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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60화 (60/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0화

청명한 밤공기의 기운이 시안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언제나 밤이 올 때마다 느꼈던 그 기운. 그러나 이번엔 유달리 서늘하고 예리했다.

뚜둑, 뚜두둑.

몸속을 구름처럼 부유하던 마나가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져 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의 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갈라진 피부가 아물기 시작하고 찢어졌던 근육이 더욱 탄력 있게 봉합되었다.

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도록.

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이 기운을, 보다 막힘없이 운용할 수 있도록.

“…….”

처음이었다.

그동안 밤에 연공을 한 시간만 해도 일백 시간은 가뿐히 넘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시안은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도 격이 높은 적과 검을 맞대고, 그 벽에 부딪혀 무참히 쓰러지고.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기 위해 신체가 정련(精鍊)되고 있었다.

‘영약의 기운.’

일전에 염노에게 받았던 이름 모를 영약.

미처 흡수하지 못하고 뱃속 깊숙이 구슬처럼 박혀 있던 그것이 살짝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완전히 녹진 않았지만 크기 자체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 줄어든 만큼의 기운이 시안의 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후우…….”

지금까지보다도 훨씬 선명하고 또렷한 오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아까보다도 두 배는 더 강대하게 흘러내리는 그의 오러.

다시금 그것을 운용해 압축해 보려던 시안은.

“…….”

하지 않았다.

아직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는 아니었다.

이것은 그렇게 사용하는 게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툭.

시안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오러에 가득 휩싸인 검을 휘둘렀다.

[이놈……!]

하크쉬가 크게 놀랐다.

쏟아지는 시안의 오러가 흡사 해일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저 애송이만 같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자신을 휩쓸어버리기 위해 덮쳐오는 거대한 파도.

오러의 질도 양도. 이 짧은 순간에 분명히 격이 올랐다.

카앙―!

하크쉬가 글레이브를 들어 검을 막았다.

그의 압축된 투기와 시안의 흘러넘치는 오러가 맞부딪혔다.

그러나, 시안의 오러를 막힘없이 파고들어 가던 아까와 같은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놈의 투기는 더 이상 시안의 오러를 파고들지 못했다.

[이거 대단하군!]

하크쉬가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탄성을 내뱉으며 글레이브를 크게 휘둘렀다.

그의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흐르듯 피어오르는 투기는 이제 막 투기를 습득한 초보 전사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다.

저것은 물이나 연기와 같아서, 투기 본연의 강력함은 건재하나 한계가 명확하다.

물과 연기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강철을 막을 수 없는 법이었으니.

그런데 눈앞의 어린 전사는 그걸 해내고 있었다.

물과 연기로 강철을 막아 보이는 신기(神技)를.

하크쉬가 눈을 번뜩이며 글레이브를 돌렸다.

[쿨카락!]

그가 역수로 쥔 글레이브를 크게 휘둘러 올려쳤다.

투기에 싸인 날붙이가 땅을 긁으며 원을 그렸다. 콰과과과광! 땅이 거칠게 뒤집히며 시안을 향해 솟아올랐다.

쇄도하는 대지의 파도를 보며 시안이 검을 틀어쥐었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서걱!

파도가 갈라진다.

닿는 모든 것을 갈아버릴 듯 쇄도하던 그것이 강제로 반듯이 정리되었다.

쏟아져 내리는 잔해들 사이로 시안이 땅을 밟고 뛰었다.

캉!

공중에서 검과 글레이브가 부딪혔다.

캉! 캉캉!

몇 번의 참격을 나누며 시안은 녀석의 빈틈을 찾았다. 기본적인 전술은 아까와 달라지지 않는다. 천뢰를 박아 넣을 틈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데,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와라!]

시안의 오러를 보며 하크쉬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녀석은 자신이 뭘 노리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러 자신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한번 해보라고.

이번에도 다시, 정면으로 이겨내 보이겠다고.

[ 상천검(霜天劍) ]

이렇게 대놓고 꼬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시안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평야를 미끄러지는 발걸음이 훨씬 부드러웠다. 검을 든 팔이 이전보다 가벼웠다.

그러나 검 끝은 더욱 매서웠다.

[ 천뢰(天雷) ]

떨어져 내리는 검은 번개를 보며 하크쉬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온 투기가 글레이브에 집약되었다.

몸속 깊숙이 자리한 생명의 원천까지 끌어올린,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격.

콰아아아아앙!

[크워어어어어!]

“큭……!”

하크쉬의 하얀 투기와 시안의 검은 오러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잔재주 따위는 일절 없는 힘과 힘의 대결.

방금 전은 졌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카직―!

시안의 오러가 하크쉬의 투기를 깨뜨리고 있었다.

깨져 나가는 스스로의 투기를 보며 하크쉬의 머리에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전생신의 은총?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건 내가 스스로 이룩한 힘이다.

처음 투기를 발현하고 동포에게 축하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던 시절이었다.

카지지지직!

시안의 검이 기어이 그의 투기와 함께 글레이브를 산산 조각내었다.

투웅! 하크쉬의 육중한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신은 우리를 지켜본다. 하지만 도와주진 않는다. 우리의 긍지는 신이 아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던 말이었다.

그 때문에 동포들에게 백안시되던 그였다.

불경한 녀석이라며.

푹!

시안의 검이 하크쉬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순간적으로 그곳에 투기를 압축하여 방어한 그였으나 시안의 검은 그런 임기응변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크헝! 하크쉬가 함성을 지르며 부러진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시안의 가슴에 사선으로 기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흐르는 피를 보며 하크쉬가 더욱 광소를 터뜨렸다.

―그럴 리가.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동포 중 하나가 물었다. 너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거냐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내가 목숨을 잃는 그 날, 나는 전사의 성전에 올라 신에게 결투를 청할 것이다! 내가 바로 최강의 전사다!

하이오크들에게 내려오는 고언.

용맹스러운 일족의 전사는 죽어서 전사의 성전에 오르게 되며, 그곳에서 다시금 끝없는 투쟁의 길을 걷게 될지니.

그는 누구보다도 신과 만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였다.

신앙의 대상인 전쟁신조차 그에겐 뛰어넘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니.

콰드득!

시안의 검이 하크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갈비뼈를 부수고 그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두근!

그러나 놈의 질긴 심장은 검에 찔렸음에도 여전히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하크쉬가 희번덕 눈을 뜨며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부러진 날이 시안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크윽―!”

[그아아아아아!]

시안이 더욱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더욱 깊숙이 놈의 심장을 찔러 들어갔다.

동시에 하크쉬 역시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시안의 어깨에 박은 글레이브를 밀어붙였다.

둘의 눈에 핏발이 서며 잡고 있는 무기에 온 힘을 쏟아냈다.

―우리의 피가 전사의 성전을 적실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전사들이 지켜보는 그 앞에서, 우리는 승리할 것이니!

전쟁에 임하며 그가 외치던 함성.

그리고 그에 호응하던 수많은 동포들.

그들의 함성 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그것을 들으며, 하크쉬가 마지막 남은 힘을 글레이브에 쏟았다.

그러나.

두근-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점차 줄어든다.

꺼지기 직전 타오르는 촛불처럼 힘차게 뛰고 있던 하크쉬의 심장이었지만 검에 꿰뚫리고 계속 멀쩡할 수는 없었다.

시안이 으득 이를 악물며 검을 비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어 내렸다.

[커헉!]

하크쉬의 몸통이 갈라지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뜨뜻한 피를 정면에서 맞으며 시안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깨에 박힌 부러진 글레이브가 미칠 듯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 글레이브가 천천히 뽑혔다.

쿠웅!

하크쉬가 쓰러졌다.

거구의 하이오크가 엎어지며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그 손엔 방금까지만 해도 시안의 어깨에 박혀 있던 글레이브가 단단히 잡혀 있었다.

죽어서도 놓지 않겠다는 듯이.

[크…… 크크…….]

시안이 쓰러진 놈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놈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하크쉬가 크흐,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늙은 아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크쉬야. 너는 너무 오만하구나.

―신에게 결투를 청하겠단 말이 그리 불경하게 들렸습니까?

늙은 아비가 얘기했다.

―신을 입에 담기에 앞서 네가 이겨야 할 상대가 있을 것이다.

그를 꾸짖는 아비의 말. 그는 괜히 반항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당시 그는 아직 어린 전사였고 그보다 강한 동포는 셀 수 없이 많았으니.

하지만 언젠가 모두 뛰어넘어 보이겠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후후.

그렇게 얘기하자 늙은 아비는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당최 알 수가 없는 노인네였다.

알 수가 없는 노인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건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인간. 이름이 뭐지?]

“…….”

그의 질문에 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시안 아그리드, 라고 대답하려다 문득 멈춘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

결코 잊지 않을 어린 시절의 기억.

‘아버지, 어머니.’

사실 그에게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가주에게 주워지기 전인 5살 이전의 일은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 선명한 것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나 단 한 가지.

그가 가진 선명한 부모님의 기억이 하나 있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때, 갑자기 산사태가 쏟아져 내리며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던 마차 안에서.

어렸던 자신을 양쪽에서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팔이 있었다.

왼쪽에 앉아 있던 어머니와 오른쪽에 앉아 있던 아버지.

그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부모님의 기억.

‘…….’

그가 스스로의 이름을 찾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후작가의 그림자로 구르다 시안이란 이름으로 생을 마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죽어서 저세상에 도착했을 때, 진정한 이름이 아닌 시안이란 이름을 달고 온 자신을 본다면 두 분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내 이름은…….”

그가 하크쉬를 바라보았다.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빛을 잃지 않는 하크쉬의 눈.

그것은 곧 죽는 이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투지로 철철 넘치고 있었다.

시안이 입을 달싹였다.

그 목소리는 오직 하크쉬에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크…… 하하하! 잘 들었다, 어린 인간.]

하크쉬가 크게 웃었다.

지금은 늙은 아비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라봐야 할 것은 신이 아니었다.

[전사의 성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네놈의 첫 번째 결투 상대는 바로 나다!]

바로 그 자신을 죽인 전사의 이름.

그가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생명이 사라져 간다.

“…….”

놈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을, 시안이 가만히 회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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