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8화
“켈른 대장! 켈른 대장!”
그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곤 수비대장이 아카데미를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아카데미 본관까지 도착한 그가 튕기듯 말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꼭대기에 있는 총장실을 향해 빠르게 올랐다.
콰앙!
그가 총장실의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며 들어갔다.
“무례는 죄송합니다, 총장님! 긴급사태라 그만!”
그리고 그곳엔.
“알고 있다네, 켈른. 도시 바깥에 문제가 생겼다지?”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 빛을 등지고, 총장 제레흐가 앉아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에 자글자글한 주름.
지팡이까지 짚고 있는 노쇠한 모습이었으나, 그의 앞에 선 수비대장은 갓 입대한 신병마냥 바짝 긴장했다.
“예, 예! 그걸 어떻게…….”
수비대장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러자 제레흐가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마침 범인과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
“범인?”
“급히도 달려온 모양이군.”
“허, 허억!?”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거는 로브의 사내를 보곤 수비대장이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직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얼마 전 보았던 얼굴이었다.
“캐러밴의…… 상인 아니오?”
얼마 전 도시에 도착한 대형 캐러밴 사막의 밤.
분명 그 사이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아직 짬이 덜 찼을 땐 성문 경비만으로 십수 년의 경력을 쌓았던 그였기에 방문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범인이라니…… 설마 당신이?”
“그렇다만.”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수비대장은 당황을 넘어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채앵!
그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뽑았다.
“그 마법의 정체를 밝히게! 하찮은 짓거리를 꾸미기 위함이라면 당장 해제하고! 이 도시엔 제국 공작의 아들도 있단 말일세!”
“잘 알고 있지. 뿐만 아니라 후작가의 아이들도 있고 빙하백령이나 자카르타의 아이들도 있고. 학생들의 면면이 화려하더군.”
“그렇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잘 알겠지. 자네가 하는 일은 모든 국가에 선전포고를 하는 짓일세.”
지금이라면 해프닝 정도로 덮을 수 있다. 그런 얘기를 하며, 동시에 수비대장이 검을 바짝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오러가 씌워진 검이 상인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걸 보며 제레흐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용없다네, 켈른.”
“무슨 말씀이십니까? 겁박을 해서라도 당장 이딴 장난질을 그만두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말일세…… 자네가 오기 전에 나도 해봤거든.”
“예?”
서걱!
일순간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상인의 목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 총장님?”
아무리 그래도 단칼에 베어버릴 줄은 몰랐던 듯 수비대장이 당혹스러운 음성을 흘렸다.
그 직후.
목을 잃은 상인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주웠다.
그러곤 자신의 어깨 위에 다시 얹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보며 수비대장이 신음성을 흘렸다.
목이 다시 붙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얹어져 있을 뿐.
더욱 끔찍한 것은, 지금의 일격으로 죽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상인은 진작에 이미 죽어 있었다.
“설마 내가 검노의 앞에 태평스레 맨몸으로 올 리가 없지 않나? 여기 있는 건 내 제자일세.”
“크윽!”
죽은 시체가 입을 움직였다. 그 입에서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와 총장실을 가득 채웠다.
“하여간 검사들은 다 왜 이렇게 무식한지. 대화도 전부터 칼부터 뽑고 말이야. 덕분에 사랑하는 제자를 벌써 하나 망가뜨려 버렸어.”
“검보다 훌륭한 대화 수단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제레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인이 앉은 자리로 다가오더니, 냅다 발차기를 후려갈겼다.
쾅!
상인의 몸뚱어리가 휙 날아가 총장실 벽에 틀어박혔다.
몸에 얹어져 있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제레흐가 검을 역수로 쥐고 그 머리를 콰직, 찍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말이나 한번 들어봄세.”
검에 꿰여 땅에 박힌 상인의 머리가 제레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얘기했다.
스스로 입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마치 실 따위가 강제로 입술을 조종하고 있는 것만 같이 기괴하게.
[마룡왕이 웃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던 물건을 찾으러 왔을 뿐.]
에버웨일의 비고에 잠들어 있는 S급의 아티팩트.
고대의 대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하는.
[원시(元始) 마법을 받으러 왔다.]
* * *
“기초 마나 운용 이론이 조금 약한가 보군.”
“응. 실감이 잘 안 나서…….”
“유급만 피하는 게 목적이면 딱히 이해할 필요도 없어. 몇 군데 짚어줄 테니까 거기만 달달 외워.”
도서관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개인실에서 시안이 둘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알렌은 녀석이 듣지 못한 수업에 대해서만 간간이 얘기해 주면 되었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스스로 교재를 보는 것만으로 해결한다.
1학년이니만큼 기초 이론 과목밖에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설은 그렇게론 알아듣지 못했다.
‘마나 운용 부분은 그거 때문이군.’
애초부터 머리가 별로 안 좋은 것도 있었지만, 마나 운용의 경우는 그래도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보통의 다른 마법사처럼 마나를 사용해 술식을 구성하고 마법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프시케의 힘을 빌려 마법과 ‘닮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프시케의 능력과 마법이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요는 그녀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보통은 일상의 수련만으로 깨달을 기초 운용이라도 그녀는 실감이 없는 탁상공론으로만 다가오는 것이다.
한편 공부를 봐주며, 시안이 알렌과 유설의 사이를 잠시 주시했다.
“그나저나 실기는 어떻게 치른대?”
“으음…… 거인들의 무덤 쪽 어디로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역시 그냥 시험이라고 대충 하진 않는 모양이네.”
다행히 둘 사이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알티마는 알렌과 자신 앞에서 말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프시케 역시 유설과 자신 외에는 스스로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있다.
아무리 옆에 있더라도 그 둘이 마주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리라.
「하아아암…….」
[겨울의 뱀이 눕습니다.]
[책 같은 건 지루하기만 하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알렌과 유설이 진지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알티마나 프시케나 공부 같은 것과는 전혀 연이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덕분에 별다른 일 없이 세 사람은 묵묵히 펜을 놀리는 것에만 매진했다.
사각사각.
한동안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둘의 공부만 봐줄 수는 없는 노릇. 시안 역시 복습을 이어가며 시험 범위를 하나씩 체크해 갔다.
그렇게 얼추 정리를 해가다 잠깐 쉬자는 생각에 허리를 펴보니.
“쿠…….”
“…….”
어느새 잠든 건지 유설이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녀석을 깨울까 고민하던 시안이 잠시만 자게 놔두자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쉴 참이었으니.
“숨 돌리러 가게? 나도 같이 가.”
일어선 시안을 보고 알렌도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이 창 쪽에 설치된 작은 테라스로 나왔다.
밀폐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확 트인 공기가 이마를 식혀주었다.
「후우……! 정말 인간들은 책 같은 걸 왜 이리 좋아하는지.」
화르륵.
알렌의 옆에 불꽃이 일더니 작은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알렌이 공부하던 내내 잠만 자고 있던 알티마였다.
「깜장아. 책 보는 게 재밌어?」
“그런대로. 책에는 선조들의 지식이 적혀 있으니까.”
「흐응. 나는 모르겠네.」
서적을 이용해 후세에 지식을 전하는 것.
정령과는 그다지 연이 없는 문화였다.
그들이 딱히 생물학적인 후세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수명도 긴 만큼 어지간한 지식은 그냥 말로 전하면 된다.
그들에겐 스스로의 인생 자체가 쌓아 올린 지식의 탑과 다름없으니.
“…….”
시안이 테라스에 몸을 기대며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눈이 피로할 때는 멀리 바라보는 것이 좋다.
그러던 중, 그가 묘한 것을 발견했다.
도시 한 쪽에서 조금 어수선한 움직임이 보였다.
“저건 뭐지?”
“저거?”
“저쪽에. 좀 어수선한 거 같은데.”
“저 방향이면…… 수비대가 있는 곳이네. 캐러밴에서 뭔가 트러블이라도 생긴 거 아냐?”
알렌의 얘기에 시안이 납득했다.
지금 시기에 도시에서 어수선한 일이 있다면 캐러밴 외에는 생각하기 힘들다. 외부의 인원이 잔뜩 들어와 있는 중이었으니 트러블 역시 많을 터.
그렇게 도시 쪽을 바라보던 중.
불어오는 바람에, 시안의 앞주머니가 살짝 살랑였다.
「어? 그거.」
그곳에서 삐져나온 붉은 깃털을 보곤 알티마가 목소리를 울렸다.
시안이 불새의 깃털을 꺼내곤 알티마를 바라보았다.
“불새의 깃털이란 건데. 너도 아나 보지?”
「당연히 알지. 그거 내 깃털인데?」
“뭐?”
알티마의 몸이 불에 싸이기 시작했다.
이내 그 불꽃의 형상이 변화하더니 한 마리 새로 변했다.
푸른 불꽃과는 반대로 깃털의 색은 붉은.
그리고 손바닥보다도 작은, 귀여운 뱁새와 같은 모습.
「이것 봐봐. 똑같지?」
작은 새로 변한 녀석이 시안의 앞에서 날개를 과시했다. 시안이 녀석의 깃털을 보았다.
확실히 불새의 깃털과 닮아 있었다.
크기가 조금…… 아니, 많이 작긴 했지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힘을 잃어서 이 크기밖에 안 되는 거지 원래는 훨씬 크거든!」
그녀는 알렌의 일족이 모시고 있던 청류옥 안에서 고대부터 잠들어 있었지만, 그 기나긴 시간을 실제로 그 안에서만 보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변덕으로 몰래 가출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 불새의 모습은 그때 취하는 모습이다. 그녀의 푸른 불꽃과 달리 붉은 깃털인 것도 가출을 함에 있어 정체를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아직 힘이 많이 남아 있던 시기에는 한 인간 동료와 가슴 뛰는 모험을 하기도 했었지.
「후후, 그나저나 깜장이가 내 깃털을 꼬옥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 귀여운 구석도 있잖아? 괜찮아 나도 다 알아. 내 깃털은 인간한테 행운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라며? 하나 더 뽑아줄까? 갖고 싶지?」
“…….”
쫑알쫑알쫑알 얘기하는 붉은 뱁새를 보며, 시안이 융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불새의 도움으로 사악한 이들을 회개시켜 마탑을 세운 일화는 빙하백령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예요.
“…….”
「후후 어떤데~ 갖고 싶은 거 맞지?」
능글맞은 소리를 내며 가슴을 부풀리는 작은 뱁새를 보며 그가 입을 다물었다.
이게…… 화염마탑의 신수?
마탑에서 전설처럼 떠받들고 있다는 그?
‘화염마탑의 마법사한텐 절대 얘기 못 하겠군.’
왠지 죽을 때까지 몰라도 좋을 세상의 뒷면을 하나 알아버린 것 같았다.
덧붙여서, 깃털이 가져다준다던 행운도 전혀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 * *
밤이 되어 시안이 기숙사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 동안 필기시험의 범위는 대강 다 살펴보았다.
앞으론 매일 감을 잃지 않도록 조금씩만 확인해 주면 될 것이다.
다만 필기보다는 지금은 실기 쪽이 신경이 쓰였는데.
“뭐야, 뭐야?”
“공지? 실기 관련인가 본데?”
기숙사 1층 게시판에 실기에 관한 공지가 게시됐기 때문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본래 거인들의 무덤으로 들어가기로 했던 실기시험을 학교 측의 사정으로 교내 대회로 변경한다.
교관들이 참관 하에 대련을 하여 점수를 매긴다. 상세한 일정과 규정은 내일 공개하겠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갑자기 왜 바꿨대?”
“몰라. 학교 사정이라니까 뭐라도 있는 모양이지.”
“교내 대회로 바뀐 거면 많이 심심해졌네.”
“편해서 좋지 뭘.”
공지를 확인하곤 하나둘 떠나가는 학생들.
시안도 그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학교의 사정이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아쉽다는 기분이었다.
거인들의 무덤에 가는 진짜 실전을 중지하고 교내 대회 같은 걸로 바뀌었으니.
대련이야 평소에도 대련광장에만 가면 주야장천 하는 거라 특별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뭐 특별한 룰이라도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찻주전자에 물을 끓이던 중.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무시하고 찻잎을 준비하는데.
똑똑똑.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까와 똑같이, 아니, 한 번 더 늘어난 노크 소리가 시안의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의아한 얼굴로 커튼을 걷어보니 생각지도 못한 녀석이 있었다.
“야, 야호.”
“에르제?”
“갑자기 미안……. 잠깐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분명 여자 기숙사에 있어야 할 에르제가, 어째선지 방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켈하자드의 망토를 두르고, 나무를 타고 시안의 방 창문까지 올라온 것이다.
“부탁이라니 뭔데.”
남녀 기숙사 왕래가 금지된 밤시간이다.
그녀야 은신 능력이 탁월하니 들키는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규정은 규정.
그걸 깰 정도로 중요한 부탁이 있는 건가?
라는 생각에 시안이 물었으나.
“나, 나도 공부 좀 가르쳐 줘!”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당사자에겐 중요한 일일 수 있으나 이 야밤에 찾아올 만큼의 일은 아니라는 게 맞겠지.
‘그러고 보니 얘도 꼴등이었던가.’
에르제의 반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꼴등이다.
입학시험의 필기 부문에서도 유설과 동등하거나 그 이하를 맞았다는 소리다.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았다. 유급만 안 당하게 봐줄 테니까 일단 오늘은 돌아가.”
내일 잠깐만 봐주면 될 것이다. 오늘 유설한테 알려준 부분을 그대로 짚어주면 되니까.
이렇게 귀찮을 줄 알았으면 입학시험은 대충 쳐둘걸,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으나.
한편으론 입학할 때 염노에게 들었던 친분을 많이 쌓아놓으라는 말을 지키는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했다.
뭐 시간을 많이 뺏기는 것도 아니니…….
“응. 내일 보자.”
“들키기 전에 빨리 가봐.”
빨리 나무에서 내려가라고 재촉을 한 후 시안이 마저 찻잎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그의 손이 잠깐 멈췄다.
문득 아까 에르제의 말에서 묘한 부분이 있던 것을 떠올렸다.
……‘나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