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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64화 (6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4화

소메르에는 황실 아래 하나의 공작, 두 명의 후작이 있고 그 밑으로 수많은 백작과 남작, 자작들이 있다.

자카르타는 각 6종족을 대표하는 6가문이 참석하는 최고회의를 통해 나라를 통치한다.

반면 빙하백령은 지배 체계가 온전히 일원화되어 있다.

바로 요정궁 하나로.

‘제국보다도 중앙집권이 잘되어 있다 그랬었지.’

그곳에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가본 경험이 있는 염노에게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

빙하백령의 백성들에게 요정궁의 왕족은 거의 신과 같은 이들이라고.

과거 원주민이던 살만족의 피가 많이 섞인 일반 백성들에 비해 왕족은 50%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온전한 반요정이었다.

일찍이 요정들과 살만족의 반요정이라는 1세대가 등장했을 때부터, 핏줄의 유지에 공을 들였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1세대의 반요정들을 모을 수 있을 만큼 그러모아 하나의 닫힌 왕궁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이 요정궁.

요정궁 내에서 그들은 가능한 한 촌수가 떨어진 이들과 혼인을 통해 피를 유지했고, 그들이 바로 지금의 빙하백령의 왕족들이다.

일반 백성들이 살만족의 의해 한 줌 찾기 힘들 정도로 피가 희석된 것에 비해, 왕족들은 칼 같은 관리와 감시를 통해 수백 년에 걸쳐 절반에 달하는 요정의 피를 이어왔다.

그 피를 근거로 요정궁의 왕실은 통치의 정당성을 얻는다.

다만, 때때로 궁의 바깥으로 나오는 왕족이 있다.

정치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로맨틱한 이유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갖가지 이유들 때문에 바깥으로 나온 왕족이 궁 바깥의 반요정들과 결합하여 가문을 세우는 경우도, 흔하지는 않지만 존재했다.

그런 이들이 바로 빙하백령의 주력 귀족들이다.

유가 역시 그런 가문 중에 하나.

왕실의 피가 섞인 가문이었다.

“영광으로 아시죠. 제가 직접 한 수 가르쳐 주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

널찍한 공터. 주위를 학생들이 빙 둘러앉아 구경 중인 그곳에서 유진이 얘기했다.

빙하백령의 유력 가문 중 하나인 유가의 출신.

21살이라는 어리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젊은 나이에, 요정궁 최고 무력 단체 중 하나인 수호성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과 재능.

어릴 때부터 많은 여성들을 홀리고 다녔던 단아한 외모까지.

그 모든 것이 유진의 자신감을 채워주는 요소들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많은 여학생들의 시선이 유진에게 꽂혀 있었다. 대다수가 호의가 가득한 시선이었다.

‘역시 소메르의 사람이라고 미적 감각이 다른 건 아니군.’

그런데 대체 에르제 그 여자는 왜 이렇게 무관심한 것일까.

설령 그녀가 시안과 연인 사이라고 할지라도 아름다운 것에는 눈길 한 번이라도 가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 한 번의 눈길만 있다면 그걸 시작으로 그녀의 마음을 뺏어올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그 한 번조차도 일절 없다.

그것이 불만이었다.

‘흠.’

그가 에르제가 앉아 있는 곳을 보았다.

그녀는 물을 끓이는 냄비 앞에서 턱을 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차가 식으면 안 되니 물이 끓기 전에 간단히 끝내도록 하죠.”

“그러죠.”

끄덕이는 시안을 보며 유진이 웃었다.

어차피 학생 수준. 조금 손봐주면 저 뻣뻣한 고개도 조금은 숙이겠지.

‘1위라.’

시안의 손에 끼워진 1위의 반지가 보이긴 했다. 아마 1학년 중 최고라는 의미일 터.

아마 저 때문에 에르제가 그에게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최고라는 것도 결국 학교라는 우물 안에서의 얘기.

‘우물 밖의 수준을 알려주면 그녀도 깨닫게 될 터.’

그런 꿍꿍이를 품은 채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시작합시다!”

그 손에 마나가 모이더니 차디찬 냉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빙하백령의 가문들 중에서도, 특히 얼음마법의 권위자인 유가(家).

얼음마법에 한해서는 대륙 최고라 자부한다.

소메르의 서리마탑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 유진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그런 가문의 비전을 고스란히 익혀, 이 나이에 수호기사에 입단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 얼음서리 창(Ice Spear) ]

그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에서 날카로이 벼려진 창이 쏘아졌다. 쌔액―! 파공음을 울리며 투명한 얼음창이 순식간에 쇄도했다.

견제의 의미로 날린 간단한 마법이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대충 쓰거나 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상대는 일격에 리타이어시키는 초속의 마법.

라고 생각한 순간.

“……!”

유진이 크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얼음창에 당황하며 몸을 빼거나 손해를 봤어야 할 상대.

그 상대가 어느 순간 바로 눈앞에 당도한 것이 아닌가?

얼음창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대차게 찢을 뿐이었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섬’으로 접근하여 찌르기를 날리지 않고 ‘참’으로 전환.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날아오는 검을 보며 유진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펄럭였다.

그 망토가 얼어붙으며 시안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콰지지지직!

망토를 매개로 만든 얼음방패를 가차 없이 깨부수며 시안의 검이 유진을 강타했다.

점점 다가오는 시안의 검을 보며 유진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고, 다음 순간 모든 빛이 암전했다.

“허억!”

정신을 차려보니, 유진은 풀밭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학생들과 테일 교관, 그리고 수호성의 선임 기사들.

눈앞에 보이는 대련 상대, 시안 아그리드.

“빨리 끝내자고는 했지만.”

그 상대방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물이 끓지도 않았는데.”

그의 말을 듣고는 유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상대방의 한 수. 그 단 한 수에 자신은 기절한 것이다.

다행히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인 것 같지만, 기절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수치였다.

‘어떻게!?’

말도 안 된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또래의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재능이 출중했다.

가문은 물론 빙하백령 전체를 뒤져봐도 자신보다 뛰어난 또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21살에 수호기사가 된 것은, 수호성이 창립된 이래 최연소의 기록이었다.

그런 자신이 한 방에 뻗어버렸다고?

4살이나 어린 학생 나부랭이한테?

―유진 씨…… 생각보다 좀…….

―그렇게 강하지는 않은 모양…….

―너무 그러지…… 마법사라 어쩔 수…….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렇게 잘난 체 말을 해놓고 결과는 이 모양이라니.

어떻게든 체면을 회복해야 한다!

생각보다 싱거웠다며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 시안을 붙잡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잠깐! 하, 한 번만 더!”

“더?”

“한 번만 더…… 부탁합니다. 지금은 방심하고 있었어요!”

“……그러시죠.”

시안이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꺼냈다.

시안은, 한 번 더 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도전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하수와의 대련에서도 배울 점은 있는 법이니.

그런 시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취했다.

이번엔 처음부터 온 마나를 끌어 올렸다.

다시는 아까처럼 방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시안의 신호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캉!

확실히 아까 방심했다는 말은 맞았다. 이제 유진은 시안의 ‘섬’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챙! 채채채채챙!

몇 번의 합이 오가고, 그가 만든 몇 겹이나 되는 얼음벽을 시안의 검이 모조리 깨뜨렸다.

그렇게 파고든 검이 유진의 목 바로 아래에 위치했다.

흐르는 식은땀이 검 끝에 맺힐 정도로 가까이.

‘말도 안 돼!’

유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방금 오간 몇 번의 합에서 그가 느낀 것은, 벽이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다란 벽이 자신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은 그 벽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다, 다시 한번……!”

“그만!”

다시 한번 재전을 요청하려는 유진의 앞을 선임 기사가 가로막았다.

선임의 말에 그가 주춤거렸다.

그사이 선임이 뒤를 돌아 시안을 바라보았다.

“어느 가문의 영식이신가.”

“아그리드입니다만.”

“과연, 그 검왕의…….”

선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시안을 빠짐없이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왕 베르페드의 아들. 과연 그 이름값을 하는지,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 칼과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이 어린 나이에…….

“검왕의 아드님의 실력은 잘 봤네. 단지 이 아이의 실력이 우리 수호성의 실력이라 착각하진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로군.”

이번 대련은 유진 개인의 일이지 수호성의 행사가 아니다. 선을 긋는 말이었다.

시안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생각이 어리진 않다.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 라고 얘기해 주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경의 검으로 증명해 주시죠.”

시안은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마침 좋은 기회다. 이대로 선임 기사와도 검을 섞어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얼핏 보아도 이 선임 기사는 유진보다 훨씬 강한 이였다.

“…….”

그런 시안을 선임 기사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굶주린 맹수와도 같이 강함에 목마른 탐욕스러운 모습.

그 모습이, 벌써 10년이나 더 전에 보았던 검왕 베르페드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건가.

“관두지. 물도 다 끓은 것 같으니.”

선임 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에르제가 다 끓은 물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시안이 아쉬움을 삼키며 검을 집어넣었다.

“수고했어.”

“잘 마실게.”

에르제에게 수증기가 올라오는 나무 컵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따스한 향기에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가 개선할 만한 점을 그녀에게 하나씩 얘기해 주었다.

그걸 잘 경청하는 에르제.

“유진. 돌아가면 수련 강도를 두 배로 늘리겠다. 불만 없겠지?”

“……예.”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유진은, 짙은 패배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 * *

에버웨일까지의 여정은 평화로웠다.

그 후로 유진은 다신 접근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생각에 잠긴 표정.

시안이 검왕의 아들이란 사실에 절반은 납득하였으나, 나머지 절반은 아직 납득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문인 유가 역시 검왕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가문이다. 빙결마법에 있어서는 대륙 1인자라 불리는 가문.

그런 가문의 사람인 자신이 손도 못 쓰고 패배했다.

그것도 네 살이나 어린 학생에게.

그들의 나이가 훨씬 더 많았다면 네 살 차이 정도야 별것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아직 한창 성장할 나이다. 4년이란 차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더 화나는 것은 에르제의 반응이었다.

한동안 계속 접근하던 자신이 딱 발을 끊었는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접근하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습.

자신이 그녀의 인생에 일절 영향을 주지 않은 것 같은 그 모습이 그의 자존심을 더욱 긁어 놓았다.

그러나 당장 설욕전도 하지 못한 채.

“도착했다!”

그들은 에버웨일에 도착했다.

선임 기사가 옆에서 말을 타고 있는 유진을 보았다.

“유진. 분명 이곳에는 네 동생들이 있다 그랬었지.”

“예.”

친동생인 유연과 이복동생인 유설이 있다.

“원한다면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고 오거라. 그 정도는 기다려 주마.”

“괜찮습니다.”

유진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 칼 같은 태도에 선임 기사가 살짝 갸웃했으나,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보낼 수도 없다.

도시의 성문을 목전에 두고 그가 테일 교관에게 얘기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로 가시는 겁니까?”

“예. 바로 돌아오라는 명령입니다.”

간단히 악수를 나눈 후 수호기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떠나갔다.

떠나가며 유진이 이쪽을 한번 돌아보았으나, 그 시선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휴우! 진짜 길었다.”

“이제 완전히 집에 온 기분이야.”

학생들을 태운 마차가 검문을 마치고 힘차게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2주도 되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정말로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기분.

그 직후, 도시의 모습에 학생들이 크게 놀랐다.

“어서 오시게!”

“남쪽 위리족의 공예품 있습니다!”

“바다 건너 들어온 무역품도 있어요!”

도시의 길을 따라 못 보던 노점이 좌르르 늘어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못 보던 상인들이 크게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교관 역시 눈을 크게 뜨며 얘기했다.

“이거 놀랐군. 캐러밴이 와 있었구나.”

“캐러밴이요?”

“그게 뭐예요?”

“대륙을 횡단하며 물건을 팔고 다니는 대형 행상인들인데.”

절로 들뜨기 시작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테일 교관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뭐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축제 같은 거라 생각하면 돼.”

그건 정말로 즐거운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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