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5화
절벽 아래로 시안이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뺨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그가 아래쪽을 보았다.
저 아래에, 부글거리는 뜨거운 용암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공기가 훅 올라온다.
아직 한참 떨어져 있는 지금조차도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열기.
어릴 때 염노에게 얘기하여 새겼던 어깨의 화상 흉터가 욱신거렸다.
“라비!”
“웅!”
일단 놈과 거리를 벌릴 생각에 떨어지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저 용암에 처박힐 수는 없는 노릇.
시안의 신호에 라비가 검에 깃들어 비검으로 변화했다.
연한 녹빛을 띄는 긴 검신과 손잡이 끝에 달린 하얀 천.
다만 검신이 아무리 길어도 절벽까지 닿진 않는다.
“웅웅!”
라비가 시안을 달곤 애써 날아보려 애를 쓴다.
하지만 사람 하나를 데리고 날 수 있을 정도로 비검의 능력은 강하지 않았다.
“우웅―!”
라비가 끙끙 힘을 쓰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있었지만 시안이 떨어지는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하지만 공중에서 조금씩 이동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시안이 비검을 잡곤 절벽을 향해 힘껏 날렸다.
그것에서 더욱 추진력을 받아 라비가 힘껏 절벽 쪽으로 날았다.
팍!
간신히 시안이 용암에 떨어지기 전에 벽에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벽에 박힌 비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그가 위를 바라보았다.
절벽 위쪽, 방금까지 그가 있던 공간에선.
하늘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공간이 무너져 내린다. 이 세계에서 퇴출당해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고 있었다.
[…….]
절벽 위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마룡왕.
놈이 강림한 안드라스의 껍데기는 이미 거의 다 허물어져 내렸다. 팔다리는 뒤틀리고 내장은 곤죽이 되었으며 머리는 녹아내린다.
더 이상 인간의 형상조차 남지 않은 모습.
그러나 마지막 눈알 하나만큼은 남아 시안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눈알마저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놈의 존재감도 씻은 것처럼 사라져갔다.
“후우…….”
절벽에 박아 넣은 비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시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깨어지던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의무실 특유의 알싸한 약품의 향기가 그를 맞이했다.
* * *
조금 후.
―그쪽! 자재 좀 옮겨봐!
―좀만 기다려! 여기도 바쁘다고!
시안이 의무실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다양하게 바삐 움직이는 인부들이 가득했다.
리자드맨과 와이번의 사체를 옮기는 이들도 있었고 놈들의 피와 육편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청소하는 청소부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건물과 시설들을 고치러 온 목수들까지.
“역시 그놈도…….”
“그래. 칠흑마탑의 하이메이지라고 하더군.”
시안의 침대 옆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시안에게 안드라스와의 일을 듣고 있는 알렌과.
“자, 여기.”
“고맙다.”
“어, 어어. 잘 먹을게.”
과일을 들고 문병을 온 에르제가 자연스럽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과일을 깎아 시안과 알렌에게 대접하고 있었다.
차를 타러 의무실 구석으로 가는 에르제를 힐끔 보며 알렌이 시안에게 작게 물었다.
“괜찮아? 들어도?”
흑마법사에 대한 얘기일 것이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현장학습 때 좀 휘말린 게 있어서.”
“그래?”
하이오크 놈들 중에 악마의 힘을 받은 놈이 있었고, 그걸 에르제가 혼자 처치했던 일.
그 일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오면서 에르제에게 흑마법사와 칠흑마탑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었다.
애초에 그것들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후작을 포함한 고위층들의 사정이다.
시안의 입장에선 딱히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나쁜 놈이 쳐들어왔다는 거지?”
“헉!”
갑자기 불쑥 나타나 찻잔을 건네는 에르제의 모습에 알렌이 화들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조용히 가까이 다가온 거지? 아무 기척도 못 느꼈는데?
알렌이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반면 식겁하는 그에 비해 시안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찻잔을 받고 있었다.
근래 들어 차를 타주는 일도 대접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보니 둘 사이엔 별 어색함이 없었다.
“그런 셈이지. 난동을 부려서 비고에 있는 아티팩트를 털어가려 했다고 하더군.”
“흐응…… 결국 도적질을 하러 왔던 거구나. 아 맞다. 시안, 라비 좀 불러주면 안 돼?”
에르제가 별로 관심 없는 듯 반응하더니, 라비를 불러 달라 하였다.
“라비를?”
“너희 얘기하는 동안 잠깐 놀고 있을게.”
둘이 친했나? 시안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속으로 라비를 불러보았다.
‘웅!’
대답은 긍정이었다. 각인을 통해 아무런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시안이 라비를 불러 에르제에게 안겨주었다.
“라비~ 이거 한번 먹어볼래?”
“웅?”
귀엽다는 듯 웃으며 탁상 위의 각설탕을 꺼내 라비를 꼬드기는 에르제.
라비가 조용히 경계하듯이 다가가더니 테이블에 놓인 각설탕을 앙 물고는 오독오독 갉아 먹기 시작했다.
먹는 데 열중하여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해지는 사념에는 만족스러운 감정이 가득했다.
그런 둘을 일별하곤 시안이 알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렌이 물었다.
“그러면 그 켈른인가 하던 수비대장이 칠흑마탑의 소속이었던 건가?”
“아니. 놈이 수비대장의 몸을 뺏었던 모양이야.”
“몸을 뺏어?”
“그런 종류의 능력이 있었다고 하더군. 타인의 영혼을 없애고 스스로의 영혼을 그 몸에 집어넣는.”
“……끔찍한 능력이군.”
알렌의 얼굴이 굳어졌다.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능력이었다.
만약 자신이 몸을 뺏긴다면? 그래서 놈이 자신의 몸으로 크루거가에 해코지를 한다면?
비단 자신의 몸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가까운 이들의 몸을 빼앗아 암살을 시도한다든가, 중요 보직에 있는 이들의 몸을 빼앗아 결정적인 순간에 가문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
수비대장이라는 중요한 이의 몸을 빼앗아 이 아카데미의 중심부까지 의심받지 않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던 중 그가 문득 질문했다.
“그러면 너랑 녀석이 동시에 쓰러졌던 건…….”
“내 몸을 빼앗으려던 수작이었어. 그러면 의심받지 않고 도주할 수도 있고 잘하면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수 있을 테니까.”
“하긴. 놈의 목적이 아카데미의 비고라고 했었지?”
“그냥 도망가기보다는 가능하면 남고 싶었겠지.”
놈의 개인적인 행동인지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칠흑마탑의 일원이 아카데미의 비고를 노리고 있었다.
이 정보를 알렌이 머릿속에 잘 집어넣었다.
적의 목적을 알아내는 건 싸움의 기본이었으니.
“칠흑마탑…… 시안의 몸을 뺏으려고…….”
한편 테이블 위의 라비를 콕콕 찌르며 놀고 있던 에르제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날 이후로 붉게 변한 그녀의 눈동자.
방금까지만 해도 따스하고 온화하던 그 눈은 지금은 찐득한 열기가 가득 들러붙어 있었다.
“웅.”
어느새 라비가 각설탕 하나를 다 먹더니 하나 더 달라고 보채었다.
그제야 에르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병에서 각설탕 하나를 더 꺼내 라비에게 주었다.
“웅~!”
“귀여워…….”
오독거리며 각설탕을 갉아먹는 라비의 머리를 에르제가 살살 쓰다듬었다.
라비와 친해지려는 건 사실 시안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속셈이었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에르제는 도저히 라비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정령을 싫어할 소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이메이지라……. 칠흑마탑의 하이메이지는 이 정도로 아카데미를 뒤흔들어 놓을 실력이 되는 건가…….”
“이번 경우엔 놈보다는 놈의 뒤에 있는 악마가 더 나서서 문제였지. 그 하늘의 눈 말이야.”
“라비, 하나 더 줄까? 그럼 이번에는…… 자, 손바닥 위에 올라와 봐.”
“웅!”
네 사람, 아니, 세 사람과 한 정령이 각자의 대화를 나누며 의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일상의 한 장면. 바깥은 아직 복구가 진행되는 중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사건은 끝났다.
쳐들어온 안드라스는 죽어 사라졌고 마룡왕은 떠나갔다.
중단된 시험도 아마 상황이 진정된 후에 다시 시작될 테지.
하지만, 시안에게는 전혀 끝난 문제가 아니었다.
‘마룡왕.’
자신을 사도로 삼겠다며 눈독을 들인 지옥의 대군주.
놈이 순순히 포기하고 손을 털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언제 다시 수작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것이 되지 않을 바에 없애버리겠다’고 나설지도 모를 일.
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위 알 수도 추측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빨리 성장해야 한다.
‘뭔가 잡히는 느낌은 들었는데.’
시안이 스스로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마룡왕과 싸우며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었다.
그때, 놈이 장악한 공간을 조금이라도 걷어내기 위해 오러를 펼치던 그 순간.
그때 지나간 것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다면, 온전히 나의 깨달음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똑똑.
그때 그의 상념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미안하군. 잠시 얘기나 나눌 수 있겠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노인을 보며 시안과 알렌, 에르제의 눈까지 커져왔다.
“총장님?”
의무실을 방문한 것은 에버웨일 아카데미의 총장, 검노 제레흐였다.
* * *
소메르에 위치한 정화교단의 본산.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는 한낮이었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본당은 기묘하게도 어둑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오색찬란하였으나 그곳 말고는 빛이 들어오는 곳이 없었고, 천신과 천신을 모시는 신장들의 석상들은 어두운 분위기에 힘입어 묘한 위압감을 뿜어내며 실내를 장식하고 있었다.
파멜라 드레이크.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반개했다.
“오셨습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듣지 않고 있는데도 그녀가 얘기했다.
하지만 확실히 듣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마룡왕이 코웃음을 칩니다.]
[아직도 신이라는 작자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냐며 그녀의 어리석음을 한탄합니다.]
마룡왕. 에버웨일을 떠난 그가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딱히 기도 같은 걸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수련을 하고 있었을 뿐이죠.”
모시는 신이 바보 취급을 당하였음에도 파멜라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정화교단의 사제로서 있을 수 없는 발언.
다른 사람 앞에선 최대한 숨기고는 있으나 그녀는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저 신의 존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그렇기에 그녀가 아닌 그녀의 동생 샤밀라가 성녀 후보에 오른 것이겠지.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
여기저기 팔려 다니며 교단의 얼굴마담 같은 일이나 하는 성녀 직에는 관심 없다.
그녀가 관심 있는 것은 보다 더 실전성이 있는 쪽.
한쪽에 기대어두었던 교단의 문양이 들어간 검과 갑주를 받쳐 입으며, 그녀가 마룡왕에게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마룡왕이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입니다.]
[실패했다고, 원시 마법의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다고 얘기합니다.]
마룡왕의 대답에 파멜라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 그 노망난 늙은이의 계책 따윈 들을 필요도 없다고 진언 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룡왕이 그래도 좋은 걸 발견했다고 얘기합니다.]
‘좋은 거?’
좀처럼 듣기 힘든 마룡왕의 말에 고개를 모로 꼬며 파멜라가 본당을 나섰다.
갑옷의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실내에 메아리쳤다.
“아, 언니!”
“샤밀라.”
본당을 나서니 우연찮게 귀여운 여동생과 마주쳤다.
치마를 들곤 달려와 가슴에 뛰어드는 그녀를 파멜라가 부드럽게 받았다.
자칫하면 딱딱한 갑옷에 이마를 찧게 될 수도 있으니.
파멜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샤밀라. 성녀가 되고 싶다면 조금 더 품위 있게 다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헤헤. 미안해요, 언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파멜라.
그러나 그녀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오기까지 촌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사도로 삼고 싶은 아이를 발견했다며 마룡왕이 웃습니다.]
샤밀라를 쓰다듬던 파멜라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내가 있는데도 다른 사도를 들이겠단 말입니까?’
[근래 들어 너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며 마룡왕이 조소를 보냅니다.]
‘…….’
파멜라가 샤밀라를 안으며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언니가 안아준다며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만 하는 샤밀라를 품에 두곤, 파멜라의 기운이 들끓어 올랐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이 나이에 신성기사단의 단장직을 꿰찬 젊은 기사단장. 정화교단의 수석 기사.
그리고, 마룡왕의 첫째이자 유일한 사도(使徒).
파멜라 드레이크.
‘그 아이의 이름은 뭔가요?’
[마룡왕이 대답합니다.]
[시안 아그리드.]
‘아그리드…….’
그녀가 중얼거렸다.
“순례를 떠나야겠군요.”
“순례요? 저도 같이 갈래요!”
“그러실래요?”
그녀가 동생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며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신성기사라는 명칭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