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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65화 (65/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5화

대형 캐러밴 ‘사막의 밤’.

정해진 거처 없이 대륙 곳곳을 떠돌며 무역 행위를 하고 다니는 떠돌이 상인들의 집단이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상회.

큰길을 따라 끝도 없이 펼쳐진 노점들의 행렬에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이게 그 캐러밴이구나!”

“나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야! 장난 아니게 큰데?”

학생들 역시 잔뜩 들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엉덩이를 들썩이는 학생들의 모습에 강의실에 돌아온 테일 교관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몸은 강의실에 있었으나 마음은 이미 도심지에 나가 있는 상태.

“후우…… 어쩔 수 없구나. 원래는 바로 수업에 들어가야 하지만 이제 막 돌아온 참이기도 하고 오늘은 그만하기로 할까.”

“만세!”

“교관님 최고!”

이미 학생들은 열흘 이상의 현장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그 날에 수업에 출석해야 한다는 것 자체엔 의문이 없었다.

아카데미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이미 아카데미의 하드한 일정에 완전히 길든 그들.

덕분에 오늘 하루는 쉬겠다는 테일 교관의 말이 더없는 횡재로 느껴졌다.

“빨리 가보자!”

“난 기숙사에서 좀 자고 싶은데…….”

“잠은 나중에도 실컷 잘 수 있잖아! 캐러밴 구경은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학생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나도 가볼까.’

시안 역시 그중 하나였다.

‘쓸 만한 것 하나 정돈 있으려나.’

돈이야 충분하게 있다. 보물찾기 이벤트로 받은 물건들을 판 돈도 있었고, 블라텐 길드에서 받은 금화 한 주머니도 있다.

평소 가문에서 오는 품위 유지비에서도 얼마씩 계속 떼서 모아두고 있었기에 그 돈도 꽤 있었다.

시안은 이래 봬도 꽤나 부자였다.

‘얼마나 좋은 물건들이 있을까.’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시안이 복도로 나왔다.

그때.

“시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선명한 금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수련을 할 때와 다르게 묶지 않고 그대로 풀어헤친 머리.

그 위에서 쫑긋거리는 귀와 등허리 쪽에서 살랑이는 꼬리.

란이었다.

“귀성했다고 들었는데, 돌아왔었구나.”

“엊그제 왔다. 너네도 온 것 같아서 보러 왔지.”

그녀가 평소와 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안을 보았다.

그러나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 까칠함이 평소보다 많이 줄어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한데, 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거든. 잠깐 와줄 수 있을까.”

“……?”

그녀답지 않게 독기가 빠져 있는 말투에 시안이 살짝 찌푸렸다.

뭔 일이길래 그러지?

“지금부터 캐러밴을 구경하러 갈 참이다만.”

“잘됐네. 그 아이도 지금 노점을 보고 있을 거거든.”

그 아이?

란의 말에 시안이 갸웃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이국의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노점.

그곳에서 꼬치구이를 먹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란과 똑같은 색의 머리와 귀, 그리고 꼬리.

다른 점이라면 란보다 키가 좀 작고 머리카락이 짧다는 것뿐이었다.

“샨이 널 만나고 싶다고 난리라서 그만…….”

란이 이마를 짚으며 얘기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 시안이 눈을 깜빡였다.

샨이라면 분명, 본래의 시안이 폭행을 저질렀다고 했던 란의 동생이 아니던가?

“아! 왔군요!”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곤, 샨이 시안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 * *

샨 아슬라.

3남 2녀의 아슬라 가문의 둘째이자, 장남인 아이.

그와 본래의 시안의 연은 짧고 강렬했다.

자카르타로 여행을 떠났던 본래의 시안이 가게에서 행패를 부렸고, 샨 아슬라가 그를 말리려다 본래의 시안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후에 란이 샨의 복수를 해주긴 했지만 그건 다른 문제다.

본래의 시안과 샨 둘의 관계는 악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의 시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시안 아그리드! 남자답게 내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러 왔습니다!”

샨이 다 먹은 꼬치로 시안을 가리키며 당당히 소리쳤다.

작은 몸집이긴 했으나 그 역시 호월족의 아이. 나름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만.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는 위엄도 뭣도 없다.

“어이, 샨. 이쪽 봐봐. 묻었잖아.”

“어, 고마워 누나.”

란이 한숨을 쉬며 손수건을 꺼내 샨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샨이 그녀를 향해 밝게 웃으며 감사를 표하더니, 문득 깨달았다는 듯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러곤 시안을 향해 가슴을 펴며 몸집을 부풀렸다.

“시안 아그리드! 내 결투를 받으세요!”

“그건 괜찮다만…….”

일단 사과를 하는 것이 먼저일까.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상대는 그걸 알지 못한다.

굳이 미안하다는 한마디 가지고 자존심을 세우는 시안도 아니다.

그렇기에 사과의 말을 먼저 꺼내려 하였으나.

“잠깐! 란 누나에게 들었습니다. 기억을 잃었는지 뭔진 모르겠지만 착해졌다죠? 사과를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어요! 그날의 일은 그냥 간단한 얘기일 뿐입니다. 저와 당신이 싸웠고, 저는 졌다. 그냥 그것뿐인 일입니다.”

굳이 사과를 받을 대상이 있다면 그날 싸움의 현장이었던 가게 주인뿐이다, 라고 덧붙이며 샨이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오히려 힘과 강함을 숭상하는 수인족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

대부분의 문제는 주먹으로 해결하는 그 수인족 말이다.

“그래서, 너는 그 설욕전을 하러 왔다 이건가?”

“예! 당신에게 지고 아버님에게 많이 단련을 받았습니다! 이젠 지지 않아요!”

그 당당한 모습에, 란이 옆에서 이마를 짚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동생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완전히 고집불통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표정엔 수심이 가득했다.

샨은 예전부터 몸이 약했다.

어릴 때는 거의 침대에서 누워만 지냈고, 이렇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시안에게 봐주라거나 살살 해달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그건 샨의 긍지를 짓밟는 일이었으니.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결투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참관을 하는 일뿐.

“이 편지도 아직 읽지 않았어요. 결투에 이긴 후에 당신 앞에서 낭독하겠습니다!”

란에 손에 들려 보냈던 편지였다. 봉투가 뜯어지지도 않은 채 멀쩡한 모습.

“따라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다.

시안이 그에게 손짓했다.

란과 샨을 데리고 그가 향한 곳은 아카데미 내의 대련광장이었다.

외부인이긴 했지만 학생의 가족이니 괜찮겠지.

캐러밴의 탓인지 평소엔 바글바글한 광장이 지금은 꽤나 한산했다.

“시작하지.”

시안의 손목에서 검은 기운이 풀려나와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걸 보며 샨이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두 주먹을 맞부딪혔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그러곤 지체 없이 땅을 박찼다.

콰앙!

“……!”

의외로 빠르다. 시안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검을 들어 샨의 주먹을 막았다.

카앙!

그 작은 주먹에 생각보다 강한 거력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솔직하게 말해 란과 비견될 만한 파워였다.

이 정도로 강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시안이 제법 놀랐다.

그런 그에게 샨이 끊임없이 맹공을 펼쳤다.

[ 수왕기(獸王氣) - 폭호(爆虎) ]

샨의 내부의 기운이 더욱 폭발하듯 용솟음쳤다.

콰앙!

그의 주먹과 발이 허공을 격하며 시안에게 쏟아졌다. 그걸 막기 위해 시안은 검을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샨…….”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동생의 용맹한 모습에 란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캉! 시안이 샨의 주먹을 쳐내며 발목을 노렸다.

한 발짝 물러서라고, 거리를 벌리기 위해 내건 일격이지만 샨은 눈을 빛내더니 오히려 더 파고들었다.

그의 무릎이 시안의 명치를 향했다.

‘오히려.’

캉!

샨의 무릎을 막아내곤 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오히려 누나 쪽보다 더 공격적인데.’

란과 했던 몇 번의 대련이 떠올랐다.

란은 보기보다 방어를 많이 중시한다.

처음 싸웠을 때 완고하리만치 빈틈을 보이지 않던 자세를 취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손해를 보지 않고 적을 야금야금 몰아세우는, 영리한 늑대와 같은 사냥법을 취한다.

반면에 샨은 그 반대였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방어는 최소한도로 돌린 채 오로지 공격.

상대의 방어를 뚫기 위한 싸움을 한다.

‘후.’

어느 쪽이 우위라거나 그런 얘기는 아니다. 그저 스타일의 차이.

다만 란과 비슷한 수준의, 그러나 스타일은 정반대의 권사를 상대하니 색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유진과의 대련이 떠올랐다.

솔직한 말로, 마법사랑 싸우는 것보단 같은 검사나 권사와 근접전을 나누는 쪽이 재밌단 말이지.

어느덧 시안의 몸도 제대로 달아올랐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대련에 임하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콜록!”

“응?”

샨의 공격이 멎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잡아 찢을 듯이 달려들던 맹공이 딱 멈추더니, 녀석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이 보였다.

“샨!”

란이 당장에 달려오더니 샨을 부축했다.

콜록, 콜록! 샨이 몇 번 더 기침을 하고는 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다.

“졌습니다…….”

“…….”

녀석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시안이 눈을 깜빡거리며 검을 내렸다.

자신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결투가 끝나버렸다.

“샨! 어떻게 된 거야!”

“걱정하지 마, 누나. 폭호 때문에 그런 거니까.”

“뭐? 그게 뭔데?”

“아버님한테 배운 마나 운용법인데. 누나도 아는 수왕기의 변종 중에 하나래. 몸이 약한 나한텐 이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어.”

“그런 게 있어? 부작용은? 그것 때문에 피 토한 거 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오랫동안 격하게 움직여서 그래. 역시 5분 이상은 조금 힘드네.”

“너…….”

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수인의 다양한 마나 운용법 중에서도 최강으로 꼽히는 수왕기(獸王氣).

폭호는 그 수왕기의 여러 갈래 중 하나였다.

스스로의 잠력을 오로지 초반의 몇 분에 올인한 극도로 공격적인 운용법.

딱히 부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몇 분이 지나면 모든 마나가 탕진되어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는 것일 뿐.

“5분이라……. 그래서 그렇게 공격적인 거였군.”

“네…… 제가 이기려면 그 시간 안에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니까요. 다른 권술도 그쪽으로만 특화해서 단련 받았어요.”

“과연.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확실히 위협적이었어.”

“거짓말. 여유 넘쳤던 주제에.”

당혹스러운 란을 두고 태연스레 결투의 복기를 이어가는 샨과 시안.

란이 할 말이 가득한지 잔뜩 눈을 찌푸렸으나, 이내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아빠가 익히라고 한 거야? 나한테도 숨기고…….”

“아니. 내가 아버님한테 배우고 싶다고 얘기했어.”

“네가?”

“사내라면 응당 인생에서 한 번은 자신을 불살라야 한다.”

“옛날에 아빠가 자주 하던 소리잖아…….”

그들의 아버지 겐 아슬라가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

그러나 샨이 침대 생활을 하기 시작하자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얘기.

“어릴 때 들었던 그 말,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어릴 때 단 한 번 들었을 뿐인 그 말을 샨은 잊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그런 날이 찾아올지 모른다.

만약 그런 날이 찾아왔을 때, 평생을 침대에 누워만 있던 자신이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자의 모습 그대로라면.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불사를 수 없으리라.

그런 생각에 아버님에게 얘기하여 힘을 길렀다.

비록 그것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일순간에 불과한 힘일지라도.

‘5분밖에 싸울 수 없다면, 그 5분 동안 최강이 되면 돼!’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지도 않았을 고민들.

하지만 샨은 주저앉아 비관적인 말만 내뱉기보단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도 망설임도 없었다.

“시안 아그리드!”

“왜.”

“부디 절 제자로 받아주세요!”

“……뭐?”

시안의 몸이 잠시 굳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꼬맹이가.

란도 옆에서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도 아직 학생인데 제자라니 말도 안 되는…….”

“부탁드립니다, 사부!”

허락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사부란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시안은 헛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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