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7화
요 며칠 동안 용병단은 열심히 산 중턱 부근을 돌아다니며 하이오크를 색출해 토벌했다.
학생들 역시 빠짐없이 그들과 동행하며 전투 장면을 눈에 새겨 넣었다.
그날 이후로 이자크의 혈기린을 볼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것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이제 중턱 부근에선 놈들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너희들이 오기 훨씬 전부터 계속 토벌하고 있었으니까. 그 결실이 이제 나타나는 거지.”
듀나스가 그리 얘기했다.
애초부터 이번 의뢰는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고. 그럴 때 너희가 온 것이라고.
그리고 이젠 진짜 마무리만이 남았다.
“고지대에 위치한 성채.”
옛 성의 유적이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산 정상. 그곳에 숨어 있는 하이오크의 보스를 완전히 토벌해야 한다고.
그곳은 이곳 중턱에서처럼 하이오크들이 퍼져 있지는 않다.
중턱에 있던 놈들은 멧돼지나 노루 같은 사냥감을 사냥하러 돌아다니는 것이다.
눈과 얼음밖에 없는 산 위쪽에선 사냥감을 찾아다니려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즉 고산 지대에 있는 하이오크는 모두 성채 안에 틀어박혀 있다.
“저희도 견학하러 가면 안 돼요?”
“안 돼. 위험해.”
학생 몇몇이 얘기해 보았지만 듀나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한다는 것은 그 개인의 뜻이 아니라 용병단 전체의 의지란 얘기겠지.
그가 이어 얘기했다.
설산의 고지대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디딜 곳이 아니다.
하이오크는 둘째 치고 그곳의 환경 자체가 위험하다.
제대로 된 경험이 없는 너희를 서른이나 데리고 올라갈 순 없다.
“그러니까 얌전히 집이나 지키고 있어.”
“예에…….”
모두 맞는 말이었기에 학생들은 반론할 의지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당부를 마치고 듀나스가 작전 회의를 하러 떠났다.
남아 있는 건 학생들과 테일 교관뿐이었다.
“이번 현장학습은 여기까지인가 보군. 어쩔 수 없지. 설산의 성채 공략에 따라가기엔 아직 무리다.”
테일 교관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요 며칠간 용병들의 전투를 보며 학생들도 많이 배웠을 것이다. 거기에 이자크의 오러도 한 번 보았고.
성채 공략을 견학하는 것도 물론 도움은 될 테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만큼은 위험이 너무 크니까.
‘이걸로 끝인가.’
시안이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더 이자크의 혈기린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어떠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따로 한 번 써달라고 부탁해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
실전이 아닌, 그저 한 번 사용해 봤을 뿐인 오러를 본다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의문이고.
“그럼 우린 출발하지. 최소한 며칠은 걸릴 테니 그 후에 보자고.”
“몸조심해라, 이자크.”
테일 교관과 악수를 마지막으로 이자크가 용병들을 이끌고 주둔지를 떠났다.
남은 것은 테일 교관과 서른 명의 학생들뿐.
사실 이 시점에서 그냥 돌아가도 큰 상관은 없었지만, 어차피 현장체험학습에 배당된 기간은 많이 남아 있다.
이참에 주둔지를 지키며 경계하는 것을 훈련해 보자는 테일 교관의 의향으로 학생들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좋아. 그럼 아까 알려준 대로 배치 들어가고. 교대와 휴식을 잊지 말고 컨디션을 잘 조절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테일 교관의 지시로 몇몇 학생들이 주둔지 주변으로 흩어졌다.
남은 학생은 각자 천막에 들어가 쉬거나 한쪽에서 검을 휘두르거나 그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인근의 하이오크는 모두 토벌한 후다.
쳐들어올 마물 따윈 없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훈련이기에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동쪽 부근인가.’
시안이 교관에게 지정받은 구역에 가 섰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침엽수림. 머리 위에 떠 있는 아침 햇살.
당분간은 한가한 경계 근무만 잔뜩 서게 될 것 같았다.
* * *
내쉬는 숨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차디찬 공간.
어두컴컴한 그곳에 주름진 늙은 하이오크 한 마리가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안겨 있는 아기와 같은 작은 하이오크.
이내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목표 지점을 통과했다. 이제 슬슬 발동시키면 되겠어.]
그 목소리는 늙은 오크에게 안겨 있는 아기 오크에게서 들려왔다.
그러나 전혀 아기 같지 않은, 그런 걸쭉한 목소리.
아기 오크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병력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겠지?]
[남은 병력의 일부를 떼어 대기시켰다. 오십 가까이 되는 숫자지. 당연히 모두 길들이고 있는 늑대가 있는 이들이고.]
[그것뿐?]
[내 아들이 있다.]
늙은 오크의 말에 아기 오크가 히죽 웃었다.
[괜찮은데?]
늙은 오크가 아기 오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놈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 시선을 알고 있음에도, 아기 오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내 도움 없이 너희들만으론 다 뒈지고 끝이잖아?
그런 비웃음이 담긴 얼굴이었다.
[후우.]
늙은 오크가 한숨을 쉬고는 아기 오크를 지하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아까 말한 오십의 병력과 그의 아들, 전사장 하크쉬가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오크가 아기를 하크쉬에게 넘겼다. 회색 늑대를 타고 있는 그에게.
[출발하지.]
아기 오크의 말에, 방 전체에 빼곡히 새겨진 문자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지하의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까지 빈틈없이 새겨져 있는 기이한 문자. 그 문자가 빛나며 아기 오크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늙은 오크가 눈을 찌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쓰레기산의 죄수가 웃습니다.]
[시간만 잘 끌고 있으라구.]
남아 있는 병력도 200이 훌쩍 넘고, 거기에 이 성채도 있으니 시간 끌기는 충분하겠지.
아기 오크가 그리 얘기했다.
아니, 정확히는 아기 오크의 몸에 강림한 ‘쓰레기산의 죄수’가.
그 직후.
빛이 번쩍이며 방 안에 있던 병력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 * *
“하암~”
주둔지의 입구. 그곳에서 남학생 하나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였다.
가만히 대기하는 것이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모습.
“야, 집중해.”
함께 경계를 서던 여학생이 그런 그를 타박했다.
하품을 하고 있는 남학생과 다르게 그녀는 곧게 서 있는 채 날카로운 눈으로 사위를 감시 중이었다.
남학생이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심심하니까 그러지.”
“그러다 하이오크들이 나타나면 어떡할 건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근처는 싹 다 토벌했잖아.”
“그런 생각이니까 하품이나 하고 앉았지. 훈련은 실전처럼.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훈련에 임해야 하는 거 몰라?”
“뭐 그 말이 맞긴 한데……. 어쩔 수 없잖아. 이틀 동안 텅 비어 있는 곳에서 경계만 서다 보니까 따분해서 그렇지.”
용병단이 산 위로 오른 지 벌써 이틀째.
그동안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학생들은 테일 교관의 지시에 따라 이틀 내내 경계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쉬는 시간일 때는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았지만, 이 주둔지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개인 단련뿐이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다 보니 지루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벌써부터 그러면 나중에 실전에서 어떻게 하려고.”
“야, 나도 실전에선 안 이러지. 그 정도 분별은 있다.”
“훈련에서 제대로 안 하는 놈이 실전이라고 제대로 할 것 같아?”
“킁…….”
여학생의 연이은 타박에 남학생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그래, 뭐, 열심히 해야지.
지금쯤 용병단은 눈에 파묻힌 산을 오르느라 고생 중일 것이다.
다른 반 학생들도 대륙 어딘가에서 한창 고생을 하고 있겠지.
그런 주제에 이런 편한 임무에서조차 늘어진다는 것이 살짝 죄책감도 들어왔다.
남학생이 일어나는 것을 힐긋 보고는, 여학생이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경계를 시작했다.
그때.
“야.”
“왜.”
“저쪽에서 뭐가 번쩍거리지 않았냐?”
여학생의 눈에 무언가가 비쳤다.
“저쪽?”
그녀의 말에 남학생이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반짝거리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방금 뭐가 빛났던 것 같은데…….”
“잘못 봤겠지. 여기서 뭐 빛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런가…….”
“그렇다니까.”
미심쩍은 눈으로 중얼거리는 여학생을 보며 남학생이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 서서 경계하느라 피곤한 거 같은데 너 좀 쉬어라. 내가 할 테니까.”
“……쉬기는 좀 그렇고. 잠깐만 앉아 있을게.”
남학생의 말에 여학생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말은 정론을 내뱉긴 했지만 그녀 역시 똑같은 사람이다.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라면 조금은 늘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강직한 성격인 그녀도 임무 중에 이렇게 쉬고 있는 것이었다만.
드드드드드드.
“어? 야, 야야!”
“왜? 그쪽에 뭐 있어?”
갑자기 다급하게 부르는 남학생의 말에 그녀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곳에선.
“뭐, 뭐야!”
“나도 몰라!”
그 수가 오십에 달하는, 늑대를 탄 하이오크가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 * *
‘……웅웅!’
시안의 머릿속에 갑작스레 라비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개인 단련을 마치고 잠시 쉬던 중의 일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반응이었다.
라비가 흑마법사의 기운을 느꼈을 때의 반응.
그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부우우우우우―!
때마침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학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모이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빨리 준비해! 오크 놈들이 쳐들어온다!”
“이 근방은 다 처리한 거 아니었어!?”
“나도 몰라! 일단 칼이나 빨리 들어! 수십 마리나 된다고!”
학생들이 오크들이 나타난 주둔지 입구로 향했다.
어느새 나타난 건지 테일 교관이 학생들을 일사불란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대지의 꽃부터 사용해라!”
테일 교관의 지시에 마법사 학생들이 대지의 꽃을 사용했다.
쿠구구궁!
땅에서 튀어 오른 가시가 늑대를 타고 달려오는 하이오크들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놈들은 너무나 쉽게 그것을 뛰어넘었다.
쌔애애액!
그리고 어김없이 날아오는 손도끼들.
“막아!”
이제는 학생들도 알고 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펼치며 그들이 날아오는 손도끼들을 막았다.
이윽고 이전과 같이 학생들과 하이오크들과의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와 양상이 똑같지는 않았다.
열 마리 남짓하던 이전과 달리 지금 쳐들어온 오크의 숫자는 물경 오십.
그때보다 5배나 많았다.
“내가 앞장서마!”
그나마 다행인 점은 테일 교관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단 사실이었다.
마스터에 달하진 못했지만 최상급의 경지에 이른 하이나이트.
그가 단단한 기둥처럼 버텨주고 있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의지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이쪽?’
‘웅!’
시안은 라비의 안내를 따라 흑마법사의 기운을 찾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하이오크의 습격.
분명 이 기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흔적도 없던 하이오크들이, 그것도 50이나 되는 숫자가 쳐들어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렇게 기운의 정체를 찾던 중, 그가 놈과 눈이 마주쳤다.
[크허엉―!]
얼굴에 X자의 큰 상처가 있는, 그리고 남들보다 한층 더 커다란 회색 늑대를 타고 있는 젊은 하이오크.
한 손에 아기 오크를 안은 채로, 반대쪽 손에 든 글레이브를 그를 향해 휘둘렀다.
카앙―!
“…….”
[다시 만났구나!]
전사장 하크쉬가 굳은 표정의 시안을 보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한편 시안은.
‘우웅!’
‘저 녀석이군.’
라비의 반응을 보곤 눈이 가늘어졌다.
하크쉬가 안고 있는 아기 오크.
녀석에게서 악마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