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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61화 (61/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1화

늙은 오크. 마지막 남은 하이오크의 족장 굴리쉬.

그가 회한이 짙게 서린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땅에 엎어져 있는 그의 몸은 이미 커다란 상처가 자리하여 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돌아간다!

―예!

쓰러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채에 남아 있던 마지막 동포들. 그들 역시 목이 잘리고 심장이 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굴리쉬가 하늘을 보았다.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별 무리가 시야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여기까진가…….”

아마도, 하크쉬 역시 당했을 것이다.

본래는 유적의 워프 마법으로 뒤로 돌아 적을 급습하려는 계책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오지 않는다. 아무런 소식이 없다.

중간에 막혔다는 뜻이리라.

“클…… 클클클!”

후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후로선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붉은 오러를 쓰던 인간의 전사. 그렇게 강대한 이와 검을 섞어볼 수 있었으니까.

다른 동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장에서 쓰러지는 것이야말로 하이오크의 숙원, 전사의 성전에 오르는 단 하나의 길이었으니.

단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괜히 이상한 놈의 계책을 따라 후방으로 보냈던 그의 아들, 하크쉬.

그 아이는 자신과 같은 만족스러운 전장에 있었을까.

인간들의 함정에 빠져 명예로운 결투가 아닌 비겁한 수작에 당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보내지 말고 그냥 성채를 지키도록 했다면, 그 아이 역시 붉은 오러의 전사와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너의 마지막 전장이 명예와 함께하였기를.’

그러나 이제 와서 무언가를 해줄 수도 없다.

그리 기도를 올리며 굴리쉬가 눈을 감았다.

―전부 토벌했습니다!

―좋아. 주둔지로 돌아간다!

외로운 겨울밤의 성채 안에서, 이자크와 용병들의 목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 * *

“시안! 괜찮으냐!”

밀려드는 하이오크들의 글레이브를 애써 떨쳐내며 테일 교관이 다가왔다.

시안이 상대하던 하이오크, 전사장 하크쉬.

그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괜찮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어깨들 짚으며 시안이 일어났다.

그런 그를 테일 교관이 바라보았다.

하크쉬는 분명 대단한 놈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놈을 처치한 시안은?

‘오러.’

분명히 보았다.

시안이 오러를 사용하는 모습을.

당장에라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테일 교관이었으나, 그러진 못했다.

하이오크들과의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그래도 이기고 있다.’

시안이 전장의 상황을 살피며 생각했다.

하크쉬와 제대로 맞서기 전까지만 해도 이쪽이 상당히 열세였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늑대들은 몇 마리나 쓰러졌고 하이오크들도 학생들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한 모습.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사기가 떨어졌군.’

하크쉬의 패배.

그걸로 하이오크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객관적인 전력은 아직도 놈들이 위였지만, 이미 전장의 흐름은 이쪽으로 넘어온 후였다.

이거라면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테일 교관님.”

“뭐지?”

“이 자리는 부탁드립니다.”

테일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대장의 목을 따준 덕택에 많이 편해졌다. 넌 빠져 있거라. 어깨의 상처도 치료해야 하니까.”

“아뇨.”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테일 교관에게 저런 얘기를 한 이유는 뒤에서 쉬고 싶어서가 아니다.

부욱―

그가 겉옷을 찢어 어깨를 꽉 틀어 매었다.

이걸로 지혈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피가 흐르는 것을 조금은 막아주었다.

어깨를 묶은 겉옷을 동여매며 그가 얘기했다.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뭐? 어딜?”

테일 교관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부상으로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냐며.

자신을 만류하는 테일 교관을 뒤로하곤, 시안이 땅을 박찼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길은 보이고 있었다.

‘라비, 에르제. 무사하겠지?’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는 라비의 기운을 따라가면 되었으니.

걱정스레 눈을 찌푸리며 그가 라비의 기운을 쫓았다.

* * *

푸직! 푸지지직!

[끄아아아악!]

날개 하나가 뜯겨나갔다.

신경을 잡아 뜯는 것과 같은 고통에 아기 오크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고통은 필연적으로 분노를 불러왔다.

[이 인간 놈이!]

파아아아앙!

그가 뒤쪽으로 음파를 쏘아 보냈다. 콰아앙! 한 번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가 더더욱 잘게 갈려 나갔다.

그러나 그 파편 중 피와 육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기 오크가 빠드득 이를 갈며 고개를 흔들어 주변을 살폈다.

[숨지 말고 나와라, 인간!]

이상했다.

바퀴벌레처럼 잘 숨는 인간인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없었을 터인데.

‘어딨는 거지!?’

방금 전부턴 전혀 그 기척을 포착할 수 없었다.

무너진 공동 어디를 둘러봐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장소를 떠난 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게.

[끄아아아악!]

이렇게 날개가 뜯어지고 있었으니까.

지금 걸로 또 한 장에 날개가 떨어졌다.

이제 그에겐 한 쌍의 날개밖에 남지 않았다.

하나만 더 떨어졌다간 공중에 떠 있을 수도 없으리라.

‘안 돼!’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자신이 강림한 이 아기 오크의 몸은 말 그대로 아기다. 육체 능력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준.

날개가 떨어지면 승산은 없었다.

[크윽!]

쾅! 쾅! 쾅! 쾅!

보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가 마구잡이로 음파를 쏘아냈다. 어쩌다 한 발 맞히기를 기도하면서.

그러던 직후.

부스럭.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거기냐!]

걸렸다!

아기 오크가 환희 섞인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사실 음파를 쏘아 보내던 것은 페이크. 진짜 목적은 공격하는 순간 드러나는 놈의 살기를 읽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

돌아본 뒤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해진 아기 오크가, 크게 몸을 움찔거리더니 다시금 뒤로 돌았다.

그곳엔.

[컥!]

붉게 빛나는 에르제의 두 눈동자가 자리해 있었다.

아기 오크가 반응도 하기 전에 에르제가 놈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쿵!

그러곤 빙글 단검을 돌려 역수로 쥐고는 날개 하나를 잘라냈다.

[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지하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에르제의 표정에는 일절 변화가 없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에 대한 동정도, 기괴한 놈의 모습에 대한 거부감도, 피를 본 흥분도.

그저 담담하게, 작업이라도 하듯 팔을 움직일 뿐이었다.

서걱!

[끄아아악!]

그렇게 마지막 날개까지 모두 잘라냈다.

남은 것은 벌레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아기 오크의 본체뿐이었다.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아기 오크가 입을 어버버거렸다.

그의 눈에 서서히 공포감이 차올랐다.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것이 아니었다.

분명 바로 코앞에 그녀가 서 있는데도, 그럼에도 그녀의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게 느껴져야 할 마력의 잔향도, 그리고 누구도 숨길 수 없을 살기조차도.

시각 말고는 지금의 에르제를 잡아내는 감각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놈의 경악하든 말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

에르제가 단검을 들어 올렸다.

라비가 그녀의 팔에 오르더니 그 단검을 검은 기운으로 감쌌다.

그 순간만큼만 그녀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곧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쓰레기산의 죄수가 기겁합니다.]

[잠깐! 잠깐 기다려라!]

아기 오크가 자그마한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시안이라면 그 말을 듣고, ‘잘 안 들리는데’라는 식으로 비꼬는 말을 던질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녀에겐 그 정도의 말재간은 없었다.

“미안.”

그래서 그냥 단검을 찍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커헉……!]

머리를 찍히고도 살 수 있는 아기 오크는 없다.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평범하게 찔린 거라면 강림을 풀고 지옥계로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우웅!’

에르제의 검에는 라비의 기운이 얽혀 있었으니까.

라비가 도망치려는 놈을 붙잡고 그 힘을 빨아들였다.

다크 이터의 힘을 모조리 뽑아먹을 때처럼, 지금 역시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기운은 다크 이터 때와 엇비슷했다.

여전히 해령궁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 같은 수준.

그러나 그런 세세한 일은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웅!”

또다시 지옥계의 기운을 한껏 빨아들였단 것만으로 라비는 매우 좋은 기분이 되어 있었으니까.

“후우.”

에르제가 몸을 일으키며 아기 오크의 머리통에서 단검을 뽑았다.

라비가 힘을 흡수한 일련의 과정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라비의 계약자가 아니었고 지옥에 관해서도 일절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었으니.

“…….”

그녀가 피가 묻은 단검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단검뿐만 아니라 아기 오크에게서 튄 피가 전신에 가득 묻어 있는 그녀였다.

“이겼다.”

그녀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보며 그리 읊조렸다.

이겼다.

시안은 절대 싸우지 말고 감시만 하라 하였지만 어쩌다 보니 싸우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놈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좀스러운 견제만 날리며 업혀 가기만 했던 고블린 킹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신의 힘으로 이뤄냈다.

그의 도움이 되었다.

“아하.”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 * *

연결되어 있는 라비의 기운을 더듬으며, 시안이 곧바로 지하 유적에 들어왔다.

어깨의 상처가 벌어지며 욱신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상처 치료야 나중에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지하 유적.

에르제가 파헤치며 나아간 그 흔적을 따라 빠르게 진입하던 도중 그의 망막에 메시지가 비쳤다.

[흑정령이 새로운 능력에 기뻐합니다.]

‘이긴 건가?’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라비가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는 메시지. 그 말은 즉 라비가 놈의 기운을 모두 흡수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에르제가 이겼다는 뜻.

그의 마음을 누르고 있던 큰 짐 하나가 덜어졌다.

녀석을 감시해 달라고 했던 건 순전히 자신의 욕심이었다.

흑마법사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

에르제는 그것을 불평 하나 없이 들어주었다.

때문에 만약 여기서 에르제가 죽거나 크게 다쳤다면 큰 죄책감에 휩싸였으리라.

조금 안도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속도는 전혀 늦추지 않은 채 그가 지하 깊숙이 들어갔다.

라비가 얻었다는 새로운 능력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건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확인할 일이다.

그리고 도착한 지하 공동.

그곳엔 피를 잔뜩 뒤집어쓴 에르제가 단검을 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사했구나, 에르제.”

시안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소리를 듣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신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모습.

그건 머리와 얼굴도 예외가 아니었다.

돌아보는 그녀를 보곤 시안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어쩐지 분위기가 아까 전까지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안.”

그녀의 눈이 활처럼 휘었다.

그 눈웃음 안쪽에, 붉은 눈동자가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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