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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72화 (72/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2화

잿빛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눈. 그 눈이 지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아…… 으…….”

“허억……!”

차가운 철봉을 등줄기에 쑤셔 넣은 것만 같은 감각. 본능적인 공포가 감정의 해일이 되어 그들을 휩쓸었다.

모든 존재들이, 심지어 적의 편인 리자드맨과 와이번들까지, 땅에 붙어 벌레처럼 기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

제레흐만은 꼿꼿이 서 있었다.

“꽤나 내게 관심이 많은 듯 보인다만.”

그가 지팡이를 잡았다. 스릉― 스산한 소리와 함께 얇은 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동시에 지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 하늘을 비트는 눈동자에 대항하여 제레흐의 기운이 땅을 다져간다.

그의 눈은 높은 상공에 떠 있는 한 무리 빛줄기를 향하고 있었다.

[마룡왕이 지상을 주시합니다.]

허공의 눈동자 앞에 빛무리가 모여 간다.

이윽고.

콰아아아아―!

이 땅을 향해 빛이 쏘아졌다.

제레흐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 쉽게 내 등을 볼 수는 없을 게다.”

콰과과과과광―!

내리꽂히는 빛의 기둥을 제레흐가 베어갔다.

갈라진 빛줄기가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닿는 모든 건물들이 무참히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제레흐가 지키고 있는 경기장은 피해 한 점 없이 멀쩡했다.

그런 와중에.

“…….”

시안이 천천히 호흡을 하며 하늘의 눈과 제레흐를 보았다.

과연. 이제 이해가 되었다.

총장이 견제하고 있던 것은 저 눈동자였다. ‘쇄’에 갇혀 있는 저 남자가 아니라.

하긴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도 간단히 잡힐 정도의 남자를 견제하느라 하이마스터가 가만히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우웅―!’

라비가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해롱거리고 있었다.

제레흐가 가르고 있는 빛의 기둥.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 라비에게 놈의 기운이 흘러들어 오고 있다.

이렇게 가만히만 있더라도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럴 수만도 없었다.

“크아아!”

눈을 까뒤집은 켈른이 부러진 검에 오러를 두르고는 알렌의 ‘쇄’을 갈랐다.

겉으로만 보면 단단히 녀석을 가두고 있던 푸른 불꽃이, 켈른의 오러에 속절없이 찢겨나갔다.

알렌이 그걸 보고는 경악했다.

“왜, 왜 이렇게 쉽게……!”

그가 당장에 대응하려 손을 들었으나, 그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녀석은 아직 시퍼레진 얼굴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허공의 눈동자는 제레흐를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조차 이 자리의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저 오러는 악마에게 받은 힘이 아니군.’

시안은 알렌의 쇄가 쉬이 찢긴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듣기로 알렌의 불꽃은 악마나 마기 따위엔 특효지만 그 외에는 그렇지 못하다 들었다.

실제로 데릭 교수는 다크 이터에게 잠식당한 부분만 깔끔히 지져지고 교수 본인의 몸은 화상 하나 없었었지.

“왕이시여!”

켈른이 검을 내지른다. 시안이 침착하게 녀석의 검을 막았다.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흐트러졌군.’

켈른의 검은 하이나이트라는 경지에 걸맞은 정교함이 일절 없었다.

신중함도 날카로움도 없는 그저 과격하기만 한 일격.

녀석도, 비록 같은 편이라지만, 허공의 눈동자가 뿌리는 공포에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분명했다.

채앵!

시안이 손목을 비틀어 놈의 검을 쳐냈다.

튕겨 나간 검이 빙글빙글 돌더니 저 뒤쪽에 틀어박혔다.

‘우선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목부터.

푸슉- 시안의 검이 켈른의 발목 힘줄을 갈랐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의 검이 놈의 오른팔을 잘랐다.

도주를 위한 발도, 검을 들기 위한 손도 모두 떨어졌다.

이젠 제대로 포박만 하면 된다. 칠흑마탑의 관련자인지, 저 눈동자는 대체 뭔지.

들어야 할 것이 많으니.

“제 영혼을 걸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 보이겠나이다!”

그러나, 무너져 내리면서도 켈른의 남은 한 손이 시안의 목을 틀어잡았다. 그 손에서 불길한 기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시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켈른의 정신은 사실 전혀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토록 냉철할 수 없었다.

팔도 다리도 미련 없이 포기하면서 이 한 수에 걸겠다는 계산.

‘우우우웅―!’

라비가 크게 소리치며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악마의 힘이, 마룡왕이 켈른에게 건넨 그 힘이 시안을 덮쳤고.

“큭……!”

당혹스러운 침음성을 마지막으로, 그의 시야가 빙글 회전했다.

그의 눈이 빛을 잃어갔다.

시안이 끈 떨어진 인형마냥 그 자리에 풀썩 엎어졌다.

털썩.

그 옆에, 켈른 역시 똑같은 눈으로 쓰러졌다.

* * *

정신을 차린 시안의 눈에 비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이었다.

콜로세움도 아카데미도, 도시의 풍경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의 공간.

‘뭐지?’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검을 쥔 그의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이건…….’

그때 눈치챘다. 그 검은 그가 사용하는 흑검이 아니었다.

라비가 깃들기 전 형태의 빈 정령의 검.

라비가 없다면 그저 조금 단단할 뿐인 평범한 검의 모습이었다.

‘라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시안이 손목을 살폈다.

각인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라비와의 연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라비를 떼어놓고 자신만 따로 이 장소로 날아왔단 뜻인가?

“잘 왔다.”

그때 눈앞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녀석이 나타났다.

수비대장 켈른.

그러나 복장이 달랐다.

흉갑을 걸치고 짙푸른 망토를 두른 채 검을 휘두르던 수비대장의 모습이 아닌,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망토로 몸을 감싼 채였다.

“여긴 어디지?”

“이곳은 내가 왕께 하사받은 공간이다.”

“왕?”

“너도 보았지 않으냐. 그분의 위대하신 존안을 말이다.”

그 하늘의 눈을 말하는 건가…….

존안이라고 하기엔 얼굴이 아니라 눈 하나뿐이었지만.

“이곳은 현계와 지옥계의 중간쯤에 있는 어딘가. 네놈과 나는 영혼만이 불려온 상태지.”

“영혼…….”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녀석의 말이 사실인지,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라비가 없는 이유는 설명이 된다.

라비의 영혼은 초청받지 않았으니 없는 것이겠지.

“아쉽게도 나는 포위당해 버렸지. 하지만 탈출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영혼이 여기 있다는 건 내 육체는 비어 있다는 뜻이겠군.”

잠시 뜸을 들인 후 얘기하는 시안의 말에 켈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머리 회전이 좋구나. 기쁜 일이다. 다음에 들어갈 몸의 성능이 뛰어나다는 건 말이야.”

그는 이 공간을 이용해 많은 사람의 몸을 뺏어왔다.

그가 기르는 마탑의 수많은 제자들. 약물과 세뇌를 통해 언제든 그에게 몸을 제공할 수 있도록 교육된 이들.

다만 그렇게 기른 것이 아닌, 때에 따라 편의를 위해 빼앗는 몸도 있다.

“그 육체도 네놈 것이 아니겠군.”

“이 몸 말인가? 당연하지. 진짜 수비대장은 이미 죽은 지 오래야.”

이 수비대장 켈른의 몸처럼.

녀석이 킬킬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얼굴이 마치 진흙 반죽처럼 뭉개지더니, 이윽고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해갔다.

허리가 굽고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모습.

그게 그의 진정한 얼굴이었다.

“칠흑마탑의 하이메이지 안드라스다. 네 녀석, 이름은?”

칠흑마탑. 시안의 눈이 가라앉으며 노인의 상을 그 눈 깊숙이 담아내었다.

“시안 아그리드다.”

“아그리드!”

그 이름에 켈른, 아니, 안드라스가 크게 기꺼워했다.

웬 꼬맹이가 방해하나 싶어서 끌고 들어왔더니 그 아그리드의 아들일 줄이야!

“클클클! 그 어린 육체, 아카데미의 학생이며 동시에 검왕의 아들이란 신분, 그리고 오러를 발할 정도의 실력과 우수한 머리까지! 탐나는구나. 근래 들어 이토록 탐나는 육체는 본 적이 없단다!”

녀석이 한쪽 팔의 소매를 걷고는 시안을 향했다.

목덜미의 역린에서부터 비늘이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 팔을 가득 뒤덮었다.

날카로이 자란 손톱을 껄그럭거리자 그 손바닥 끝에 검붉은 불덩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법도 쓸 줄 아는군. 흑마법사는 악마에게 빌린 힘밖에 쓰지 못한다 들었는데.”

“어리석긴. 네깟 놈들의 가짜 마법을 가지고 다 아는 양 지껄이지 말거라. 나의 왕이야말로 모든 마(魔)의 아버지이니라.”

[ 흑염화(黑炎花) ]

그 손에서 불꽃이 쏘아졌다.

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흡사 파도와도 같은 불꽃이.

검은 기운과 붉은 기운이 뒤엉켜 있는 흉측한 불길이 시안을 덮쳐왔다.

‘…….’

불이라면 일단 창해로 받아치자, 그렇게 생각한 시안이었지만 바로 눈치챘다. 지금 이 자리엔 라비가 없다.

창해는 물론 흑검조차 사용할 수 없다. 그 손에 쥐어져 있는 건 빈 정령의 검뿐이었으니.

스스로의 힘만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시안의 검에서 검은 오러가 피어올랐다.

이 공간의 어둠이나 놈의 불에 섞여 있는 어둠과는 전혀 다른.

밤의 오러.

화르르륵!

십자로 휘두른 시안의 검이 불의 파도를 사방으로 갈라낸다. 그 텅 빈 사이로 시안이 뛰어들었다.

피하거나 뒤로 빼지 않고 정면으로 들어온다는 선택에, 안드라스가 더욱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좋구나 좋아! 이 정도론 굴하지 않는구나! 크하하하!”

놈은 어느새 한쪽 팔뿐만 아니라 반대쪽 팔까지 완전히 비늘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지금은 오른쪽 발이 덮이고 있는 와중.

그 변하는 중인 발로 그가 땅을 박찼다.

쾅!

그가 직전까지 있었던 자리에 시안이 떨어지며 땅을 부순다.

그러나 놈은 이미 거리를 벌리며 양손을 시안에게 뻗고 있었다.

[ 염열파(炎熱波) ]

양손에서 쏘아진 불꽃이 이번엔 얇고 넓게 방사된다. 동시에 대지를 뒤흔드는 충격파가 동반되었다.

거대한 생물체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공기가 밀려나며 시안의 몸도 튕겨 날아갔다.

그에 안드라스가 씨익 웃으며 입을 벌렸다.

기괴할 정도로 커다랗게 벌어진 입. 그 사이에 빛무리가 모이더니.

[ 브레스(Breath) ]

바깥에서 보았던, 하늘의 눈이 쏘아 보냈던 것과 비슷한 빛을 쏘아냈다.

규모 자체는 훨씬 작긴 했지만 그것에 담긴 기운까지 작은 것은 아니었으니.

콰아아아앙!

브레스가 착탄하며 그 부근의 공간 자체가 크게 흔들렸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곤죽이 되었을 공격.

안드라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수십의 마법이 쏘아 날아갔다.

“클클!”

용과 같이 변한 그의 손에서 불과 얼음이 쏘아진다. 하늘에선 벼락이 떨어져 내리며 땅에선 가시가 올라오며 시안이 있는 곳을 덮쳤다.

쉴 틈 없이 마법을 쏘아내며 안드라스의 눈에 점점 기이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그리고 왕의 행사를 방해하곤 살아남을 거라 생각했던 게냐!”

네 녀석의 목숨으로도 사죄하기 충분치 않으리라.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네놈의 여죄는 네 주변 사람들에게 마저 물으마.”

입꼬리가 올라간다. 심장이 인간의 박동 소리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대며 전신에 피가 쏠린다.

녀석의 몸을 빼앗고 적당히 녀석을 연기하며 주변 놈들을 해코지한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녀석이 한 일이라 생각하며 원망하겠지.

책임 없는 쾌락.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이란 말인가.

그의 눈에 서린 열기가 점점 거뭇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역린에서 자라난 비늘이 어느새 가슴을 덮고 목덜미를 지나 얼굴까지 감싸오고 있었다.

그것에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채, 오히려 넘쳐 흐르는 힘에 쾌감마저 느끼며 안드라스는 마법을 쏴재끼는 것에 몰두했다.

그러곤.

“열심히도 하는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뒤를 돌아보니 시안이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머리에선 피가 흐른다. 입고 있는 옷은 넝마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서 있는 품새만큼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였으니.

“안…… 커헉!”

다급히 주언(呪言)을 읊으려는 안드라스의 얼굴을 시안의 손바닥이 뒤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경악하는 안드라스의 눈과 시안의 얼음장 같은 시선이 마주쳤다.

“내 주변에 뭘 한다고?”

안드라스가 용발톱이 자란 손으로 시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팔은 강철과 같이 굳건하여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콰앙!

시안이 놈의 머리를 그대로 땅에 내리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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