 당하긴 하였으나 일절 다치지 않고 빠져나왔으니까.
그 안에서 안드라스를 상대하며 조금 다치긴 했었으나 현실의 몸으로 돌아오니 상처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영혼 상태였다는 놈의 말이 사실이란 얘기겠지.
“자네를 부른 것은, 짐작하고 있겠지만 오늘의 일 때문이네. 자네가 켈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지?”
“예.”
“뭔가 알고 있는 겐가?”
“칠흑마탑의 흑마법사였습니다.”
딱히 이리저리 잴 생각도 없다. 시안이 대뜸 그것부터 얘기했다.
순간 지팡이를 쥐고 있던 제레흐의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힐긋 그의 반응을 보며 시안이 설명을 이어갔다.
“이름은 안드라스. 칠흑마탑의 하이메이지라고 하더군요. 이상한 공간에 절 가두고는…….”
그 얘기는 조금 전 알렌에게 설명했던 내용과 똑같았다.
놈이 영혼을 바꾸는 능력을 사용하며 자신의 몸을 노렸다. 수비대장의 몸도 비슷한 방법으로 뺏은 것 같다.
자신은 놈을 쓰러뜨리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론 제레흐에게도 알렌에게도 그놈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마룡왕.
녀석과 만났다는 것을 얘기하기엔 여러모로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니.
“그렇군…….”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제레흐. 그가 사뭇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보며 시안이 얘기했다.
“수비대장 말입니다만. 얼추 얘기를 들어보니 배신자니 뭐니 하는 얘기가 퍼지고 있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자네의 얘기에 따르면 그는 피해자일 뿐 배신자는 아니었군.”
“예. 그러니 총장님의 권한으로 강하게 못 박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닐세. 원래 그러려고도 했었고. 그나저나, 자네 켈른과 아는 사이였나?”
“아뇨.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만.”
“그런데도 무척이나 배려가 좋구먼. 켈른이나 아니면 그의 가족들과 아는 사이인 줄 알았어.”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100% 진실로서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유일하다.
총장도 알렌도 물론 자신에게 사정을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얘기에 불과했으니.
때문에 유일한 목격자로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총장의 확답을 받고는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총장님도 역시 놈들에 대해 알고 있었군요.”
“그야 뭐,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일이니. 오히려 나는 자네가 놈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네.”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후계자인 만큼 언질을 준 것인가? 후작이 무척이나 아끼는 후계인 모양일세.”
“아뇨, 딱히…….”
“겸손은. 본인도 휘말린 몸인데도 켈른까지 신경 써주는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칠흑마탑의 함정에 빠졌는데도 무사히 빠져나온 실력도 그렇고. 후작이 무척 듬직하겠어.”
듬직은 무슨.
자신은 가주의 아끼는 후계는커녕 아끼는 부하조차도 아닌 몸이다.
물론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만.
“저도 하나 여쭈어도 됩니까?”
“뭔가. 물어보게.”
“놈의 목적 말입니다만. 뭔가 원하는 물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혹시 짐작 가는 물건이라도?”
“……안드라스란 자가 그리 얘기하던가?”
“예.”
거짓말이었다. 사실 이 말을 한 것은 안드라스가 아니라 마룡왕이었다.
―이곳에 나의 물건이 있다고 들어서 말이다.
놈은 분명 그리 얘기했다. 그게 아카데미를 습격한 이유라고.
그 강대한 군주의 소유물. 그런 게 이 아카데미에 있다는 말인가?
“후우……. 그래, 맞네. 자네가 알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카데미의 비고엔 S급 유물이 하나 존재하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무슨 물건인지까지는 모릅니다만…….”
“원시(元始) 마법. 옛 신화시대에 인간이 신에게 건네받았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마법일세.”
“…….”
유물의 정체가 마법? 일종의 스크롤이나 마법석과 같은 그런 형태란 것일까?
잘 상상이 되지 않는 부분은 제쳐 두고, 시안이 뒷얘기에 집중했다.
신에게 건네받은 최초의 마법.
그 이야기는 알고 있다. 어린이용의 그림책으로도 자주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신화시대. 온갖 종족이 싸우며 군림하던 혼탁의 시대.’
신화시대의 일은 제대로 된 기록이 적다. 거기에 그 얼마 없는 기록에서조차 허황된 말만 가득했다.
때문에 학계에선 고대인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소설과 같은 것이라 여겨 제대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 역사로 인정하는 것은 고대시대까지뿐이었다.
‘그 신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축에 속하는 최초의 마법 이야기.’
온갖 괴신과 괴물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인간은 무척이나 나약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뿐.
먹이가 되거나 노예가 되거나.
그런 인간을 가엽게 여긴 어떤 신이 인간에게 특별한 힘을 전해주었고, 그것이 곧 마법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탓에 그 신은 신들 사이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아 끔찍한 형벌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쓰인 기록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신이 전해준 건지는 모르네. 다만 그것에 S, 즉 측정 불가라 판단할 정도로 강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만 알 뿐이지.”
“원시마법을 전해준 신이라면…… 정화교단에서 말하는 천신(天神) 말이군요.”
“그렇지.”
정화교단이 얘기하는 천신이란 바로 최초의 마법을 건네주었다는 그 신을 뜻했다.
때문에 그들은 마탑과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한 신성마법이란 체계를 가지고 있다. 비슷하게 검술 역시 독자적인 유파를 가진다.
교단 자체가 속세와 조금 거리를 두는 점도 있어서, 정화교단은 꽤나 신비스러운 부분이 많은 곳이었다.
참고로 마탑이나 마법사와의 관계는 썩 나쁘지 않다.
마탑은 신성마법을 흥미로운 마법유파의 한 갈래로 인정하고 있고, 정화교단은 마탑을 같은 신의 은총을 연구하는 구도자 집단이라 보고 있다.
‘원시마법은 천신이 인간에게 전해준 물건. 그런데 그걸 놈은 자신의 물건이라 칭했다.’
시안이 찡그리며 고뇌에 잠겼다.
마룡왕이 한 얘기의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
사실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가능성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 놈이 신화에서 말하는 천신이란 존재일 가능성.
둘째, 놈이 마법을 받았다는 최초의 인간이었을 가능성.
셋째, 놈이 망상병에 걸린 미친 악마이거나 남의 물건을 퍼뜩 자신의 것이라 말하는 사고방식부터 다른 범죄자일 가능성.
어느 쪽이든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시안 아그리드.”
“예.”
그때 한창 사색에 잠겨 있는 그를 제레흐가 불렀다.
그러곤 그의 눈을 지그시 마주 보았다.
시안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뭡니까?”
“하나 제안할 것이 있는데.”
“제안이요?”
제레흐가 진중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혹시 자네, 우리 맹에 들어오지 않겠나?”
“……? 맹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시안이 얼굴에 의문을 띄웠다.
* * *
천도맹(天道盟).
기존의 신분이나 이해관계를 넘어 칠흑마탑을 적대하는 이들이 모인 집단.
제라흐가 시안에게 설명한 것은 그 맹에 대한 것이었다.
“천도맹…… 총장님도 그곳 소속이신가요?”
“맞네. 벌써 30년 이상 활동 중이지.”
30년.
시안이 살아온 거진 두 배는 되는 기간이었지만, 제레흐의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다.
역산해 보면 그가 천도맹이란 곳에 가입한 것은 40대도 훌쩍 넘어서란 얘기다.
“본디 조직…… 아니, 조직이라고 하긴 뭣하군. 간단히 정보를 교류하는 모임 정도로 보면 되네.”
“간단하다고 하지만 면면은 화려하겠군요.”
애초에 칠흑마탑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각국의 고위층이나 범상치 않은 존재들이라고 하였으니.
“현존하는 하이마스터 중에 셋은 천도맹 소속이지. 마스터급도 여럿 있고, 그 유명한 정화교단의 기사단장도 천도맹에 들어 있어.”
정화교단의 기사단장이라면 시안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과거 스물네 살에 최연소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천재 검사라던가.
아마 지금 나이는 스물아홉인가 그랬던 것 같다.
‘지금까지 들어봤던 영입 제안 중에선 그나마 제일 매력적인 것 같은데.’
시안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림자로만 살아오던 자신이 바깥으로 나온 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제안을 받아왔다.
작게는 데미안의 살롱 얘기부터 천둥마탑의 탑주 클로드, 교내 길드인 비스트 길드의 리더 쿠르간, 블라텐 길드의 듀나스란 용병에게도 들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마룡왕에게서 들었던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까지.
총장의 제안은 이 중에선 가장 매력적이었다.
일단 조직이 아닌 간단한 정보교류회이기에 구성원의 의무가 없다는 점. 그리고 모임의 목적이 오직 칠흑마탑의 배제에 있다는 점.
하지만.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이 제안 역시 받을 수는 없었다.
시안의 말에 제레흐가 놀란 듯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는 진심으로 이 제안이 거절당하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 칠흑마탑을 없애고자 만들어진 모임일세. 조직이 아니기에 딱히 의무사항도 없고 하이마스터가 무려 셋이나 속해있어. 물론 마스터도 다수 속해 있고 말일세.”
“모두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갈 길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요.”
“자네가 가는 길?”
시안에게 있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후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이름을 찾는 일이다.
칠흑마탑은 도중에 발견되어 거슬리게 되었을 뿐이지 딱히 목적이 아니었다.
물론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므로 천도맹에 들어도 상관은 없겠다만.
‘자칫하면 내가 사냥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자신의 힘의 근원이 칠흑마탑의 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만약 놈들 중에 자신이 모르는 방법으로 지옥의 기운을 감별하는 자가 있다면?
새로 들이는 구성원에게 당연히 그 방법을 사용해 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라비가 걸리게 된다면, 끝장이다.
하이마스터 셋을 순식간에 적으로 돌리게 되는 셈이다. 눈앞의 아카데미 총장도 포함해서.
‘매력적이긴커녕 짐승의 아가리야.’
다시 생각해 보면 총장의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흑마법사를 사냥하는 놈들 사이로 흑마법사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자신이 들어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안의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읽었는지 제레흐가 쩝 입맛을 다셨다.
“자네도 아버지랑 똑같이 거절하는군.”
“아버님 말입니까?”
“예전에 그에게도 제안을 해봤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지. 그 아들이라면 혹시…… 라고 생각했다만. 안 되는구먼.”
가주도 천도맹 소속은 아닌가 보다.
얘기가 나와 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가주는 왜 칠흑마탑을 쫓고 있는 것일까?
아니, 쫓고 있는 게 맞긴 하나?
가주의 목적이나 야망 같은 것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잘 알 수가 없었다.
“거 참 아쉽군. 자네가 들어온다면 우리 쪽 젊은 애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속셈도 있었군요.”
“허허, 용서하게. 늙은이들이란 원래 시도 때도 없이 젊은이들을 붙여보고 싶은 법이야. 그게 싸움이 됐든 사랑이 됐든 뭐든 간에 말일세.”
“후자는 좀…….”
“하하하하!”
크게 웃는 그를 보며 시안도 피식 웃었다.
중요한 대담에서 본론이 모두 끝났을 때의 그 특유의 해방감이 그를 감쌌다.
“여하튼 자네의 뜻은 알겠네. 그래도 맹의 일원에겐 잘 전해두지. 어찌 됐든 자네도 칠흑마탑과 싸우는 동포임은 맞으니까.”
“예.”
아니, 그냥 안 전해줬으면 좋겠다. 그냥 자신의 이름이 그 천도맹이란 곳에서 언급이 된다는 것부터 부담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일.
시안은 할 수 없이 수긍했다.
그때 그가 문득 떠올라 질문했다. 이 아카데미에는 자신 말고도 칠흑마탑을 쫓고 있는 이가 있지 않던가.
“혹시 알렌 크루거란 이름을 아십니까?”
“알렌 말인가? 잘 알지. 크루거 백작이 예전부터 천도맹 소속이었네. 알렌도 그의 소개로 들어오게 되었고.”
크루거가의 부자(父子)가 모두 천도맹 소속이란 얘긴가.
“그렇군요.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것 없네. 원래 교육자가 하는 일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시안이 살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든 많은 것을 알았다.
특히 천도맹이란 존재를 안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항상 단련을 소홀히 하지 말게나.”
“예.”
그에게 인사를 한 후 시안이 총장실을 뒤로했다.
방문을 닫으며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천도맹.
세 명의 하이마스터와 다수의 마스터가 속해 있는 집단.
그들은 과연 자신에게 도움을 줄 존재인지 아니면…… 적이 될 존재인지.
아직은 무어라 판단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