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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59화 (59/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9화

“읏…… 으으…….”

“웅! 웅웅!”

볼에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에 에르제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눈에 비친 것은 다 무너져 내린 공동.

자신은 그 잔해에 파묻혀 있었고, 그런 자신을 시안의 정령이 필사적으로 깨우고 있었다.

“어…… 떻게…….”

“우웅!”

어떻게 된 거지, 라고 중얼거리려던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작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곤충의 날개를 달고 있는 아기 오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기억났다.

이 녀석의 알 수 없는 공격으로 지하 공동이 반파되고, 그 잔해가 떨어져 내리고.

자신은 최대한 그걸 피해 보려 하였지만 모두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물며 놈이 쏘아낸 음파에 의한 충격도 있었고.

그 탓에 기절했다.

기절 시간은 짧았던 것 같지만…….

[어리석구나, 동포여. 그 미미한 힘으로 이 나를 잡아먹겠다 찾아온 것이냐?]

놈이 그녀에게,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볼에 붙어 있는 라비를 향해 얘기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라비가 파르르 떨며 그녀의 귀 뒤쪽에 얼굴을 파묻었다.

[흥.]

놈이 고도를 낮춰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라비를 집어 들었다.

라비가 빠져나가고자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지만 무리였다. 녀석의 악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영리하게도 육체의 팔 부분만의 강림을 풀어 혹시 모를 목줄의 위험에서도 벗어난 상태.

[그래도 나름 쌓아놓은 것은 있는 모양이군. 마침 잘됐어. 돼지 새끼들의 마석 대신에 널 먹겠다.]

녀석이 라비를 들어 올리며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웅! 우웅!”

라비가 싫다는 듯이 몸을 흔들었다.

그 모든 광경이 쓰러져 있는 에르제의 눈에 들어왔다.

‘시안의 정령…….’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공포심에 잔뜩 위축되어 있었음에도,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지 마.”

아기 오크가 눈만 굴려 그녀를 보았다.

그러곤 한껏 비웃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잘 안 들리는데?]

놈이 손을 놓았다.

놈의 입속으로 라비가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이 슬로우 모션처럼 에르제의 눈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직후.

‘아…….’

기이한 감각이 그녀를 엄습했다.

모든 것이 멈췄다.

온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은 것만 같은 감각.

그 동떨어진 곳에 오직 그녀 혼자만이 무력하게 팽개쳐져 있었다.

‘이건…….’

어릴 때 겪었던, 그리고 최근 다시 한번 겪었던 그 경험.

트라우마의 탓일까. 가장 먼저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시안이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몇 번이고 맴돌았다.

깨달음의 순간.

어째서 이렇게 빨리 또 찾아온 거지?

위급한 상황이라서? 아니면 지난 두 번의 경험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자신을 재촉하러?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몸을 엄습하는 추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심. 그리고 외로움.

그 모든 감각에서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정말로 시안의 말대로 이게 깨달음의 순간이라면.

[ 이 차디찬 세상에서 내가 칼을 드는 이유는. ]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

그녀의 눈에 펼쳐져 있는 검은 선. 그 선들이 더욱 뻗어 나가며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뒤덮을 것처럼.

그 어떤 연공법이나 심법도 아닌, 그녀가 자력으로 각성한 마나.

그 마나의 색이 더욱더 짙어지고 있다.

“…….”

이윽고, 다시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멈춰 있던 라비가 아기 오크의 입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라비의 눈이 공포심으로 파르르 떨려왔고 아기 오크의 눈은 더없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미한 힘이라곤 하나 그들에게 동포를 포식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

그때.

푹.

[……아?]

그 목에 단검이 틀어박혔다.

목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통증에 아기 오크가 크게 몸을 떨었다.

그 덕에 라비는 놈의 입이 아닌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년이……!]

목에 단검이 박혔음에도 놈은 죽지 않았다. 이 몸은 그의 진실된 육체가 아니었기에.

아기 오크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아래를 보았다.

그곳엔.

“먹지 마.”

어둠 속에 붉게 물든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 * *

오러를 두른 시안의 검이 떨어져 내린다.

비록 라비는 이 자리에 없었지만 오러를 쓰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그 모든 기운은 시안의 것이었으니까.

[호오!]

검은 오러에 둘러싸인 검을 보고 하크쉬가 눈을 빛냈다.

한 번 피어오른 그의 분노와 투기는 전혀 가라앉진 않았지만, 그 안에 작은 호기심이 끼어들게 되었다.

[대전사의 증표라니! 어린놈이 대단하구나!]

그가 투기를 두른 글레이브를 올려쳤다.

콰앙―! 두 오러가 부딪힌 충격파가 사위로 퍼져 나갔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힘 싸움은 이쪽이 불리.

하크쉬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더니 반대쪽 손의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미숙하다!]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놈의 도끼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노리고 떨어졌다.

칠흑의 오러를 놈의 투기가 조금씩 파고들어 왔다.

오러의 운용에 있어서 이쪽이 밀린다는 의미였다.

‘쯧.’

시안이 작게 혀를 차고는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런 그에게 도끼 한 자루가 맹렬히 날아왔다.

시안이 눈을 크게 뜨며 상체를 굽혀 그것을 피해냈다.

[투기는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아이야.]

하크쉬가 씨익 웃었다.

츠츠츠츠.

흘러넘치던 놈의 투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작게, 그러나 더욱 날카로이 압축되어 글레이브의 날을 벼리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 베여버릴 것만 같은 기운을 뿜어내며.

“…….”

간결하고 날카로운.

빈틈 하나 없이 밀도 높게 압축된 오러.

츠츠.

이자크 때를 포함해 벌써 두 번을 보았다. 시안이 그것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오러를 압축하려 해보았다.

화르륵!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살짝 압축되는 듯한 오러가 자체적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쏟아져 내린다.

피어오르는 검은 오러를 보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에게 아직 오러의 압축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한텐 오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세를 잡곤, 땅을 박찼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둘 사이의 거리가 마치 접히기라도 한 듯이 좁혀지며, 돌풍에 싸인 검이 하크쉬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어림없다!]

콰앙!

놈의 글레이브가 시안의 검을 쳐냈다.

시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막힐 것은 이미 예상한바.

그가 땅을 박찼다.

다음 순간, 그는 이미 하크쉬의 오른쪽을 점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시안의 모습에 하크쉬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방심하지 않고, 시안이 검을 내질렀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기척 없는 검이 녀석의 목을 베어갔다.

그러나.

콱!

놈의 커다란 손이 시안의 검을 단단히 틀어잡았다.

칠흑의 오러가 둘려 있는 검. 그러나 놈의 손 역시 압축된 투기가 빠짐없이 감싸고 있었다.

[잔재주를.]

그가 비웃음을 보내며, 시안의 머리를 글레이브로 내려찍었다.

쇄도하는 글레이브를 보며 시안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검을 빼보려고 하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검을 놓고 피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한 번 빼앗긴 검은 다신 돌아오지 않으리라.

지금은 라비가 없어 검을 회수할 수 없는 상황.

유일한 무기를 잃는다면 이 전투는 무조건 패배였다.

“큭!”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강제로 비틀어 뽑는 것이었다.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쿠구구구궁!

그의 검이 거친 기운에 휩싸이며 놈의 손을 그어 내렸다.

콰앙!

[……!]

시안의 머리를 내려찍던 글레이브가 땅에 박혀 들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시안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었다.

그의 눈이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하크쉬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시안, 그리고 스스로의 손을 보았다.

압축된 투기로 싸여 있던 손바닥이 길게 찢겨 있었다.

투기를 뚫고 공격을 성공시킬 줄이야.

[크크크크! 과연 한 수가 있던 놈이었구나. 대전사의 증표를 가질 만해.]

하크쉬가 꽈악 손을 틀어쥐었다.

흘러내리던 핏방울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손을 폈을 땐 이미 손바닥의 상처도 붙어가는 중이었다.

라비의 밤의 안식만큼은 아니어도 인간이나 평범한 오크 따위는 초월한 수준의 재생력.

시안이 혀를 찼다.

저 재생력이 있는 이상 잔 상처로 갉아먹는 식의 공격은 안 된다.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 일격에 죽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거…… 이렇게 쉽게 보여줘도 되는 것이더냐?]

복잡한 표정의 시안을 보며 하크쉬가 웃었다. 한 방 먹은 것치고는 담대하게.

오히려 상처를 입혔던 시안 쪽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천뢰는 맞히기 어려운데.’

위력은 더할 나위 없다.

오러를 두른 검으로 펼친 천뢰.

아직 부족한 자신의 오러로도 놈의 압축된 투기를 뚫었으니 이 이상 없는 위력이었다.

제대로 맞추면 놈이 아무리 방비를 하더라도 그 머리통을 깨부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맞추는 것이 어려웠다.

천뢰의 검로는 오직 하나.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는 직선.

상대가 기술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면 모를까, 알고 있다면 유효타를 먹이기 영 어려운 기술이다.

애초부터 방어를 도외시한 검술이기에 한 번 당해본 상대에겐 카운터를 맞기도 쉽다.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파직!

시안이 놈에게 달려가 검을 내질렀다.

위에서 아래로 긋는 천뢰의 검로.

그러나 역시나 놈에겐 통하지 않았다.

흡! 하크쉬가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은 날쌘 몸놀림으로 천뢰를 피해냈다.

역시 안 된다.

빗나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안이 빠르게 다음 동작에 들어갔다.

그런 시안을 향해 하크쉬가 글레이브를 내질렀다.

카앙! 캉! 캉!

허공에서 놈의 글레이브와 시안의 검이 몇 번이고 부딪혔다.

그 사이사이, 천뢰를 꽂아 넣을 수 있는 타이밍을 끊임없이 살피는 시안이었으나.

[크하하하! 너무 뻔하지 않으냐!]

하크쉬는 귀신같이 눈치채고 모조리 피해냈다.

결국 전투는 소모전의 양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즉 시안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

‘더 늦기 전에 수를 써야 한다.’

이 이상 체력과 마나를 낭비할 순 없었다.

카앙―!

커다란 부딪힘. 시안의 몸이 살짝 뒤로 밀리며 하크쉬도 균형이 잠깐 흔들렸다.

시안의 눈이 빛났다.

[ 귀력검(鬼力劍) - 암무(暗霧) ]

하크쉬가 다음에 위치할 방향을 미리 선점하며, 시안의 검이 뱀처럼 쏘아졌다.

캉!

어떻게든 그걸 막은 하크쉬였으나 그것으로 한 번 더 자세가 흐트러졌다.

무너졌다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빈틈이었으나, 시안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큰 기회였다.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그의 검이 검은 번개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피할 수 없다.

시안과 하크쉬, 두 사람 모두 그것을 확신했다.

하크쉬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건방진!]

그가 짐승과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전의를 일구었다.

쿠구구궁!

떨어져 내리는 검은 번개. 하늘의 기운이 내려앉은 검.

하크쉬가 핏발 선 눈으로 글레이브를 쳐올렸다.

[피할 수 없다면 막아내면 그만이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서며 근육이 두 배는 더 부풀어 올랐다.

더욱 빨라진 혈류의 속도에 그의 전신이 빨갛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놈의 글레이브가 시안의 가슴을 찢어발기려 쇄도했고.

시안의 검이 놈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지금까지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조금 떨어져 있는, 주둔지 중앙의 광장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도 모두 울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파.

투둑! 투두두둑!

근방에 있던 나무가 맥없이 부러지고 뽑혀 나가며 땅이 크게 패여 나갔다.

점차 폭음이 줄어들고, 정적이 이어졌다.

두 사람 중 일어서 있는 이는.

[크, 크하하하!]

하이오크의 대전사.

비록 한쪽 팔이 반 이상 찢어져 내려 피가 철철 뿜어지고 있었지만, 어찌 됐든 서 있는 것은 그였다.

시안은 무참히 부러져 버린 나무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쿨럭!”

그가 피를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찡그려졌다.

충격의 여파일까.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듯 시야가 살짝 흐릿했다.

그 흐릿한 시야로 광소하는 하크쉬가 보였다.

[어린 인간치곤 잘했다! 간만에 좋은 전투였어.]

분노보다도 승리의 기쁨만이 남았는지 하크쉬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 손에 들린 글레이브에서 살기가 뚝뚝 묻어나왔다.

으득.

시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일어섰다.

온몸이 맞물리지 않는 톱니처럼 삐걱대고 있었다.

[크하하하하하!]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하이오크들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학우들이 보인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하이오크들을 상대하느라 이쪽으로 올 여력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테일 교관. 그가 시안 쪽을 보곤 당장에 달려오려 하였으나, 열이 넘는 하이오크들이 그를 집중적으로 마크했다.

그들 사이에서 글레이브를 쳐내며 테일 교관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도와줄 이들은 없다.

애초부터 학생들과 하이오크들의 전력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테일 교관도, 다른 학우들도, 그리고 에르제도.

그들 모두가 목숨을 건 전투에 내던져진 상황.

주홍빛 석양이 그 목숨을 불태우듯이 발갛게 전장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후.”

그 석양조차 가라앉고 있다.

시안이 깊은 호흡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흠?]

생각보다 멀쩡한 것처럼 일어서는 시안을 보곤 하크쉬가 눈을 찡그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해는 산등성이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발간 석양이 저물고 짙은 어둠이 찾아온다.

시안이 길게 숨을 내쉬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런 그의 몸을 한층 더 짙어진 검은 기운이 감싼다.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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