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4화
“……넌 누구지?”
시안이 애써 다잡은 목소리로 물었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마룡왕이라고 한다. 모든 용을 다스리고 있는 서쪽의 군주지.]
“용이란 건 신화 속에나 나오는 생물이 아니던가?”
[하등생물다운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구나. 세상이 네가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놈이 대화의 의사를 보이는 듯하자 시안은 다소 떨림이 멎어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이 들어 있는 안드라스의 껍데기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나 놈은 전혀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
‘그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안드라스의 껍데기가 모두 허물어질 때까지 시간만 끈다면.
그런다면 녀석도 어쩔 수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을 터.
……아마도.
“네가 에버웨일을 습격한 장본인이냐?”
[그래. 이곳에 나의 물건이 있다고 들어서 말이다. 그걸 받으러 왔다만.]
녀석이 흥, 코웃음을 치곤 말을 이었다.
[웬 노친네가 눈을 부라리고 있더군. 그래서 일단은 물러나기로 했다.]
노친네. 아마 제라흐 총장을 말하는 것이겠지.
다행히 바깥은 제라흐가 어느 정도 정리를 한 모양이다. 이제 자신만 무사히 돌아가면 사건 해결이다.
그게 가장 어려워 보이는 게 문제였지만.
[너무 겁먹지 마라, 꼬마야. 너한테 한 가지 얘기할 것이 있어 들른 것뿐이니.]
“……뭐지?”
[내 사도가 되지 않겠느냐. 너라면 잘만 다듬으면 나를 견뎌낼 수 있을지 몰라.]
“사도?”
[나를 섬기라는 뜻이다. 그 대가로 네게 세상을 밟고 설 수 있을 힘을 안겨주마.]
힘을 원한다면 내게 영혼을 팔아라, 뭐 이런 말인가?
그야말로 이야기책 속의 악마 그 자체다.
시안이 녀석을, 전신에서 피가 줄줄 새어나가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안드라스의 껍데기를 보곤 얘기했다.
“그 꼴을 보여주고 네 밑에 붙으라고? 이렇게 매력 없는 영입 제의는 처음이로군.”
사도가 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놈이 원하는 게 자신의 몸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놈을 받아들인 인간의 말로.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 옳다구나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마룡왕이 아직은 형태가 남아 있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이런,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인간의 문법은 아직도 알기가 어려워.]
직후, 그의 몸에서 기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장소를, 공간 자체를 놈의 기운이 빠짐없이 잠식해 간다.
녀석은 그저 자신의 영역을 펼치고 있을 뿐이었지만 시안은 그곳에서 죽음을 느꼈다.
[방금 건 제의가 아니라 통보였다. 명령이라고 해도 좋겠군.]
촤르르륵!
놈이 잠식한 어둠 속에서 수백의 사슬이 튀어나와 시안에게 쇄도했다.
온갖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묵철의 사슬에 시안이 눈을 크게 뜨며 검을 휘둘렀다.
정면으로 오는 몇 가닥은 어떻게 쳐내었으나, 사슬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큭……!”
그가 아낌없이 오러를 피어 올렸다.
아까 안드라스를 상대할 때도 꽤 많이 내긴 했으나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지금은 뱃속 깊숙이 자리해 있던 기운부터 손끝 발끝에 퍼져 있는 자잘한 기운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스스로를 감쌌다.
카가가가강!
시안이 펼친 오러의 대류에 휘말려 사슬들이 빗나갔다.
그 틈에 시안이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뭉텅이로 잘라냈다.
[훌륭해.]
스스로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마룡왕은 오히려 기뻐하고만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수많은 인간을 봐왔으나 눈앞의 꼬마만 한 재능을 가진 인간은 본 적이 없다.
더욱 강한 인간이야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나이면서도 이 정도의 존재감.
그야말로 새로운 그릇으로 딱 알맞다.
그런 마룡왕의 반응에 시안이 얼굴을 찌푸리며 땅을 박찼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처음으로 전신의 오러를 모두 쥐어짜 내고 있는 만큼,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검은 혜성처럼 그가 마룡왕을 덮쳤다.
[조금쯤 반항하는 거야 상관없다만 너무 기가 센 건 문제로군.]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그의 바로 앞 상공에서 사슬이 튀어나왔다.
많은 것도 아니다. 단 하나.
고작 그 하나의 사슬에 시안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그가 급히 멈추었다. 하나의 사슬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온 사방에서 다시금 사슬이 뻗쳐 온다.
시안이 이를 갈았다.
전부 쳐낼 수는 없다.
그나마 가장 얄팍한 부분의 사슬을 쳐내곤 그곳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그가 몸을 피한 자리에 다시금 사슬이 떨어져 내려왔다.
‘큭!’
최대한 몸을 피하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어딜 어떻게 몸을 빼도 놈의 손바닥 안이다. 마치 꼼짝없이 거대괴수의 뱃속에 던져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공간.’
이유는 알고 있다. 이 공간이 모두 놈에게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공간을 점하는 싸움.
고수들과의 대련에선 어떤 방식으로든 우위를 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는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적의 자세는 무너뜨린다든지.
적의 호흡을 읽어 약한 순간에 치고 들어간다든지.
상대가 회피할 장소를 제한하여 움직임을 유도한다든지.
그 모든 것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한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을 모두 잠식한 녀석은 이미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 셈이었다.
‘……이 정도 레벨의 전투는 처음인데.’
스스로의 영역을 펼치며 상대의 영역은 깎아내리는. 자세나 호흡 따위의 국소적인 레벨이 아닌 공간 자체를 점하는 싸움.
심상세계에 발을 디딘 마스터쯤은 되어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시안은 겪어본 적 없는 세계의 전투였다.
하지만.
‘지금 파훼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당한다.’
몰랐다는 말로 용서받을 수 있는 건 학교 수업일 때나 가능한 얘기다.
시안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밤의 오러가 소리 없이 영역을 넓혀갔다.
소극적인 자기주장이라도 하듯 꼬물거리며 공간에 스며들어 갔다.
놈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기운을 펼친 것을 기억한다. 그걸 떠올려,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 내며.
그의 기운이 더듬더듬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후, 내가 한 것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냐. 맹랑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
시안이 하는 행동은 마룡왕에게도 모두 보이고 있었다.
스스로의 기운으로 공간을 점하는 일. 시안으로선 생전 처음 해보는, 실전에서 목격한 것조차 지금이 처음인 행위다.
감추는 방법 따윈 알지도 못했고, 애초에 마룡왕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죽을 각오로 시도해 보고 있을 뿐.
그러나, 시안이 사력을 다해 행하는 그것도 마룡왕의 입장에선 우스운 것에 불과했다.
마치 갓난아기가 애써 첫걸음을 떼는 것을 보는 것만 같은. 어찌 보면 흐뭇하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 기특함에 보답하고자 마룡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가슴팍까지 들어 올린 손 위로 시커먼 빛이 뭉치고 모이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잿빛의 구체.
그것이 시안에게 천천히 쏘아졌다.
“…….”
시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 눈으론 저 구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어째선지 머리가 받아들이질 않았다.
느릿하게 날아오는 구체에 시안의 모든 의식이 빨려들고 있었다.
직후, 약간이나마 주변을 점했던 시안의 기운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저절로 뭉치기 시작했다.
꽃봉오리가 다시 모여드는 것처럼 펼쳐졌던 시안의 기운이 한 점으로 모여든다.
그것이 마룡왕이 쏘아 보낸 잿빛 구체를 막아섰다.
카가가가가강!
그러나 시안의 기운은 잿빛 구체를 조금도 막아내지 못했다.
전신이 텅 비어버릴 정도로 끌어올린 기운이었음에도, 그것은 손바닥만 한 구체 하나에 모조리 깨져 나갔다.
시안이 이를 악물고 마지막 한 점의 기운까지 끌어올렸으나.
거기까지였다.
잿빛의 세계가 그를 뒤덮었다.
* * *
촤르륵.
잿빛의 구체는 시안을 죽이진 않았다. 애초에 마룡왕의 목적은 그를 사도로 삼는 것. 죽일 리가 없었다.
“…….”
그러나 자유로이 풀어준 것도 아니다. 시안은 수백의 사슬에 묶여 완벽히 구속되어 있었다.
몸을 조이는 고통과 함께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왔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위기감.
으득.
시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하게 깨문 덕택에 조금은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돌리며 생각했다.
‘놈은 지금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돼.’
그것만이 희망이었다.
안드라스의 형체가 모두 무너져 내리고 놈이 결국 이 자리를 떠야 하는 순간.
그 순간까지만 버티면 된다.
[허튼 발악을 하는군.]
마룡왕이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촤륵. 그에 맞춰 사슬이 더욱 몸을 옥죄어왔다.
시안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은 개미 떼와 같은 것들이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끔찍한 기분이었다.
‘젠장……!’
놈의 형체는, 무너져 내리고 있다곤 하나 아직은 건재했다. 모두 사라지기까지 못해도 1분은 남았으리라.
그러나 그 1분조차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거기에 마룡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더욱더 시안을 거세게 옭매어왔다.
그 정신을 뿌리부터 굴복시키겠다는 듯이.
“…….”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아무리 시안이라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이젠 정말로 정신을 잃기 직전.
시안의 머리는 어느새 지금 이 자리를 헤쳐 나갈 방안보다는 사도가 된 후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의 무의식이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을 내렸단 뜻이었다.
그렇게 절망이 감싸오고 있을 때.
쩌적.
[응?]
하나의 사슬에 금이 갔다.
마룡왕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 사슬을 바라보았다.
시안의 오른쪽 팔을 묶고 있는 사슬.
정령 각인이 새겨져 있는 팔이었다.
쩌저저적―!
채채채채채챙!
사슬이 깨져 나간다. 금이 갔던 하나의 사슬뿐만 아니라 모든 사슬이.
풀려난 시안이 놀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라비?”
“우우우웅―!”
불같이 화를 내며 포효하는 라비가 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그리고 이 사슬은 어떻게 깨뜨린 거지?
그러나 얌전히 질의응답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은 느긋하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궁!
라비의 등장과 함께 사슬이 모두 깨져 나가며, 동시에 마룡왕이 점했던 이 공간 자체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선 유리가 깨어지듯 공간의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고 땅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며 패여 나갔다.
마룡왕이 놀란 표정으로 시안과 라비를 바라보았다.
[뭐냐 네놈은?]
“우웅―!”
라비의 기운이 녀석을 위협이라도 하듯 삐죽삐죽 돋아났다.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모습.
그런 라비를 보니 시안은 반대로 요동치던 마음이 안정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쿠르르릉―!
땅이 흔들린다. 그와 마룡왕의 사이에 단층이 형성되며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 부글거리는 용암이 보였다.
“네 사도가 되라고?”
시안이 그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마룡왕에게 얘기했다.
“미안하지만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
그가 흐릿하게 웃고는, 라비를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